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은 변신이다

기존 세계 질서의 거부와 그 행위

by 윤슬

이제는 너무도 당연한 자본주의.

자본주의가 세상을 지배한 것은 너무나도 오랜 일이지만,

자본이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생각보다 그리 먼 얘기가 아니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책을 보고 있으면 자본이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할 무렵,

작가가 시대를 냉철하게 바라보며 분석한 인간상의 진실이 드러난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시대, 우리는 어떤 모습의 인간상일까. 그것이 당연한 일일까.

변신을 통해 카프카의 냉철한 시선을 따라가보기로 한다.


카프카는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태어나 폐결핵으로 생애를 마감했다. 그는 부유한 유대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평범한 지방 보험국 직원으로 근무했다. 그는 그의 문학의 독자적인 세계도, 죽기 직전 이 개월간의 요양 기간과 짧은 국외 여행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떠나지 않았던 ‘프라하의 유대계 독일인’이라는 특이한 환경 아래에서 늘 혼란스러운 생을 지냈다. 카프카의 문학은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인간 운명의 부조리성, 인간 존재의 불안과 무근지성을 날카롭게 통찰하여, 현대 인간의 실존적 체험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표현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그가 쓴 소설 『변신』은 벌레로 변한 한 인간의 이야기이다. 그는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회, 특히 가족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 비참하게 죽어간다. 이 작품은 그로테스크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작품 속 난해성과 실험적인 문체는 후대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것이 오히려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남겨두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오래 남는 도전적인 작품으로 카프카 문학이 자리 잡은 것이다.


흔히 변신 서사라고 하면 변신을 하게 된 이유, 그리고 고난을 겪는 과정, 돌아가는지 아닌지에 대한 결과로 구성되어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카프카의 『변신』에서는 이미 첫 줄에 모든 이야기가 결론지어진다. 주인공인 ‘그레고르’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이미 갑충으로 변해있었다. 그가 갑충으로 변해있다는 사실 외에는 어떠한 비현실적 개입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는 현실적인 작품 속 세상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가 왜 갑충이 되었는지에 대해 어떠한 이유도 작품에서 드러나 있지 않는다. 이것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갑충’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며 끊임없이 이 질문에 대답하고자 노력했는데 갑충은 ‘기존 세계 질서를 거부하고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레고르’는 출장 영업사원으로 늘 일과 시간에 쫓겨야 하고 식사시간도 불규칙하며 지속적인 인간관계도 맺을 수 없는 회사라는 조직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그는 마치 일벌레가 된 것처럼 오로지 돈 버는 기계가 되어버린다. 그는 자신의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음에도 회사에 대한 생각으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정확히 인식한다. 따라서 비현실적인 요소인 ‘갑충’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깨달음에서 비롯된 변화이다.

‘왜 유독 그레고르만이 조금만 직무에 대면해도 곧장 엄청난 의심을 사게 되는 그런 회사에서 근무해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일까? 도대체 회사원들이 죄다 건달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도대체 그들 중에는 아침 한두 시간만이라도 회사를 위해 봉사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이 너무 큰 나머지 정신이 이상해져 그야말로 침대를 떠날 수도 없는 그런 충성스럽고 헌신적인 인간은 하나도 없단 말인가? 오늘 자기한테 일어난 일과 비슷한 일이 언젠가 지배인에게도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보았다.’

즉, 누구에게나 그러한 깨달음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이미 어느 순간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반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반성은 늘 혁명이다. 개인에게는 반성이지만 사회의 거대한 시선에서는 도구적 이성애 사회를 파괴하는 혁명 자체인 셈이다.


이 작품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가족들의 시선이다. 그들의 시선에서도 자본주의 사회의 물신화, 기계화, 소외의 모습이 드러난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파악하기 위해 알아야 할 중요한 부분은 갑충이 되어버린 ‘그레고르’가 문지방을 넘으며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즉 문지방 안쪽의 세계는 자기 내면의 세계이지만 문지방 바깥쪽의 세계는 가족과 사회의 공간으로 분리되어버린 것을 의미한다. 카프카는 당시 독일어를 사용했지만 독일인이라고 인정받지 못했으며 유럽 사회의 기생충이라고 불렀던 당대의 유대인으로 내적 고민을 끊임없이 해 온 인물이다. 자아에 대한 고민은 ‘유대인’이라는 정체성뿐만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아버지가 강요한 삶과 자신이 원하는 삶 사이에서 늘 고민했던 카프카에게 유일한 지지가 되어준 사람은 막내 여동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훗날 막내 여동생의 남편을 대신해서 글을 접고 일을 해야 했던 카프카는 여동생에게 많은 실망감과 원망을 가졌다고 한다. 이러한 카프카의 시절이 『변신』에서도 드러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먼저 아버지에 대한 카프카의 생각을 알아보기 위해 카프카의 일생을 찾다 이러한 구절을 발견했다.

