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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주 May 08. 2020

방송사고 뒤 드라마 제작 환경

지난 3월 21일, SBS 드라마 '빅이슈'에서 특수효과가 마무리되지 않은 장면들이 방영되는 방송사고가 일어났다. '스틸 잡힐 때 사진 찍히는 효과 넣어주세요' 등 작업 지시 문구와 가편집 상태의 화면들이 날 것으로 송출된 것이다. 다음날 시청자 게시판에 “촬영 및 편집에 더욱 최선을 다하겠다.”는 사과문이 올라왔다. 하지만 이번 방송사고가 최선을 다해서 되는 단순 노력의 문제가 아닌, 드라마 제작 환경에서 비롯된 사고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 빅이슈만의 문제가 아닌 방송사고
2017년 12월 tvN 드라마 '화유기' 또한 와이어를 지우지 않고 미완성본을 방영하는 유사한 방송사고를 냈다. 이러한 송출 사고 뿐 아니라 '화유기' 미술 스태프가 새벽 근무 중 조명을 설치하다 3m 높이에서 추락해 하반신이 마비되는 사고도 발생했다. 이러한 사고는 비단 '빅이슈'나 '화유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2018년 8월에는 SBS 드라마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스태프가 내인성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의 미술 스태프도 뇌동맥류 파열로 사망했다. 두 번의 사망 모두 제작사 측은 사망 원인이 과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스태프의 경우 사망 직전 40도를 넘나드는 날씨에 5일간 76시간의 노동을 했으며, '킹덤' 스태프는 촬영을 마치고 서울로 귀가 중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 장시간의 노동이 그들의 죽음과 무관하다고 하기 어려워 보인다. 영화노조는 '킹덤' 스태프의 죽음을 과로사라고 주장하며 방송 제작 환경의 개선을 촉구했다. 이러한 일들에 앞서 드라마 제작 실태를 여실히 드러낸 사건은 2016년 tvN 드라마 '혼술남녀' 이한빛 PD의 자살이다. 그는 유서를 통해 일 20시간 이상 노동하는 비정상적 방송 제작 환경을 고발했다. 그의 죽음으로 기형적인 방송 산업 정상화를 목표로 한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이하 한빛센터)'가 등장하기도 했으나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사고들이 여전히 제작 환경에 개선될 점이 많음을 보여준다.


◇ 방송사고, 그 이면의 원인
이러한 사고는 빨리, 싸게 찍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제작 환경에서 비롯됐다. 드라마 제작 기간은 곧 제작비용이 된다. 드라마를 제작하는 대다수의 스태프들은 일급을 받기에 제작사는 비용 절감을 목적으로 그들이 하루에 최대한 노동하도록 만든다. 효율적인 제작은 주로 하청업체 근무자들의 강도 높은 노동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빨리 싸게 찍도록 할 수 있었던 건 방송업계가 근로기준법의 보호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2018년 2월 근로기준법 개정 전까지 ‘방송업’과 ‘영상·오디오 기록물 제작 및 배급업’은 근로시간 및 휴게시간의 특례가 적용되는 특례업종이었다. 특례업종은 기준 근로시간을 초과하여 근무하도록 할 수 있으며 휴게시간을 변경할 수 있다. 또한 방송 스태프들은 근로자성을 인정받지 못해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었다. 이에 ‘드라마제작환경개선 TF’에서 “장시간노동, 임금체불, 산업재해가 발생해도 방송사와 제작사, 고용노동부는 각자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했다.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것이다.”라는 성명을 내는 등 방송 제작 환경 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2018년 정부가 드라마 제작 현장을 근로감독한 결과, 프리랜서 계약을 체결했다고 하더라도 총감독의 지시를 받는 구조에서 일하고 있어 근로자로 보고 근로기준법상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또한 근로기준법이 개정되어 300인 이상 사업장은 주당 최대 근로시간이 68시간으로 축소됐고, 올해 7월부터는 주 52시간제가 적용된다. 50인 이상 사업자의 경우 2020년에, 5인 이상 사업자의 경우 2021년 7월에 주 52시간제가 적용될 예정이다. 영상·오디오 기록물 제작 및 배급업의 95%가 50인 미만 사업장이므로 실질적인 적용은 2020년부터라고 볼 수 있겠다. 한편에서는 이러한 근로시간 제한이 방송 산업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라며 근로시간 단축으로 인한 인건비 부담, 경영악화를 우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제도 변경으로 인한 단기간의 어려움보다 드라마 현장의 근로자들이 사람답게 일할 수 있도록 방안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한빛센터에 보내온 드라마 ‘아는 와이프’ 스태프의 편지 내용에는 “드라마 스태프는 사람이 아닙니까. 1시간 쪽잠에 20시간 이상의 노동, 급여는 하루 치, 제작부 PD들의 눈치 보기 전쟁... 나의 시간을 올곧이 투자해서 얻은 것은 나는 염전밭의 노예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다는 생각뿐입니다.”라고 쓰여있다. 강도 높은 노동을 그저 방송 업계의 당연한 특성이라고 여기기에 카메라 뒤 사람들이 받은 고통은 너무나 크다.


