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캐니한 신체: 론 뮤익, 라캉의 대상 a

그리고 그로테스크의 재현

by 심화월



MaskⅡ, 론 뮤익

1. 론 뮤익과 대상 a

론 뮤익은 ‘순환’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탄생과 죽음이라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문제를 탐구해 온 작가이다. 그의 작업은 단순한 리얼리즘을 넘어, 피부의 질감, 신체의 비율, 과장된 생물학적 디테일 등을 통해 보는 이에게 감각적인 충격과 철학적 사유를 동시에 유도한다. 나는 그의 조각, 특히 피부의 돌출부나 주름, 구멍 같은 요소를 마주했을 때 강렬한 육체적 자극과 함께, 라캉의 철학에서 말하는 ‘잉여향유’(surplus enjoyment)의 감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라캉의 철학에서 주이상스(jouissance)는 단순한 쾌락이 아니라, 쾌락이 지나쳐 고통과 맞닿아 있는 어떤 극단적인 감정 상태를 의미한다. 론 뮤익의 작품은 과장된 신체를 통해 그 경계에 도달한다. 예컨대,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과도하게 늘어난 살결이나 노화된 피부의 질감은 시각적 혐오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뗄 수 없이 끌리는 시선의 ‘향유’를 제공한다. 이것은 마치 라캉이 말한 대상 a, 즉 욕망의 대상이자 그 결여를 드러내는 잉여적인 것과도 연결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론 뮤익의 조각은 단순한 인체 재현이 아니라 상징계의 균열을 드러내는 실재계의 잔여물로 기능한다. 그것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질서와 체계(상징계)를 흐트러뜨리며, 낯설고 이상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이와 관련해 내가 떠올린 것이 바로 라캉의 대상 a였다. 대상 a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상징계와 실재계를 알고 가야 하는데, 쉽게 말해 상징계는 질서의 상태, 실재계는 혼돈과 혼란의 상태를 일컫는다. 실재계를 감싸고 막아주는 역할인 상징계는 완벽하지 않다. 어떤 경우에는 구멍이 생기기도 하는데, 그것이 바로 대상 a이다. 대상 a는 눈앞에 존재하지만 평상시에는 인식되지 않고,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며 상징계에 균열을 내는 계기가 된다. 론 뮤익의 작품을 마주했을 때 우리가 경험하는 정서적 충격과 위화감은 바로 이러한 대상 a의 효과라고도 볼 수 있다. 라캉은 인간의 무의식이 언어(즉 상징계)를 통해 구조화되며, 이 상징계는 사회적 질서, 법, 도덕, 규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 내부에는 항상 이 체계로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무언가, 즉 실재계의 요소가 존재하며, 그것이 불쑥 상징계를 뚫고 나올 때 불안, 공포, 광기가 발생한다. 이 실재계의 일부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대상 a이며, 이는 기존의 현실 인식을 뒤흔든다.


