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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주 Apr 07. 2024

국제적 쌈닭

쌈닭도 철학이 필요해

나는 대학생이 되어 첫여름방학을 맞았을 때 첨 드는 생각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나는 이제 어른이야.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어"라는 말이 머릿속에 울렸고 나는 가족의 허락을 묻지도 않고 혼자 여행을 계획했었다. 처음으로 간 곳이 광주 - 순천 - 해남 - 강진 - 소록도 - 여수 - 통영 - 남해대교까지 기차도 타고 버스도 타고 배도 타고 걸어 걸어서 열흘 넘게 혼자 돌아다녔다. 대학생이 된 자축기념을 거나하게 치웠던 것이 지금까지 머릿속에 가장 좋은 추억 중에 하나로 새겨져 있다. 그 후 나는 끊임없이 여행을 했다. 그래서 나는 자타공인 젊은이들의 유럽 백팩여행의 선구자였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부터 유럽 전역을 기차로 30일 패스를 사서 돌아다녔다. 숙소는 유스호스텔을 찾았지만 더 많은 날들은 기차에서 잤다. 특별히 갈 곳도 공부를 해 놓은 곳도 없이 그냥 기차역에서 스케줄을 보고 들어봤던 곳을 무작정 간 것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마음에 남는 곳은 이탈리아의 폼페이와 베네치아, 오스트리아의 알프스,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으로 지중해를 가르며 가던 여객선등을 들 수 있다. 처음 유럽에 도착을 했을 때 한참 감수성도 크고 자아상을 확립하는  시기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넓은 세상을 숨 쉬고 느껴보는 기회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가장 강하게 느꼈었다. 


이제는 특수교육을 전공한 사람으로 장애인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각 나라를 가서 그 나라에 맞는 장애인 프로그램에 대한 잇슈를 이야기를 하고 또 이제는 내가 직접 휠체어를 타고 각 나라 여행지에서 장애인의 삶을 살아보고 있다. 휠체어를 타게 되고 지적장애나 행동장애로 혼자 여행을 할 수 없는 경우에는 많이 "안된다"는 장벽을 마주하게 된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장벽들이 눈앞에 닥치자 매번 따지고 설득하고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사고가 나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달래기도 하면서 싸우는 내 모습 속에서 양 날개를 펴 홰를 치는 국제적 쌈닭의 모습이 보인다. 세 가지 해결책이 있다. 첫째는 장애가 있는 "내 탓"으로 포기하고 돌아서고 만다. 둘째는 내 탓이기는 하지만 막아서는 "네 탓"인 것 같기도 하다고 느끼며 돌아서는 경우가 있다. 셋째는 내 탓 네 탓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 것이다. 주장을 해도 결과는 장벽을 뚫는 경우도 있고 결국은 장벽에 막히기도 한다. 그래도 세 번째 해결방법을 계속 지속해야 하는 것은 그래도 내가 "변화"를 주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사의 눈으로 이런저런 설명을 해보려는 시도만 하는 쌈닭인 나는 닭대가리의 한계를 넘어서서 사회는 왜 장벽을 만드나, 그런 장벽을 왜 부셔야 한다고 주장을 해야 하는지를 좀 더 철학적이고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기초로 무장해서 힘을 싣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생각을 좀 하려니 질문 외에도 이상하게 생각되는 점도 있다. 십여 년 전에도 휠체어를 타고 칠레를 간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나도 휠체어의 편리함을 이용하는 사람이었기에 장애인의 입장이 아니었고 그때는 별 제한하는 것을 느끼지 못했었다. 신나게 설명을 해 대던 특히 축구광이라며 위트 있게 설명을 하던 관광안내인은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기 때문이다. 그냥 여행사에 휠체어를 타고 들어가 시내관광을 택해 돌아다니기도 했고 칠레 국내선 비행기로 남쪽으로 내려가 항구도시를 가서 해변가의 식당들을 다닐 때도 불편함이 없었다. 다른 여행상품을 구입해 관광버스로 돌아다닐 때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왜일까? 바로 며칠 전 다녀온 아르헨티나 여행에서는 거의 모든 관관상품에서 휠체어는 갈 수 없다는 장벽이 있었다. 이 글을 쓰며 갑자기 더 대비되어 이상함을 느낀다. 왜지? 오히려 장애인 차별이 뒷걸음질을 친 것일까? 글쎄 예전보다 더 많은 장애인들이 여행을 하게 되면서 여행사와의 마찰도 증가했을 테고, 여행사가 세운 정책도 없이 장애인의 불편함을 도와야 하는 부담감이 관광 안내인에게 전가되기도 했겠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얄팍한 시장경제도 한 역할을 할 테고, 개인중심적 생각이 이타심을 줄였을 수도 있을 테고 이러저러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텐데 좀 더 역사적 관점에서 사회적 관점에서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나는 이태원 참사직후 빛의 속도로 조문대를 만들고 5일간 국가애도기간을 정해 많은 사람들이 발 빠르게 조문을 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 화면 속에 장면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너무도 괴이한 생각이 들었다. 흰색과 노란색의 국화로 한 면 전체를 장식한 단이 있고 그 앞에 향로가 가운데 놓여있는 검은 천으로 덮인 긴 제대가 있다. 사람들은 국화꽃 한 송이를 그 제대위에 올린 후에 고개를 숙이고 잠시 고인들을 조문하는 아주 평범한 조문대 모습인데 왜 나는 뭔가 너무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꼼꼼히 살펴보니 그 조문대에는 사진이나 위패가 없었다. 그 두 가지는 조문대의 기본요소인데 왜 없지? 얼굴이 담기 사진 속의 그 사람은 조문하는 우리들에게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건네고 우리가 기억하기 바라는 것이나 부탁을 전달하는 특별한 시간을 만들며 이 세상에서 함께 했던 시간에 감사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게 해 준다. 아무것도 없이 국화꽃으로만 장식된 조문대와 그 앞에 서있는 사람들을 보며 마치 그들은 줄기가 꺾여 며칠 만의 삶만이 허락된 국화꽃의 비애를 조문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일까? 답을 내야 하는 측도 죽임의 원인을 알려달라는 가족들의 울부짖음만이 부딪칠 뿐 누가 왜 그런 괴이한 조문대를 만들었을까 하는 "사고과정"에 대한 나의 질문은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유튜브에서 우연히 한 철학교수의 설명을 들었다.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 (1906-1995)의 "타자의 논리학"을 이야기하며 얼굴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나의 질문에 심오한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레비나스의 타자에 대한 개념을 찾아 읽었다. 타자의 논리학은 사람들은 서로 같은 수준의 이성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에 나와 상대방(타자)의 상호작용에 중점을 둔다. 유태인으로 가족의 학살을 경험한 그는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하던 상황은 "타자 배제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이라고 말하며 타자를 없애려고 하는 행동은 나 자신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것과 그 존재를 유지하는 것에 가장 큰 가치를 둘 때 생기는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레비나스의 철학에서 "나"의 개념은 윤리적이고 책임감 있는 주체로 발전되며 타자의 도움을 환대하고 타자와 열린 마음으로 상호작용을 할 때 진정한 주체인 "나"가 된다고 본다. 


