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영화 속 주인공이 되다.
우리 학과에 남편과 이혼을 하고 염세적인 생각으로 세상을 향한 모든 생각이 부정적인 교수가 있었다. 다행히 영어도 제대로 못하고 아시아 소수민족인 나를 향한 생각이 가여웠던지 나에게 우호적이었다.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생각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 교수의 똑똑함과 현실감 있는 생각과 솔직한 대화법을 좋아했다.
우린 한 달에 한번 정도 학교밖에서 만나 영화를 봤고 영화에 대한 비평 겸 뒤풀이로 저녁을 같이 하곤 했었다. 그가 "메멘토"라는 영화를 보자고 했다. 나는 평소처럼 제목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도 그냥 그를 따라나섰다. 영화에 대한 아무 기대가 없었지만 영화는 생각보다 무척 재미있었다.
그 똑똑한 교수가 영화를 보고 나와 재미있던 결말을 되새기며 싱글벙글 대는 나가 놀라웠는지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똑똑한 여자가 영어도 잘 못해 못 알아들을 것 같은 나에게 영화의 내용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었다. 특히 끝장면이 이해가 안 된다며 나의 대답을 애처롭게 기다렸다. 나는 "이해하려 하지 말고 주인공의 머릿속을 그냥 경험해 보면 된다"라고 했다.
메멘토(Memento)는 라틴어로 "기억의 증표"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영화는 전설이라 불리는 크니스토퍼 놀런이 감독한 영화로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실존의 사람을 모티브로 만들었다. 주인공은 10분 전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극복해 가며 아내를 살해한 범인을 잡으러 범죄와 자신의 어려운 조건과 싸우는 스토리이다.
기억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몸에 새겨진 타투와 남들이 보여주는 사진을 가지고 범인을 잡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하는 장면들은 관객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기까지 한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는 주변에 일어났던 일과 기억상실증으로 모든 게 다 얽히고설켜 뭐가 뭔지 모르는 주인공의 상황을 표현함으로써 관객들도 복잡한 줄거리의 전개를 이해할 수 없고 정신이 없다.
중간쯤부터 주인공이 사건의 시간을 거꾸로 짚어가며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관객들도 "아! 이렇게 된 거구나" 하며 문제의 맥락을 짚어가며 영화의 스토리가 조금씩 이해가 되면서 범인을 추적해 가는 장면들로 점점 흥미진진해진다. 시간이 흐르며 손에 땀을 쥐고 주인공이 기억상실증을 극복해서 범인을 꼭 잡도록 응원하며 우리에게 뚜렷해진 영화에 몰입하게 된다.
뭔가 이해가 잘 되어 가는 듯하다가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여태 진행되었던 것을 잊고 처음으로의 엉망인 상태로 돌아감으로써 관객에게 주인공의 뒤죽박죽인 머릿속으로 들어가 기억상실증을 가진 사람을 경험하게 하는 것으로 영화가 끝이 난다. 영화가 일반적으로 설정된 이야기를 제삼자의 입장에서 관람하는 것인데 이 영화는 직접 주인공을 경험해 보게 하는 독특한 설정 때문에 훌륭한 작품으로 기억된다.
10주 동안 서울에 있으며 처음 몇 주 동안에는 사람들이 찾아와 주고 가야 할 곳을 데려다주었다. 체류시간이 길어지자 뭔가 혼자 해보고 싶은 마음의 충동이 생겼다. 막상 혼자 돌아다니려니 자신감도 없고 생각만으로도 피곤했다. 하지만 스스로를 달래고 격려하며 지하철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리둥절 막막함 긴장감등 오랜만에 내 안의 나약함을 마주했다.
몇 번 지하철, 어느 방향, 환승역등을 수십 번씩 외워봐도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면 멘붕이다. 승차구를 찾는 것부터 카드를 찍는 것과 엘리베이터를 찾는 것 모두 두리번대며 하나하나 익혀나가야 했다. 그 넓고 복잡한 곳에서 습관처럼 자기의 길만 다닐 사람들에게 내 갈길을 묻는다는 것도 무리라는 것을 급히 깨닫고는 혼자 벽에 붙어있는 안내문에 의지했다.
메멘토의 주인공 머릿속처럼 지하철 역사 속에서의 내 머릿속은 온통 얽혀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고 독립적으로 다니는 것이 즐거웠다. 드디어는 현지인으로 보였는지 나에게 질문하는 사람들도 생겼고 나는 자신감 있게 모른다고 답을 하기도 했다. 몰라서 죄송하다고까지 꼼꼼히 챙겼다.
부평역에서는 요리조리 가서 5번이나 12번 출구로 나가면 되고 우연히 내린 을지로입구역을 빠져나오니 바로 목표한 건물이 코 앞이었던 행운도 따랐다. 종로3가역으로 가면 지하상가에 병원도 있고 너무 크고 미로처럼 복잡한 고속버스터미널역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는 것도 습득 완료했다. 남에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자립적으로 산다는 것은 역시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친구가 멋진 호텔 아침뷔페를 사준다고 해서 인천공항 근처까지 지하철을 세 번이나 갈아타면서 갔다. 인천 달빛공원도 가고 청평과 수원 민속촌도 갔다. 경복궁과 종묘, 리움 미술관, 인사동의 그림전시도 뿌르르 하고 달려갔다. 다음에 오면 유성과 대전에도 가고 에버랜드에도 가겠다는 목표도 자신감도 꽉 잡을 수 있었다.
지하철을 배우고는 한 달 정도를 서울이 좁다고 매일 돌아다녔다. 이제 이런 재미를 뒤로 하고 미국으로 돌아갈 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어? 그런데 이상하다. 갑자기 지하철 노선이 머릿속에서 엉켜버린 것이다. 가장 먼저 득도한 부평역 지하상가가 처음 보는 가게들로 가득하다. 백화점이다. 빠져나가는 길을 몰라 헤매자 누군가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수호천사!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환승역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려도 봐도 타려고 한 지하철 승차장을 찾을 수 없었다. 내렸던 곳으로 돌아와 다음 열차를 다시 타고 다른 환승역으로 갔다. 종로3가역! 내가 좋아하던 역인데도 또 생소하다. 한참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환승을 하고 매일 내리던 양재역에서 내렸다. 늘 보던 3번선과 신분당선의 위치가 바뀐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이리저리 헤매다 지상으로 나왔는데 매일같이 나오던 출구가 아니다. 메멘토의 주인공이 갑자기 떠올랐다. 몇 주 동안 갈길이 확실해졌고 머릿속에 분명한 지도가 만들어졌건만 방문이 끝날 때가 되니 모든 자료들이 헝클어져 버린 것이다. 메멘토를 볼 때 살아봤던 주인공이 다시 되어 버린 것이다. 재미있다! 그 주인공처럼 나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다.
한국의 지하철은 진짜 최고… 경험을 해보니 너무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