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쾌

장파 전시 리뷰

by 심화월




장파의 작품은 특정 냄새를 맡는 순간, 설명되지 않은 채 어린 시절의 불쾌한 감정이 소환되는 경험과 닮아 있다.


그것은 기억을 회상하게 하기보다 주체가 개입하기 이전에 이미 작동하던 감각의 결합을 되살린다. 들뢰즈가 말한 수동적 종합이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아직 ‘나’가 인식하거나 판단하기 전에 감각과 사건들은 이미 묶이고 흘러간다. ‘나’ 이전에 냄새가 존재하고 냄새가 나를 인지한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의미를 부여하는 능동적 힘이 아니라 흐름이 먼저 서 있고 그 흐름이 주체를 통과시키는 수동적 작동이 전면에 놓인다.


장파의 작업은 이 수동적 종합을 하나의 감각적 사건으로 제시한다. 감상자는 대상을 바라보며 의미를 구성하기보다 이미 구성된 흐름에 노출된다. 그 흐름은 설명되기 이전에 반응을 촉발하고 판단 이전에 신체를 점유한다. 특히 작품에서 감지되는 이접의 에너지는 고정되지 않은 실재계의 반反기표로서 누멘적 성격을 띤다.


어떤 대상을 A로 개념화하려 하면 B가 튀어나오고 B로 붙잡으려 하면 C가 미끄러진다. 단일한 규정은 끝내 성공하지 못한다. 이 실패의 반복 속에서 남는 것은 어떤 현상 규정으로도 포섭되지 않는 잔여—즉 누멘이다. 이접은 의미화를 가능하게 하는 논리가 아니라 의미화를 지속적으로 실패하게 만드는 구조로 작동한다.


따라서 장파의 작품 앞에서 감상자는 ‘아름답다’ 혹은 ‘역겹다’라는 판단에 쉽게 도달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판단 이전에 이미 정해져 있는 어떤 감각적 기표가 감상자를 선점한다. 우리는 의미를 붙이기 전에 이미 의미화된 흐름에 놓인다. 냄새가 연상을 규정하듯, 작품은 감상자의 반응을 사전에 배치한다. 그러나 그 기표는 붙잡히는 순간 휘발된다. 이미 사라지고 있는 냄새처럼, 감각은 규정되는 동시에 미끄러진다.



건조해지고 말라붙은 허파들처럼 작품은 호흡을 요구하면서도 완전한 흡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내가 그 그림을 ‘아름답다’고 정의하기 전에 오히려 아름다움이 나를 정의하는 감각이 먼저 도착한다. 혐오하기 전에 혐오가 나를 규정하는 기분. 이 선행성 속에서 감상자는 주체가 아니라 통로가 된다. 그것은 인식의 결과가 아니라 인식의 발생 이전을 겨냥하며 판단의 언어가 아니라 수동적 종합의 흔들림을 호출한다. 이접적으로 분기되는 누멘의 에너지는 작품을 하나의 해석으로 고정시키지 않고 감상자를 사유의 멈춤—그러나 감각은 과잉으로 활성화되는 지점—으로 이끈다.



이 얼굴은 표정을 가진 얼굴이라기보다 장파의 스트로크가 잠시 머물러 형성한 하나의 장에 가깝다. 화면을 관통하는 장파의 스트로크는 더 이상 피부의 외곽을 따르지 않는다. 그것은 연접된 내장들처럼 서로를 밀고 당기며 이어지고 신체 내부에서만 감지될 법한 오브제를 외부로 끌어올린다.


피부는 벗겨지고 얼굴은 해체되며 눈·코·입은 각각의 기능을 수행하기보다 내부 기관들이 잠시 얼굴의 형태를 빌려 드러난 것처럼 보인다. 장파의 스트로크는 묘사를 위한 선이 아니라 신체 내부의 압력과 점액질 같은 감각을 그대로 번역한 흔적이다. 즉, 이 얼굴은 그려진 것이 아니라 밀려 나왔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눈에 띄는 것은 스트로크의 통접성이다. 하나의 획은 끝나지 않고 다른 획으로 스며들며 기관과 기관, 표면과 내부를 끊임없이 연결한다. 이 통접은 해부학적 질서가 아닌 감각의 질서에 가깝다. 무엇이 눈이고 무엇이 내장인지 구분하는 순간보다 그것들이 하나의 덩어리로 감각되는 순간이 더 오래 지속된다.


이처럼 강렬하고 밀도 높은 얼굴이 화면 중앙을 점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과잉되거나 난삽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배경 패턴의 전략적 사용에 있다. 반복되는 패턴들은 얼굴의 유기적이고 불규칙한 스트로크와 대비되며 화면 전체에 리듬과 정돈감을 부여한다. 이 패턴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얼굴을 둘러싼 하나의 프레임이자 완충 장치로 기능한다. 만약 이 얼굴이 단독으로 존재했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과잉된 신체, 혹은 감각의 폭주로 읽혔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장파는 배경에 루이비통 패턴을 연상시키는 반복 구조를 배치함으로써 이 내장적 얼굴을 하나의 이미지로 세련되게 봉합한다. 내부의 혼탁함과 외부의 정제된 패턴이 충돌하면서 화면은 오히려 균형을 획득한다.



장파는 동판화 특유의 예리한 선을 통해 이전보다 한층 응축된 감각을 작품에서 드러낸다. 이전의 회화 작업이 색채의 덩어리로 감각을 즉각적으로 자극했다면 이 작업은 금속판을 긁어낸 수많은 선들의 집합으로 시선을 사로잡으며 화면 안으로 끌어들인다. 화면을 가득 채운 잔머리 같은 선들은 무작위적 파편이라기보다 동판화라는 매체의 특성 위에서 차분히 쌓아 올려진 일종의 직조에 가깝다. 이 세밀하고 정제된 밀도는 감상자로 하여금 작품을 쉽게 밀어내지 못하게 하며 불편함조차 하나의 시각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작품 속 오브제들은 각기 기괴하고 이질적인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일관된 묘사 방식 속에서 하나의 시각적 질서를 형성한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덩어리감과 개성적인 형상들은 감상자에게 개별 이미지를 해석하기보다는 화면 전반을 감싸는 감각의 분위기를 먼저 인식하도록 유도한다. 형태는 흩어져 있으나 기법은 응축되어 있는 이 긴장 관계가 시각적 흥미와 함께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불편함을 동시에 만들어낸다.


장파 전시에서 감상자는 대상을 해석하는 주체라기보다 해석에 의해 소모되는 하나의 신체로 남게 된다. 장파의 작품은 해석을 요구하기보다 감각이 어떻게 먼저 작동하는지를 조용히 체감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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