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비하와 장애인 간의 비하발언에도 노해야 한다
"ㅂㅅ"을 보면서 처음에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 왜 쟝애인 단체에서 장애인 비하발언이라며 성토를 하는지 궁금했다. "병신"의 첫 글자만을 따서 하는 표현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나도 어렸을 때는 "병신"이라는 말이 나를 뜻하는 것 같아서 그 소리만 들어도 얼굴이 붉어지곤 했었다. 나는 신학을 공부한 덕분에 가끔 교회에서 메시지를 전할 기회가 있는데 가끔 "함께 생각해 봅시다"라는 이야기를 할 때 장애의 구분과 장애에 따라 교육적 욕구가 다르다는 점을 소개하곤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성경 속에 나열되어 있는 장애인을 지칭하는 단어를 보며 "병신"과 "장애인"이 다른 상태를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다는 사실을 읽고는 장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농담반 진담반으로 설교에 사용을 한다.
성경에 장애인의 구분을 나열하고 있는 구절을 자세히 읽어보면 "저는 자" "못 보는 자" "병든 자"등등과 함께 "병신"이라는 단어가 따로 열거되어 있다 (누가복음 14:13, 개역한글). 나는 늘 절름발이라는 놀림을 받아본 경험이 있어서 눈에 확 들어오는 "저는 자"라는 성경구절을 보면서 나와 같은 지체장애를 가진 사람을 뜻하는 것이라는 이해가 바로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다음에 눈에 들어오는 "병신"이라는 단어가 장애의 한 종류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닌가? 뭐지? 나는 어렸을 적에 "병신" "찐다" "절름발이"등 많은 단어로 나를 지칭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같은 의미라고 생각했는데 성경에는 따로 분류되어 있는 것이다. 한글성경에 확실하고 똑똑하게 "저는 자"와 "병신"이 분리가 되어있는 것이다. 나는 저는 자이지 병신이 아니었던 것인가? 그럼 "병신"은 누굴까?
의문이 고개를 들었고 나는 많은 시간을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봤다. 과연 그들은 누구일까? 왜 성경에 장애인과 병신이 따로 구분되어 나열되어 있을까? 그러다가 어느 날 "유레카!" 깨달음이 왔다. 그다음부터 나는 교회에서 장애 관련 강의를 할 때마다 자신 있게 설명을 한다. 청중에게 각각 짝을 지어 옆에 사람을 바라보게 하고 "병신~ 그 차이도 모르냐?"하고 말해보라고 한다. 사람들이 깔깔대고 자지러진다. 그래서 나는 성경에 쓰인 장애를 구분해 적어 놓은 "저는 자" "못 보는 자" "병든 자"등의 명칭은 실질적으로 그런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을 의미하고 "병신"은 바로 뭔가 제대로 이해도 잘 못하고 문제해결을 못하는 비장애인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나의 깨달음을 나누며 설명한다.
농담처럼 진담처럼 그렇게 설명을 하지만 진짜 왜일까? 병신이라는 단어를 왜 구분해 썼으며 그의 진정한 뜻은 무엇일까 하는 고민은 계속되었다. 드디어 임환영의 "아리랑 역사와 한국어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병신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찾게 되었다. 그는 한국어와 한자어의 조상에 해당하는 르완다어에서 단어의 근원을 설명한다. "병"은 르완다어의 ubwenga에서 유래한 것으로 지혜나 똑똑함을 의미하고 "신"은 Shinze에 유래한 것으로 "말뚝 박다"라는 의미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즉 병신이라는 단어는 "지혜에 말뚝이 박힌 것"을 의미한다고 그 어원을 통해 뜻을 설명한다. 즉 한자어의 몸에 병이 들었다는 "병신(病身)"과 발음은 같지만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한자어의 "병든 신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두뇌가 고지식한 사람"을 의미한다. 바로 내가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비장애인을 "병신"이라고 부르는 어원의 의미가 바로 고지식하고 똑똑하게 문제해결을 못하는 모든 사람을 일컫는 말인 것이다 (출처: 병신의 어원).