◇ 사전제작, 하나의 해결책 될 수도
근로기준법 외에도 드라마 제작 환경을 열악하게 만든 것은 사전제작의 부재다. 시청자의 반응을 따라 이야기를 유연하게 전개시키겠다는 목적으로 쪽대본을 쓰며‘생방송 드라마’라고 불릴 정도로 드라마의 전반부가 방영될 때 후반부를 편집하는 등 빠듯하게 드라마를 송출하곤 한다. 이러한 사전제작의 부담은 오롯이 드라마 스태프들에게 돌아간다. 특히 CG 작업이 많은 ‘화유기’나 ‘빅이슈’같은 드라마의 경우 촉박한 시간에 후반 특수작업이 더욱 부담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환경에서 벗어나 드라마 업계에서도 9to6를 실현해낸 작품이 있다. 최근 성황리에 종영한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주연 배우 남주혁은 에스콰이어와의 인터뷰에서 “밤샘 촬영은 없었고, 야외 촬영도 새벽에 끝난 날이 손에 꼽는다”며 “대부분 오전 9시에 시작해 오후 6시에 끝났다. 배려 덕분에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눈이 부시게’는 전체 대본이 완성된 후 촬영한 사전 제작물이다. PD는 사전제작 시스템이“당연히 전체 맥락을 파악하며 진행한 것이 제작에 효율적이었다고 생각하며, 특히나 복선과 반전이 있는 구성일 경우 사전 제작 형태는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눈이 부시게’가 사전제작물의 가능성과 그에 따른 업무 환경의 개선을 보여주었듯이 방송의 질적 측면에도, 제작 환경 측면에도 생방송, ‘쪽대본’ 은 도움이 되기 어렵다.


◇ 드라마 제작환경, 장기적 개선 필요
한편 다음달 9일, ‘드라마 제작환경 개선 협의체’의 네 주체(방송 스태프‧방송사‧제작사‧언론노조)가 최초로 한자리에 모여 제작환경에 관해 논의할 예정이다. 스태프지부는 ▲휴식시간 포함 하루 12시간 노동 ▲개별근로 계약서 작성을 핵심 쟁점으로 꼽았다. 그러나 그들 또한 “이번 만남으로 단번에 합의되리라 보진 않지만 길이 열리는 계기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제작환경 개선은 드라마계의 오랜 문제기에 장기간에 걸쳐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드라마 제작 환경에 그동안 많은 사고가 있었고, 그 이전에 더 많은 착취에 가까운 노동이 있었을 것이다. 이젠 사람 이전에 콘텐츠를 세우는 일은 없어져야 할 때이다. 또한 근로기준법이 개정됐고 여러 사고로 인해 방송 제작 환경에 대한 논의가 어느때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이다. 대화하고 합의해나갈 수 있는 기회의 자리가 생긴 만큼 방송 산업계의 새로운 기준이 잡히고, 그 기준이 제작 현장에 실질적으로 적용되기를 기대해본다.

원문 : 한국교원대신문 426호 2019.04.01

http://news.knue.ac.kr/news/articleView.html?idxno=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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