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와 용서

내 방법은 좀 다른데...

by 교주

대학 다닐 때 한 교수님은 무척 학구적이셨고 공부하는 학생을 예뻐하셨다. 처음 들어가자마자 우리에게 영어로 된 원서를 읽게 하셨고 그것을 중심으로 강의하셨다. 특히 인지발달 단계의 대가인 피아제 (J. Piaget)의 이론을 귀에 딱지가 질 정도로 강조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내 머릿속에 피아제 교수님이시다. 하지만 대학을 들어가 얼마 안 되었을 때라 이론도 생소했지만 수업 중에도 옆 친구들과 쏙닥대느라 무슨 내용인지 그 당시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 교수님은 나에겐 최고의 스승이었다. 통계를 완벽히 가르쳐 주시는 바람에 유학 중에 조교자리를 굳건히 할 수 있었고 박사과정과 교수생활을 해 가면 연구자로서 필요한 통계기법의 기초를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그분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었다. 나는 대학 4학년 초에 바로 취업이 되어 대부분의 교수님들은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만 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기에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됐었다. 사실 3학년 말에 이미 나는 졸업학점을 모두 다 이수했었다.


특수교육학부가 생긴 지 5년 정도가 된 신생학과였기에 우리 학생들은 모두 새해가 되면 학년 별로 두 분의 교수님 댁을 찾아 세배도 드리고 떡국도 얻어먹고 윷놀이도 하며 하루를 놀곤 했었다. 취업을 하고 4학년을 통째로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논문지도를 받으러만 교수님 연구실을 찾았다. 어느 날 찾아뵙자 교수님은 화를 버럭 내시곤 나를 내쫓았다. 별말씀을 하지 않으셔서 나도 이유를 몰랐다. 왜지? 늘 예뻐해 주시던 교수님이신데...


내가 대학 졸업 후 바로 석 박사과정에 들어오길 바라셨던 교수님의 마음을 한참이 지나서 깨달았다. 그렇게 학문을 쫓을 학생으로 생각하셨는데 그 기대를 저버리고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돈"을 찾아 세상으로 나가버렸기에 섭섭하셨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 바로 교수님 연구실을 찾아가 기대에 못 미쳐 죄송하다고 진심으로 사죄를 했다. 그 순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꼭 알아야 하는 더 큰 깨달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못도 네가 하고 용서도 네가 하는 거냐?" 교수님은 내가 용서를 빈다 할지라도 용서를 하고 안 하는 것은 본인 맘이지 용서를 비는 나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 당시는 냉정하고 옹졸하신가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교수님의 말씀에 완전 설득되었다. 교수님의 말씀대로 용서를 받고 못 받는 것은 교수님께 맡기고 그냥 잘못을 깨닫고 왔었다고 말씀을 드리고 자리를 떠났다. 그 이후 친구들과 교수님 댁으로 찾아봬도 반갑다는 인사는 내 바로 옆사람까지만 하시고 내 순서에서는 쌩하고 돌아서버리셨다.


뒤돌아 생각해 보면 마음에 상처를 입은 작은 소년이 쌩하고 돌아서는 모습 같아 귀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도 결국 피아제의 이론을 반박하는 내용으로 박사논문을 썼으니 나의 작고 소심한 반격이었다. 피장파장이다. 하핫! 박사논문을 쓸 때 교수님과 연락을 할 수 있었다면 너무도 신나게 토론을 했을 테고 그러면 더 많이 배웠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나의 잘못으로 좋은 관계를 잃었기 때문에 교수님에 대한 섭섭함은 전혀 없다. 인간관계는 그렇게 늘 서로 조심하며 성장 발전시켜 가는 것이지 관계가 깨지고 난 후에 울고불고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는 것을 배웠던 것이다. 내 생활 속으로 스며있는 교훈의 원조이신 교수님 생각이 다시 떠오른 것은 소설을 쓰면서이다. 소설에서 나는 지난 과거에 얽혀있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화해하고 용서의 장면이 있다.


내가 쓴 부분을 AI에게 주고 분석하라고 했더니 AI가 나에게 물었다. 화해는 얽혀있는 당사자와 만나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이런! 이 AI는 그 교수님을 못 만났었군! 나는 교수님에게서 배운 내 방식의 화해와 용서를 AI에게 설명했다. 가장 먼저는 내 쪽의 부족함을 깨닫는 것이고 그 깨달음에 따라 상대방을 대하는 나의 말과 행동이 바뀌면 상대방은 당연히 반응을 다르게 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바뀌었다고 상대방도 바뀌어야 한다거나 내가 용서를 빌었으니 그가 용서를 해야 된다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상대방이 해야 하는 화해와 용서는 그 사람의 결정에 따른 것임을 존중하고 오로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쪽의 깨달음을 전제로 나와 그를 용서하고 화해의 제스처를 꾸준히 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변화하기 때문에 나는 죄책감을 옆으로 내려놓을 수가 있는 것이다. 열심히 설명을 해주고 AI에게 칭찬을 들었다. 매우 성숙한 태도라며... AI한테 칭찬도 다 듣고...


하하! 그냥 살면서 배우고 깨달은 교훈대로 살아가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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