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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심리학의 역할과 핵심 가치

상담심리학의 정체성과 고유성 바로 알기

by 카일
상담심리학이란 무엇일까요?


상담심리학(counseling psychology)은, 간단히 말해 ‘심리학적 원리에 입각한 상담을 통해 인간의 변화를 도모하는 학문’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인접 분야인 임상심리학(clinical psychology)과 상담심리학이 어떻게 비슷하고 어떻게 다른지를 명확히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러한 정의가 갖는 한계 또한 분명합니다. 임상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심리치료(psychotherapy)는 사실상 상담(counseling)과 같은 개념으로 간주되기에, 상담만으로는 두 분과를 구분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상담을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만한 언어가 없다는 것이 마음의 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종종 있었는데요. 때마침 듣게 된 박사과정 첫 수업을 통해 상담심리학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지를 배우게 되었답니다. 어디까지나 미국의 관점에서 미국의 맥락에 맞게 서술된 내용이라, 이를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긴 어려워 보이지만… 상담심리학의 정체성과 고유성에 대한 감을 잡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 기대합니다.


※ 이하 내용은 Gelso와 Williams가 집필한 ⟪상담심리학⟫ 제4판의 내용 일부를 번역 및 요약한 것입니다.

Gelso, C. J., & Williams, E. N. (2022). Counseling psychology (4th ed.).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이탤릭이 지원되지 않아 볼드로 표기합니다)






상담심리학의 역할


상담심리학의 세 가지 역할은 다음과 같습니다.

치료적(remedial) 역할: 개인과 집단에 현존하는 문제를 치료하는 것

예방적(preventative) 역할: 개인과 집단의 문제가 발달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

발달적(developmental) 역할: 개인과 집단이 고유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향상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치료적 역할은 상담의 주된 기능인 심리적 문제의 ‘치료’에 해당하는 개념입니다. 여기에는 개인상담, 커플상담, 집단상담을 비롯해 위기개입(crisis intervention), 해결되지 않은 생애사적 문제를 다루는 다양한 서비스가 포함돼요. 상담심리학, 하면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다 보니 그만큼 중요할 것 같기도 하지만, 정작 상담심리학의 정체성과는 가장 관련이 적은 역할이기도 합니다.


한편 예방적 역할은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어려움을 예상하고, 이를 피하거나 멈추기 위해 개입하는 것을 지칭합니다. 워크샵, 자문(consultation), 교육 프로그램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개입을 통해 내담자의 내적∙관계적 환경을 변화시켜 문제를 예방하고 치료받을 일이 없게끔 하는 것이죠. 예방적 역할은 상담심리학의 영역을 상담 바깥으로 확장하는 근거로 작용합니다.


마지막으로 발달적 역할은 내담자 스스로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발현할 수 있게끔 하는 경험을 계획하고 제공하는 활동을 뜻합니다. 이 역시 워크샵, 성장집단, 세미나 등과 같은 교육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예방적 역할과 일부 중첩되기도 하지요. 다만, 발달적 역할은 문제 예방을 넘어 성장과 발달을 촉진하는, 보다 넓은 범위에서 이루어지는 개입을 포함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현장에서 세 가지 역할은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고, 상담심리학자가 수행하는 다양한 업무 안에서 한데 얽혀 나타나곤 합니다. 따라서 셋을 따로 바라보기보다는 각각의 강조점이 다르다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내담자의 문제를 치료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된 상담이라 할지라도, 그 과정에서 내담자에게 발생 가능한 또 다른 문제를 예방하고 내담자의 저해된 잠재력을 되살리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중 두 가지 역할이 교육과 맞닿아 있다는 것 또한 흥미로운데, 이를 통해 미국에 설치된 상담심리학 프로그램의 절대 다수가 사범대학에 소속되어 있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상담심리학의 핵심 가치


한 개인과 관련된 영역에 머물러 있던 상담심리학의 초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사회정의 옹호(social justice advocacy)와 같은 탈개인적 영역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이러한 맥락 아래, 상담심리학이 지향하는 핵심 가치를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강점과 최적의 기능(strengths and optimal functioning)

전생애 발달과 직업적 성장(lifespan development and vocational growth)

사회정의와 다문화 인식(social justice and multicultural awareness)