타자와 나와의 상호관계에서 진정한 윤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얼굴"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바로 타자의 어려움에 처한 얼굴을 볼 때 "나"는 거부할 수 없는 의무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타자의 얼굴을 "제거"하고 나서야 마음에 부담감 없이 타자에 대한 폭력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영정사진도 위패도 없는 조문대를 만들게 된다는 이론적 설명이 된다. 아! 자신의 존재는 중요하고 그 중요한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타자를 제거하는 전쟁을 해야 하는데 희생된 젊은이의 "얼굴"을 보면 인간관계의 거부할 수 없는 의무감이 다가오기 때문에 "얼굴"을 제거해야만 원하는 대로 "폭력"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인 것이다. 와우! 이해완료! 근데 그분들이 이렇게 심오한 철학을 알까? 아니지! 몰라도 중요한 자신을 유지(Yuji??? 어디서 들어본...) 하기 위한 인간의 말초적이고 본능적인 행동이 표현된 것이었고 레비니스는 타자의 논리학이라는 이론으로 승화시켜 인간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그러한 행동의 근본적 원인을 설명한 사람인 것이다.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의 행동을 이렇게 확실한 설명으로 이해를 하게 되니 오랜만에 너무도 속이 후련하다. 특수교육을 포함한 일반교육 전체가 응용학문으로 눈에 보이는 실용적인 문제를 설명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면 기초 학문인 철학은 그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는 행동에 대한 명분과 당위성을 부여하며,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전략을 구상할 수도 있고, 또 우리 자신을 뒤돌아 볼 수 있게 하는 꼭 필요한 학문인 것이다. 이제야 왜 영어로 박사학위를 기술할 때 "철학박사"로 하는지 이해가 된다. 실질적인 교육과 행정을 하는 "교육학 박사"라고 기술하는 박사도 있고 나는 철학을 전공하지도 안았는데 왜 "철학박사"라고 쓰여있을까? 모든 현대학문의 시작이 철학으로 시작되었고 그 철학에서 각 분야의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넣어 전공이 세분화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예를 들어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기본학문인 철학에 세밀한 측정을 요구하는 물리학이 합쳐져서 인간의 행동과 심리를 이해하고 측정하는 학문인 심리학이 되었다는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쌈닭이 충분한 철학적 기본 설명도 탑재할 수 있도록 "열공 철학!"은 퇴직 후 내가 할 일의 목록에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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