내가 특수학교 교사로 취업을 했던 곳은 병원과 학교, 직업훈련소, 기숙사까지 모두 갖추고 있던 종합 재활원이었다. 그 당시 최고의 규모뿐만 아니라 시설면이나 서비스 등 모든 면에서 자타공인 한국 최고의 재활원이었다. 그러다 보니 많은 견학생, 실습생, 그리고 외부인사들이 드나들었다. 한 번은 병원이 있는 본관에 들어서는데 한 휠체어를 탄 건장한 체구의 남성이 나를 불러 세우며 "너 여기서 언제부터 일했냐?"라고 반말로 물었다. 난감함을 감추지 못하면서 일한 지 얼마 안 됐지만 무슨 일이고 누구인지를 물어봤다. 그는 "나는 병신들의 왕이야. 여기서 일하려면 나에게 알려야 해"라고 했다. 나도 밉상이기는 했다. 나는 병신이 아니니까 너에게 알릴 필요도 없었지만 누가 당신을 왕으로 정했는지 모르니 당신의 병신백성에게 가보라고 했다.
나중에 알았다. 그는 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 사건 때 사고를 입어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던 진짜 훌륭한 군인 장교였다. 더구나 많은 상해군인들이 재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그는 병원에서도 군인정신으로 이겨내라고 환우들을 격려했고 그중 어느 누구보다도 재활에 성공해 목사님이 된 사람이었다. 그는 비장애인으로 장애를 경험하게 된 중도장애인으로 재활에 성공하여 스스로 훌륭한 사람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장애를 극복한 그는 정말로 훌륭하다. 그런데 자기 기준으로 봐서 자기처럼 극복하지 못해 보이는 장애인들을 보면 어느 누구보다 비판적이고 스스로 재활해야 한다고 다그치는 사람이었다. 자신은 극복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그 잣대로 다른 사람들은 장애를 극복하지 못한 인간이라며 비하하는 행동은 조금 지양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나중에 조용히 전할 기회가 있었다.
한 번은 예쁘장하고 고상해 보이는 여자 장애인과 마주쳤다. 어려서부터 소아마비로 장애가 된 분이니 나와 비슷한 상황인데 그분은 50대쯤으로 어느 누구보다도 훌륭한 의사였고 우리나라 최고의 장애인 복지시설 중의 한 시설의 원장이었다. 그분도 역시 나를 만나자마자 "너는 뭐 하니?"하고 갓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였던 나에게 반말로 질문을 했다. 나는 답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관습이 나이 든 사람이 어린 사람에게 반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직장에서 성인대 성인으로 처음 만날 때는 존댓말을 쓰는 게 그 사람의 인격인 것이다. 박사과정 중에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열린 콘퍼런스에 온 한국팀과 합류했을 때 그 사람을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그와 대화하지 않았다. 나름 "성공한" 장애인들이 다른 장애인을 무조건 더 비하하고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인격을 경멸하기 때문이었다.
장애가 있건 없건 세상의 성공잣대가 인간의 높고 낮음을 정하는 척도가 될 수 없다. 나는 그냥 누군가가 누구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를 믿지 않는다. 치료를 하는 사람은 성심껏 치료만 하면 되고, 교사는 부족한 것을 알려주는 일에만 열중하면 되고, 자립을 준비하는 준비생인 경우 자신의 훈련에만 집중을 하면 된다. 사회 속에서 각자 다른 몫을 감당하는 것이고 서로 다른 인생을 꾸려 나가는 것이라 누가 누구보다 높고 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장애인이 다른 장애인을 비하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특히 다른 장애인들이 자기보다 심한 상태의 장애인이나 지적장애인을 비하하는 것은 더욱 참을 수가 없다. 지적장애인들이 스스로 지켜나갈 수 있게 자기결정능력과 자기주장능력을 갖추도록 교육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겸손 겸양 스스로를 낮추는 자세는 우리나라의 좋은 관습 중에 하나이다. 그 개념과는 달리 스스로 자신을 필요이상으로 남보다 못하다고 말하거나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표현하는 "비하"는 우리나라 관습에서 말하는 겸손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장애인들의 스스로를 비하하는 말을 들을 때 마음이 아프다. 위에서 서술했듯이 "병신"의 원래의 뜻이 고지식하고 문제해결능력이 부족한 모든 일반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누구든 이 단어를 선택을 할 때는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아무리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듣는 사람이 싫어한다면 사용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 하지만 장애인들도 장애인을 눈앞에 대놓고 "병신"이라고 칭하는 것이 아니라 비장애인이나 대중적인 어리석은 행동을 지칭해 병신이라고 표현한 경우에는 일일이 장애인 비하라고 화를 내기보다는 일반적 용어임을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넉넉함이 있으면 좋겠다.
표지에 사용한 사진은 우리 대학을 방문해 주셨던 이상묵 교수와 찍은 사진입니다. 이상묵박사는 한국의 스티븐 호킹 박사라고 일컬어지는 해양지구물리학자로서 서울대학교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