대사들, 한스 홀바인


2. 질서의 구멍: 뮤익, 라캉, 그리고 그로테스크

이 개념은 한스 홀바인의 회화 《대사들》을 예로 들 때 더욱 분명해진다. 이 작품에서 중앙의 대사들은 상징계의 인물들이다.* 이성과 합리, 권위와 교양의 화신처럼 보인다. 그러나 화면 아래 비스듬히 그려진 왜곡된 해골 이미지는 그 체계의 구멍을 상징한다. 해골은 특정 각도에서만 온전히 보이기에, 이를 발견하는 순간 감상자는 기존의 안정된 해석 구조가 흔들리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 해골은 대상 a로 출현하며 관람자에게 실재계의 존재를 직면하게 만든다. 이런 철학적 사유는 나에게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고, ‘그로테스크’라는 주제와도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고 느꼈다. 그로테스크는 단순한 괴이함이나 혐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금기, 규범, 질서에 대한 도전이자, 억압된 욕망과 상상력의 해방구이다. 특히 중세 민중문화에서 나타나는 저속한 농담, 욕설, 신체적 과장 등은 억눌린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집단적 탈출구*였으며, 이것은 바흐친이 말한 민중적 웃음문화의 힘과도 연결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중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이다. 우리는 종종 중세를 '종교적 억압의 시대'로 기억하지만, 라캉이나 푸코, 들뢰즈 같은 철학자들은 그와 정반대의 해석을 내놓는다. 오히려 그들은 중세가 무의식, 욕망, 광기, 신비, 초월 등 다양한 차원이 상징계로 완전히 조직되지 않은 채 살아 숨 쉬던 시기로 보았다. 중세 사회는 광인을 단지 병자로 보지 않았고, 신의 음성을 듣는 자, 신성한 예언자로 보기도 했다.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중세를 광기가 사회 속에서 함께 존재했던 시기, 즉 다른 삶의 가능성이 공존할 수 있었던 시대로 해석한다.


반면,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는 이성과 합리성을 기준으로 새로운 상징계를 구축하고, 이 체계에 포함되지 않는 모든 것을 배제하거나 병리 화했다. 라캉이 말하는 강박증적 구조는 바로 이 르네상스적 예술과 이성의 질서에서 잘 드러난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율되고, 감정이나 무질서, 광기 따위는 배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맥락에서 르네상스는 ‘이성의 승리’가 아니라 ‘무질서의 억압’, 욕망의 봉쇄로 읽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시각을 통해, 론 뮤익의 작업과 라캉의 철학을 그로테스크 개념과 연결시켜 탐구하는 것이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 될 수 있다고 느꼈다. 뮤익의 조각은 기존의 신체 이미지에 ‘구멍’을 내고, 낯설고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상징계의 질서를 흔든다. 그것은 실재계의 파편이 튀어나온 흔적이자, 우리가 외면했던 광기와 죽음, 육체의 유한성을 직면하게 만드는 기표다.

3. 낯익은 낯설음: 론 뮤익의 조각과 언캐니

또한, 현대 조각에서 사실주의는 더 이상 단순한 재현의 도구에 머물지 않는다. 그 극단적 형상화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유도하고, 감상자에게 복합적인 감정, 나아가 심리적 불안을 야기한다. 론 뮤익은 이러한 감정의 교차점에 선 조각가이다. 그의 작품은 압도적인 사실성과 비정상적인 크기를 통해 인간의 신체를 극적으로 재현하며, '인간다움'에 대한 불안정한 감정을 유도한다. 프로이트는 「언캐니(Uncanny)」(1919)에서 익숙한 것이 돌연 낯설게 다가오는 순간을 '언캐니'라 정의하였다. 이는 억압된 기억이나 불편한 진실이 은폐되지 않고 드러날 때 발생하는 심리적 효과로, 일상의 사물이나 존재가 감상자에게 강한 불쾌감과 혼란을 유도한다.


Dead Dad, 론 뮤익


In Bed, 론 뮤익


론 뮤익의 조각은 바로 이러한 언캐니 한 경험*을 극대화한다. 예컨대 그의 작품 Dead Dad(1997)는 실제 자신의 아버지의 시신을 모티브로 한 실물보다 작은 크기의 누드 조각으로, 극도로 사실적인 피부 질감과 체모, 주름까지 구현되어 있다. 관람자는 그것이 조각이라는 사실을 인지함에도 불구하고, 그 생생한 묘사 앞에서 일종의 감각적 경계를 넘나드는 불편함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현실의 신체가 아니라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보이며, 동시에 "죽음"의 정체가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뮤익의 인물들은 대부분 고통, 불안, 노화, 상실 등 인간의 내밀한 상태를 포착한다. In Bed(2005)에서 거대한 침대에 누워 먼 곳을 응시하는 여성의 표정은 꿈결 같은 무표정 속에 공허함과 존재의 의문을 담고 있다. 이런 정서는 감상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경험이나 무의식을 반추하게 만들며, 이는 곧 프로이트적 언캐니의 감정적 작동을 일으킨다.

