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 비르질 게오르규는 한국에서 다소 익숙한 작가이다. 그는 한국에 1974년, 1976년, 1984년, 1987년 총 4번을 방문했다. 그가 한국에 대하여 남달리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마도 ‘전쟁’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국이 그의 조국인 루마니아와 마찬가지로 잦은 외세의 시달림을 받고 있었으며 특히나 분단국가라는 점이 더 그러했을 것이다. 그는 1916년 루마니아의 동부 지방에 있는 산마을에서 태어났다. 『25시』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성직자’는 당시 두 가지 계층으로 나눌 수 있었다고 한다. 부르주아 성직자는 고혈을 짜내는 소수 지배계급에 빌붙어 삶을 영위하고 있었으며 그에 반한 프롤레타리아 성직자는 천민 취급을 받으며 끼니 걱정을 해야 했다. 게오르규 집안은 후자에 속했으므로 그는 풍요로운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할 줄 아는 아버지를 성인으로 여기며 존중했다고 한다. 그런 그는 작품과 비슷하게 전쟁을 경험한다. 등장인물인 ‘요한 모리츠’가 그랬듯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그는 전장으로 끌려갔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는 글을 멈추지 않았으며 시인 최고의 영예인 ‘왕국 신인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가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한 소설 『25시』는 많은 제약을 겪었지만 프랑스로 번역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고 한다. 따라서 『25시』는 게오르규가 겪었던 사회의 잔상이며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사회 고발에 대한 메시지인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요한 모리츠는 루마니아의 농부이다. 그의 아내를 탐내하던 헌병에 의해 그는 유대인이라는 누명을 쓰고 강제 노동 수용소로 압송되면서 계속된 비극을 맞이한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이 아님을 끊임없이 말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자 헝가리로 탈출하는데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고문을 당하며 독일로 팔려간다. 그곳에서 공장의 기계적인 수칙에 따라 일하며 살다가 독일 장교의 눈에 띄어 잠시나마 안정된 생활을 한다. 하지만 곧 루마니아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포로수용소로 가게 되고 무러 십삼 년 동안이나 수용소를 전전하며 고난의 나날을 보낸다. 그는 어느 날 자동으로 석방되어 아내를 만나게 되는데 또 18시간 만에 체포령이 발포된다. 이 책은 요한 모리츠의 삶을 비추어주는 시선으로 전개되지만 그 안에 있는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주제를 뚜렷하게 나타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것 하나 의미가 없는 구절이 없었고 이렇게 당대의 사회를 비판하고 고발할 수 있는 작가의 필력에 매우 감탄하며 읽었다. 게오르규가 쓴 『25시』는 그 작품 안에 등장인물인 트라이안의 『25시』를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를 독자에게 내비친다. 트라이안 집안, 즉 코루가 집안은 그가 생각하는 사회를 고발하는 목소리이기도 했으며 성직자에 대한 그의 생각이 담겨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 외에 오르단, 모리츠의 어머니, 스잔나 모두 당대의 사회가 낳은 희생물들이며 모두 피해자임을 절실히 보여주었다.
작품에서 요한 모리츠는 ‘야노스, 이온, 야곱, 양켈’로 불린다. 그의 이름이 바뀔 때마다 그의 고향과 인종도 매번 다르게 불린다. 그렇다면 그의 진짜 이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한 사회가, 한 정부나 국가가 한 개인의 이름을 정의할 수 있는가. 이 작품에서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당대의 소련뿐만 아니라 기계주의 문명을 상징하는 미국 또한 같이 비판한다는 것이었다. 게오르규는 작가로서 당대의 사회를 아주 냉철하게 판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상이나 정부도 한 개인에게 정체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 그의 이름이 바뀔 때마다 거대한 한 사회 속에서 개인은 얼마나 무력하고 왜소한 존재인지 확인받는 것 같았다. 요한 모리츠가 여러 이름으로 바꾸어 불리는 동안 아무도 그에게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설명해 주는 이는 없었다.
‘이제 보잘것없는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드리자. 국가라는 비인격적인 압박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자들, 사람을 심문하고 심사하는 자들, 허가를 해주고 나서 금지령을 내리는 자들, 이 모두를 위하여 기도드리자. 그리고 문자나 숫자를 인간의 피와 살보다 진실하고 생명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든 자들을 위하여 기도드리자.’
코르가 사제는 판타나 마을의 헌병과 지사, 시내 헌병대의 젊은 장교, 그리고 요한 모리츠를 죄수로 가두어버린 모든 경관들과 관리들을 머릿속에 떠올려보며 이 기도문을 외운다. 전쟁으로 인해 부당한 일을 겪어야 했으며 한 번도 요한 모리츠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한 그의 일생을 통해 작가는 개인의 희생을 보여주며 당대의 사회를 고발하고 있었다. 여러 수용소를 가는 요한 모리츠를 떠올리며 나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대해서도 같이 떠올려보았다. 그렇다면 현재의 우리는 어떠한가에 대한 질문에 나는 쉽게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세계대전이라는 어마무시한 공포와 시대의 격변에 비해 현대인들은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국가에 지배받고 있는, 혹은 사회가 부여하는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개인에 불과하다. 여전히 한 개인의 목소리는 요한 모리츠의 누명을 벗길 수 없었던 것처럼 너무도 무력하고 왜소한 목소리인 것이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현대에서 이뤄지고 있는 너무나도 평범한 악, 그리고 그것에 지배받고 있는 한 개인이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전쟁은 멈추었으나 트라이안이 말하는 ‘기계 노예’가 되어버린 삶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5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25’ 시는 인간사회에서 존재하지 않는 허무의 시간을 의미한다. 게오르규는 인간적인 모든 가치를 무자비하게 병들게 하는 기계 문명을 고발하고 그것은 기계 주의적 전체주의를 낳게 된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는 공산주의의 출현, 산업주의 발달 모두 기계 문명의 획일성과 전체성에서 비롯된 사상임을 지적하며 작게는 서양의 시간을 모두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25시. 이것은 인류의 모든 구제의 시도가 무효가 된 시간이야. 메시아의 왕림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시간이지. 이건 최후의 시간이 아니라 최후의 시간에서도 한 시간이나 더 지난 시간이니까. 이것은 서구사회의 정확한 시간, 다시 말하면 현재의 시간을 뜻하고 있네.’
트라이안은 자신이 ‘25시’에 대한 소설을 쓸 것을 말하며 ‘25시’를 이렇게 정의한다. 또 시민이란 인생에서 사회적 가치만을 인정하는 인간을 말하는 것인데 이 인간은 기계 노예와 교섭을 맺은 이후에 지구상에 가장 위험한 동물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기계 사회에서는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사라지고 효율성이 반대로 인간을 평가한다. 개인적인 가치를 무시하고 일반화하는 것은 한 개인의 정체성을 고려하지 않고 인종, 국가, 사상으로 그들을 차별하게 되는데 이것이 전쟁을 낳게 된다. 승전국이 패전국에게 하는 폭력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25시’에 이미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모든 구제의 시도가 무효가 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가치를 모두 상실한 시대라는 것을 의미한다. 최후의 시간보다도 더 최후의 시간 속에서 살아갔던 게오르규는 문인들이 ‘잠수함의 토끼’와 같은 존재여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으면서, 또 게오르규의 일생과 그가 했던 여러 발언들을 통해서 당대의 사회와 현대의 사회를 비추어갔지만 현대 사회에서 마주치고 있는 ‘25시’ 또한 읽지 못하고 있던 나 자신이 매우 부끄럽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