단기적∙교육적∙예방적 개입(brief, educational, and preventive interventions)

과학자-실무자 모델(the scientist-practitioner model)



강점과 최적의 기능


상담심리학을 규정하는 첫 번째 가치는 개인이 가진 자원과 강점에 초점을 두는 것을 지칭합니다. 정신건강에 대한 대중의 시각과 사뭇 다른, 문제에서 ‘벗어난’ 관점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는 정신건강 운동(mental health movement)과 Witmer의 클리닉과 같은 상담심리학의 역사와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상담심리학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 중 하나인 Super 또한 ‘아주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갖고 있는 내담자와 상담하더라도, 내담자가 지닌 강점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 상담심리학자의 역할’이라고 역설하기도 했습니다.


내담자가 가진 자원과 강점에 주목하는 것은 상담심리학자가 내담자에 대해 가져야 할 전제와 태도이기도 합니다. 내담자의 문제에만 초점을 두지 않고, 내담자가 가진 강점과 자원을 발판 삼아 문제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변화를 도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지요. 비단 상담뿐만 아니라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연구를 수행할 때에도, 상담심리학자는 자원과 강점을 다루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상담심리학자가 수행하는 다양한 교육적 개입 또한 개인의 자원과 강점에 주목하고자 하는 가치가 반영된 결과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최적의 기능에 초점을 두는 것은 상담심리학이 다루는 문제의 범위와 좀 더 관련이 있습니다. 상담심리학은 임상심리학과 달리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뿐만 아니라 비교적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사람까지도 개입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그렇기에 상담심리학이 다루는 영역은 정신건강은 물론 대인관계, 진로 및 직업을 비롯해 다양한 삶의 일면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이슈를 포괄하지요. 정신장애가 없는데도 어떤 문제로 인해 심리적 부침을 겪고 있는 사람을 돕고자 한다면, 정신병리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대신 그 사람이 가진 자원과 강점을 살려 그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보다 적합합니다. 이 관점에서 ‘최적의 기능’이란, 심리적 건강과 웰빙을 이루는 최적의 삶을 살아가는 상태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임상심리학과 상담심리학을 명확히 구분 지을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라고 생각합니다. 임상심리학은 의학적 모델(medical model)을 바탕으로 ‘환자’의 정신병리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에 특화된 분야지만, 상담심리학은 의학적 모델에서 벗어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심리적 문제에 개입하기 위해 ‘내담자’의 자원과 강점을 살리는 데에 특화된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전생애 발달과 직업적 성장


상담심리학의 두 번째 가치는 인간의 전생애 발달과 직업적 성장을 특히 강조하는 것을 뜻합니다. 삶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심리적 문제에 효과적으로 개입하려면, 한 인간이 전생애에 걸쳐 경험하는 일들이 무엇인지 깊이 이해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적응(adaptation), 전환(transition)과 같은 이슈가 이에 해당합니다.


진로 발달에 관심을 두는 것은, 어쩌면 상담심리학의 정체성 그 자체라 칭할 수 있을 만큼 핵심적인 가치입니다. 잠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산업혁명을 거치며 몇 가지 분류에 지나지 않았던 직업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어떤 직업을 갖는지가 향후 살아가게 될 삶을 좌우하는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맥락 아래 개인의 직업 선택을 돕고자 1900년대 초부터 직업지도 운동(vocational guidance movement)이 시작되었고, 직업지도 운동에 몸담았던 Parsons는 진로상담(career counseling)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정부 기관에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진로상담으로 개인의 직업 선택을 돕는 과정에서 심리학적 원리를 활용해 적성, 능력, 흥미 등을 효과적으로 탐색할 수 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는 곧 ‘상담에 심리학을 접목한다’는 발상으로 이어지게 되었어요. 이후 2차에 걸친 세계대전과 대공황은 상담심리학에 대한 수요를 높이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고, 1940년대에 이르러 상담심리학이 심리학의 분과 중 하나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상담의 두 가지 축을 심리치료와 진로상담으로 규정하기도 할 정도로, 상담심리학과 진로상담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실제로 내담자를 만나 상담하다 보면,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울 만큼 상담의 주된 이슈로 부각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월등히 많습니다. 상담을 통해 직업적 이슈 및 진로 발달에 개입하는 것은 그 어떤 분과에서도 다루지 않는, 상담심리학만의 고유한 영역이라는 점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사회정의와 다문화 인식