한편, 뮤익의 작품은 그로테스크의 조형성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미하일 바흐친은 『라블레와 그의 세계』(1965)에서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을 신체의 과장, 파괴, 재생을 통한 미학적 전복으로 설명한다. 즉, 규범적이고 이상화된 인간 형상이 아니라, 생리적, 감각적, 퇴폐적 신체를 통해 권위와 위계를 해체하는 방식이다. 뮤익의 조각에서는 ‘사이즈’의 전복을 통해 그로테스크적 신체가 드러난다. 일반적인 인물상보다 훨씬 거대하거나 극도로 축소된 인물 조각은 그 자체로 감상자의 시지각 체계를 혼란스럽게 한다. 예컨대 Boy(1999)는 약 5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소년의 형상을 통해, 순수하고 나약한 존재인 아동을 강압적으로 확대함으로써 오히려 감정적 위화감을 유도한다. 뮤익은 또한 피부의 주름, 상처, 붉은 기, 정맥의 돌출 등 지나치게 사실적인 디테일을 구현한다. 이는 신체를 미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시간성과 유한성, 생물학적 조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매체로 전환시키며, 감상자에게 본능적 이질감을 유도한다. 이와 같은 디테일은 종종 관람자의 '몸'에 대한 자의식을 환기시키며, 존재론적 불안을 증폭시킨다.

론 뮤익의 조각이 주는 인상은 단순히 사실적인 구현에서 오는 경이감을 넘어, 감상자 내부의 심리적 층위를 자극하는 체험이다. 그의 작품은 시각적 리얼리티와 비례의 일탈, 정지된 움직임 사이에서 감상자의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흔든다. 또한, 그의 인물들은 극도로 개인적이며 내밀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어, 감상자는 타인의 사적 감정을 몰래 엿보는 듯한 도착적 시선을 가지게 된다. 이로 인해 감상자는 무언의 죄책감과 공감, 혹은 회피 본능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는 바로 뮤익의 작품이 언캐니와 그로테스크의 효과를 동시에 발현하는 지점이다.

론 뮤익의 조각은 사실성과 불균형, 친밀함과 불편함, 아름다움과 해체의 교차점에 서 있다. 그의 작업은 단지 기술적 조형을 넘어서, 감상자의 신체적 감각과 심리적 무의식을 건드리는 촉매로 작용한다.

뮤익의 조각은 미학적 범주를 다시 묻는다. ‘아름답다’ 거나 ‘사실적이다’는 표현이 더 이상 충분하지 않은 이 조형적 언어 속에서, 감상자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언캐니는 그 불편함을 언어화하며, 그로테스크는 미의 기준을 교란시킨다. 결과적으로 그의 작품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조건(죽음, 시간, 몸의 유한성)을 마주하는 시각적 장치로 기능한다.


절규(Skrik), 뭉크

4. 주이상스의 침묵, 그로테스크한 이웃

더 나아가 여기서 ‘외밀한’이라는 개념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공간에 주목하여 작품을 감상하며 움직이는 우리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촉각적 공간의 경험을 작품을 감상하는 우리들의 동선 위의 놓는다면, 그것을 기점으로 론 뮤익의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을 아울러 전체성의 공간 개념이 될 것이다. 작품과 감상자, 그 공간 등 전시장의 모든 모습은 마치 공간을 쪼개놓고 바라보는 피카소의 시선, 즉 아비뇽의 여인들(Les Demoiselles d'Avignon, 1907)의 한 작품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것에 친근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대부분 그러하지 않을 것이다. 뮤익의 작품은 보통 거대한 것은 왜소하게 나타내고 작은 것은 크게 확장되어 있다. 우리는 친밀함보다는 낯선 감정을 느낄 것이다. 뭉크의 절규(Skrik,1893)에서 절규하고 있는 사람 뒤에는 낯선 이들이 걷고 있는 장면이 보인다. 이 절규의 외침을 고정시키는 침묵은 우리가 기다리고 있었던 존재, 가장 가까운 그 존재의 현존이 솟아나는 침묵이다. 더군다나 이웃은 언제나 여기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렇게 가장 가까운 이 사람, 모호한 그, 우리가 그를 어디에 위치시켜야 할지 알지 못하는 그 이웃, 신약의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의 문장 속에서 반향하고 있는 그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그를 포착해야 하는 것일까요?”*