‘어느 날 거인의 모습을 한 아버지가 느닷없이 최후의 심판관이 되어 나타나서는 나를 침대에서 들어내 발코니로 끌고 나갈 수도 있다. 그만큼 나란 존재는 아버지한테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고통스러운 관념에 시달렸다.’

『변신』에서도 거인 같은 아버지의 모습이 드러난다. 카프카는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인정받고 싶은 존재로 여겼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도 아버지라는 인물은 늘 심판관처럼 단오하면서도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그레고르’의 아버지는 그를 사정없이 몰아내기도 하고, 사과를 던지기도 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과연 저 사람이 아버지란 말인가? 그런데 지금 그 앞에 있는 아버지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서 있는데다 은행의 사환들이나 입을 것 같은 금색 단추가 달린 뻣뻣한 푸른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다음은 여동생이다. 실제로 카프카는 누이 동생에 대한 애정을 많이 드러냈는데 결국 일을 하게 된 카프카는 누이 동생이 자신의 편을 들지 않아 모진 말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갑충으로 변신한 ‘그레고르’를 관리한 것은 오로지 여동생이었는데 여동생만이 방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는 부분에서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카프카의 내면을 이해해주려 노력했던 인물이 막내 동생이었듯 이 작품에서도 여동생은 그러한 태도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여동생의 ‘해야 할 의무’와도 같은 것이었다. 여동생에게도 ‘일’이 생긴 것이다. 그녀는 ‘그레고르’에 대한 생각보다는 가족 안에서 역할이 생긴 것을 더 기뻐하는 듯 보였다. ‘그레고르’의 변신 이래 그녀가 직접 그에게 던진 최초의 말은 ‘오빠, 정말 이럴거야?’ 였다. 결국 이해를 넘어서지 못한 그녀는 ‘그레고르’를 내쫓아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자본주의 질서에 벗어난 그에게 크게 나타나는 현상은 ‘음악’, ‘의사소통’, ‘시간’이다. 가장 먼저 여동생을 상징하는 것은 바이올린이다. ‘그레고르’는 초반에 그저 여동생에게 음악 공부를 시켜주고 싶어 했을 뿐 음악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가진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문지방을 넘나들며 겪었던 수난 때문에 방 안에서 갇히게 된 그는 이따금씩 여동생의 연주를 듣는다. 그리고 여동생의 연주에 감동해서 문지방을 다시 넘는다.

‘이렇게도 음악에 감동을 받는데도 그가 과연 동물이란 말인가? 그에게는 마치 자신이 열망하던 미지의 어떤 양식에 이르는 길이 열리는 것 같았다.’

이것은 ‘그레고르’가 내적으로 변신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기계화되고 물신화되어버린 사회 속에서 그는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기계처럼 변해버린 사회 안에서 그는 음악과 예술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을 가지게 되었다. 두 번째로 의사소통이 불가해진다. 문지방을 넘어가면 자본주의 사회와 가족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갑충이 되어버린 그는 점차 가족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함을 알게 된다. 여기서 의사소통이 불가해진 것은 이미 자본주의의 사회 안에서 ‘낯선 무언가’를 발견한 그의 말은 자본주의 속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서는 단지 이방인의 말이며 따라서 어떠한 대화도 통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부속품이 되기를 거부한 그에게 가족들은 모진 행동을 하고 ‘비정상’으로 낙인을 찍기도 한다. 이렇게 ‘그레고르’가 내적으로 변신했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바로 시간의 인식이다. 작품의 초반에 그는 회사에 제대로 가기 위해 아주 작은 단위로 시간을 인식한다. 하지만 갑충이 되어버린 그는 점차 시간의 감각을 잃어간다. 시간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계의 부속품처럼 대하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시간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오직 자기 방을 휘젓고 다니며 가끔 ‘놀이’와 같은 행동을 하거나 여동생의 바이올린 소리를 듣거나 문지방 너머에 있는 가족들의 소리를 들으며 흐름의 변화를 인식한다. 그에게는 더 이상 시간이 중요해지지 않았으며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서의 흐름을 받아드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사회는 어떠한 모습인가에 대해 고민해본다. 끊임없이 일하지 않으면 무능력한 존재라고 인식하는 사회, 기계의 부속품처럼 살아야 하는 사회, 다른 사람을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에 생기는 소외, 무관심함. 이런 것들에 익숙해지기 위해 인간은 얼마나 무감각해졌는가에 대해 반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들의 특징이 늘 ‘죽음’으로 연결되어 지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는 시스템을 운영하기 위해서 그것에 질문을 던지고 벗어나려는 사람들을 추방한다. 따라서 ‘그레고르’ 또한 자신의 자아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을 바라보는 자본주의 사회, 즉 가족들은 그것을 어쩌면 다행이라고 여기는 태도를 보인다. 이는 단지 ‘그레고르’라는 한 인간의 가족 형태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소외가 아니라 현대까지 이어져 온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다 그는 괴물같은 갑충이 되어버린걸까?’로 시작된 질문은 현대인들에게 자본주의로 인해 일그러진 자아의 모습을 떠올려보게 하는 반성의 계기가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