상담심리학의 세 번째 가치는 개인과 환경 간의 상호작용(person-environment interaction)에 초점을 두고 옹호(advocacy)와 사회정의(social justice)에 헌신하는 것과 더불어 문화적 맥락에 대한 관심을 상담의 밑바탕으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존의 심리학 이론은 개인의 심리에 국한된(intrapsychic) 영역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계대전이나 대공황과 같은 역사적 대사건에 의해 개인의 행동이 크게 영향받는 것을 목격하면서, 이것만으로는 개인차를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인간을 환경으로부터 분리해 그 심리만을 외따로 파고들기보다, 인간과 환경이 서로 어떠한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탐색하는 것이 개인을 이해하는 데에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개인과 환경 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Sue는 개인에게 미치는 문화적 맥락의 영향을 밝히는 연구를 전개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은 상담심리학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다문화상담(multicultural counseling)의 시작이었어요. 더불어 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회구조적 억압에 대한 관심은 곧 사회정의 옹호라는 상담심리학의 또 다른 지향점을 탄생시키기도 했습니다. 현재 이 둘은 상담심리학 안에서 가장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상담을 하다 보면, 상담만으로는 내담자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어렵다고 느끼게 되는 일이 종종 생기곤 합니다. 아무리 상담을 해도 경제 불황의 영향을 극복하긴 어렵고, 가난에서 비롯된 현실적 문제에 개입하기 어렵고, 사회적 억압과 차별에서 비롯된 정신건강 문제를 해소하기 어려운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니까요. 다문화주의와 사회정의 옹호는 이러한 어려움에 공감하고, 또 이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 상담심리학자들이 내놓은 일종의 답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기적∙교육적∙예방적 개입


상담심리학의 네 번째 가치는 상대적으로 단기적이고, 교육적이며, 예방적인 개입을 지향하는 것을 뜻합니다. 비록 상담심리학자가 일하는 현장에 따라 상담의 양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상담심리학 전반이 추구하는 개입의 양은 대개 6개월 전후입니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내담자가 장기간의 치료를 원하지 않게끔 하는 사회경제적 요소의 영향이 점차 커졌고, 상담 및 심리치료가 보험의 대상으로 편입되면서 비용과 관련된 이슈가 발생하기 시작했지요. 이러한 맥락 아래 단기적 개입을 선호하는 확고한 풍토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단기적 개입이 주를 이루게 되면서, 교육적이고 예방적인 개입의 필요성도 덩달아 늘었습니다. 단기적 개입만으로는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다루기 어려우므로, 이러한 문제가 생기거나 심화되지 않도록 막는 일이 그만큼 중요해졌기 때문입니다.


보험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한국에서도,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이루어지는 단기적 개입이 상담의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공공기관이든 사설 상담센터든, 대부분의 내담자가 장기간의 상담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만큼은 공통적이거든요. 따라서 어떤 곳에서 일하든 워크샵, 교육 프로그램, 집단상담, 각종 강의와 같은 다양한 교육적∙예방적 개입을 더불어 진행하게 됩니다.



과학자-실무자 모델


상담심리학의 다섯 번째 가치는 Boulder 회의에서 확립된 과학자-실무자(scientist-practitioner)라는, 상담심리학보다 상담심리학자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는 내용입니다. 과학자-실무자 모델은 과학적 연구와 심리학적 실무에 대한 전문성 둘 다를 갖는 심리학자(psychologist)를 양성하기 위한 기본 틀로, 심리학자라는 직업이 다른 석사급 인력보다 높은 지위를 확보하게끔 하는 강력한 직업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과학자-실무자 모델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맥락에 부합하는 개념으로, 이를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기엔 무리가 따른다고 봅니다.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심리학자라는 직업이 미국만큼 확고한 정체성을 구축하지 못했을뿐더러, 대부분의 심리학 관련 전문 인력이 박사급이 아닌 석사급이라는 결정적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담으로, 최근 브런치 크리에이터에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는데… 이렇게나 연재가 늘어지고 있는데도 좋은 성과를 얻게 되었어요. 이 자리를 빌려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에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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