침묵의 외침이 어디서부터 들려오는지를 라캉은 묘사한다. 그것은 바로 주이상스(jouissance)로부터의 외침이다. 이 소리는 아직 상징화되지 않았고, 상징계의 이방인이기 때문에 만약 그것이 내부에서 울린다면 우리는 “아, 이것은 고통스러운 소리구나”라고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다스팅, 주이상스, 죽음 충동의 세계로부터 반영되어 들려오는 이 외침은 의미화(상징계)될 수 없으며, 사실상 들을 수조차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외침은 강력한 반향을 남기고, 라캉은 이 외침의 주체를 바로 ‘이웃’이라 명제한다. 신약에서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웃은 주이상스, 다시 말해 외부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 이웃을 외면하려는 태도를 취해왔고, 이 외부가 우리를 찾아올 때조차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회피하는 대신, 마주하고 살펴보아야 한다. 이 지점에서 라캉의 논의는 신약의 구절과 맞닿는다. 만약 이웃이 주이상스임을 알게 된다면, 그렇다면 ‘나 자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나 자신이란 상징계의 대타자가 부여한 좌표와 의미들의 집합이다. 그렇기에 나 자신은 온전히 ‘나’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믿지만, 사실 언제나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언제 드러나는가. 바로 주이상스의 증상이 내부로 침투해 우리를 흔들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의미를 감각하게 된다.

론 뮤익의 조각을 마주할 때, 우리는 종종 그것이 ‘너무 크거나 너무 작다’는 낯선 감각을 가장 먼저 경험한다. 그것은 관람자의 지각을 흔들고, 친밀감의 세계를 불편하게 교란시킨다. 그러나 바로 그 ‘외밀한’ 경험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진실에 가까워진다. 뮤익의 인물들은 무언가를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침묵 속에 있다. 그러나 그 침묵은 단순한 정적이 아니라, 마치 뭉크의 《절규(외침)》에서처럼 말해지지 않은 것의 외침이다. 라캉이 ‘주이상스(jouissance)’라 부른, 상징계가 붙잡지 못하는 과잉의 감각, 그것이 바로 이 침묵의 울림이다. 이들은 고요하지만, 그 안에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음’으로 강하게 반향 한다. 뮤익의 작품이 주는 이 낯설고 기묘한 감정은 관람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왜 이 조각 앞에서 불편한가? 그 불편함은 주이상스의 흔들림이다. 그 순간 우리는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진실과 맞닥뜨린다. 론 뮤익의 조각은 그 진실을 ‘이웃’처럼 우리 곁에 데려온다. 라캉이 말하듯이, ‘가장 가까우나 포착할 수 없는 존재’는 상징계의 바깥, 외부에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웃이 우리를 뚫고 들어와 침묵 속에서 외친다. 그 외침은 들리지 않지만, 몸으로 느껴진다. 뮤익의 작업은 ‘감상하는 행위’ 자체를 촉각적이고 공간적인 것으로 확장시키며, 관람자의 몸과 감정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다. 결국, 론 뮤익의 작품은 관객에게 상징계의 벽을 넘어서 ‘외밀한’ 타자와 마주하라고 요구한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것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 이것이 뮤익의 침묵하는 조각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외밀한’(intimate-exterior)이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그로테스크는 언제나 가장 안쪽에 숨겨진 것이 외부로 흘러나올 때 발생한다. 뮤익의 조각은 그 ‘흘러나옴’의 장면이다. 감상자는 그의 조각 앞에서 거리감을 느끼면서도 강하게 끌린다. 그것은 우리가 억눌러온 이웃, 즉 주이상스와 조우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론 뮤익의 조각은 단순한 리얼리즘이 아닌, 그로테스크한 리얼이다. 그것은 몸이라는 장소에서 ‘나’와 ‘타자’, ‘쾌락’과 ‘고통’, ‘침묵’과 ‘외침’, ‘상징’과 ‘실재’가 충돌하는 자리다. 그로테스크는 이 충돌의 흔적이며, 뮤익은 이를 통해 현대인의 감각과 존재를 낯설게 다시 보여준다.


5. 무너진 이상, 웃고 있는 몸

론 뮤익의 조각 앞에 서면, 우리는 무언가 익숙한 것을 본다. 그것은 인간이다. 그러나 동시에 전혀 익숙하지 않다. 너무 크거나, 너무 작다. 주름 하나, 털 하나까지 정밀한 현실을 구현했지만, 그것은 현실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러한 이중성은 바로 바흐친이 말한 그로테스크의 유쾌한 상대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뮤익의 조각은 고전주의가 숭배한 완전한 몸, 순결하고 이상적인 형상의 이상을 해체한다. 그의 인체는 과장되거나 왜곡되어 있으며, 때로는 너무 노골적이고 불편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뮤익의 조각은, 고전주의가 배제했던 개념을 존엄하게 드러내며, 이들을 공식적인 미의 규범 바깥에서 긍정한다. 뮤익은 엄숙하지 않다. 그의 조각들은 침묵하고 있지만, 그 침묵은 무거운 고요함이 아니라 일종의 유쾌한 곤혹감이다. 우리는 그의 거대한 아기의 몸 앞에서 웃음을 터뜨린다면, 이때의 웃음은 조롱이 아닌 이해이며, 그로테스크한 것에 깃든 활력이다. 바흐친이 말했듯, 그로테스크는 해체하면서 동시에 부활시킨다. 뮤익의 작품은 기존의 ‘몸의 규범’을 무너뜨리지만, 무너진 그 자리에서 ‘새로운 몸’, ‘새로운 인간’의 가능성을 유쾌하게 조형해 낸다.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의 《기이한 환상들》과 같이 북유럽 르네상스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은 중세의 엄숙한 형식미를 벗어나 인간의 육체를 왜곡하고 뒤틀며, 그 속에 감춰진 사회의 권위, 종교적 위계, 도덕적 금기를 해체했다. 이 전통은 단절되지 않았다. 오히려 현대 조각가 론 뮤익에게로 이어지며, 더욱 정교하고 정적이면서도 파괴적인 방식으로 신체성에 대한 비판을 지속한다. 뮤익의 작품은 겉보기에 매우 사실적이다. 그러나 이 사실성은 전통적인 리얼리즘이 아니다. 그것은 고전주의 조각이 숭상한 균형 잡힌, 남성적인, 이상적 신체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갖는다. 노골적으로 늙은 얼굴, 수줍게 웅크린 나체,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발가락과 잔털들, 이 모든 것은 ‘정상적’으로 여겨졌던 신체의 기념비성을 조용히 해체한다.


* 장용순. (2023). 라캉, 바디우, 들뢰즈의 세계관

* 이재걸. (2015). 북유럽 르네상스 회화와 그로테스크-W. 카이저와 B. 바흐친의 이론을 중심으로. 예술문화융합연구, 3(0), 117-155.

* 정연이. (2022). 론 뮤익의 조각에 나타난 삶과 죽음의 미학. 기초조형학연구, 23(1), 465-479.

* 라캉 세미나 17, 1969년 3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