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 늦은 <기생충> 일지
모든 리뷰에는 스포가 있습니다.
벌써 영화를 본 지 한 달도 더 되어가고 관심도 사그러가고 있지만, 시간이 더 지나가기 전에 <기생충>에 대해 쓴다.
칸 영화제를 수상하였다는 말을 듣고, 봉준호의 영화이기에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시험기간의 압박이 다가오기 전에 개봉날 친구와 보러 갔다. 친구와 나와서 영화를 복기해보면서 했던 첫 말이 바로 지하철 냄새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냄새가 주는 강렬함이 이 나뿐만 아니라 다른 관객들에게도 꽤나 강렬하게 다가온 듯싶다. 작품 속에서 인물들이 아무리 겉을 치장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들의 냄새이고 그것이 무계획적인 사건의 시작이 되기도 하니까.
사람들과 나누면서 들은 후기들은 참 다양했다. 앞서 말한 친구는 너무 슬픈 한국의 현실적인 드라마라면서 극찬하였다. 자본이 없는 하층민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기생충에서 더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다른 친구는, 아마 몇 안 되는 부정적인 의견을 보태주었는데 그것은 하위 계급을 희화화하여 문제의 본질이 흐려진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백번 잘해주어도 한 번 기분을 나쁘게 하면 잘해준 걸 싹 다 잊고 척을 지는 꼴이 참 우습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고 나서 느끼는 찝찝하고 불편한 마음은 누구나 같았던 것 같다.
이제 개인적인 의견을 말해보자면, 기생충은 잘 만든 영화가 맞다. 내용적인 면을 차치하고서라도 인물들 간의 유기적인 연결과 극의 흐름이 조화롭게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서사가 진행되면서 관객이 파악해야 하는 인물들은 열 명 가량 되는데, 이때 잉여로운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크게 세 부류, 기택 송강호와 그의 기생충 가족들, 박사장 이선균과 숙주 집안, 또 다른 기생충(이었던) 지하실 부부로 나뉠 수 있는데, 신(Scene) 별로 벌어지는 사건과 에피소드들에서 위 세 부류 인물들이 소외되지 않는다. 대강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기우(최우식)가 과외를 맡고부터 기정(박소담)과 기택(송강호)은 박사장 집에 취직하며 관계를 맺지만, 문광(이정은)이 가싯거리이다.
기우와 기정은 문광을 내칠 계획을 세우고, 기택은 연교(조여정)에게 어필하며 승인받는다.
지하실에서 두 기생충 가족이 박사장의 집에서 격돌하고, 폭우로 박사장 가족이 돌아오자 둘의 싸움이 끝을 맺는다.
생일파티에서 세 부류 인물들이 쌓아온 각자의 사정이 분출되며 절정에 이른다.
인물 구조의 치밀함이 칸 영화제 수상에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된다. 후보군에 오른 다른 작품들을 모두 본 것은 아니지만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의 중요도는 모두 비슷하였고, 내러티브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전제하에 <기생충>이 차별화된 점은 오밀조밀한 구성이라고 보인다.
과연 냄새가 문제인가?
모든 사람들이 냄새를 이야기한다. 정말 지겹도록. 냄새를 통해서 구분되는 계층 간의 관계가 시각화되어 표출되는 불편함을 말한다.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사는 기택의 가족들은 자본의 구조 속에서 결국 소외될 수밖에 없다면서. 동시에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박사장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지하실의 인물에게 '리스펙' 받고, 연교는 '심플'한 면모를 보여주지만 이는 다 '돈'이 있기 때문이리라. 박사장이 강조하는 '선'은 빈대가 더 높이 뛰지 못하도록 가둬두는 사회적인 유리천장을 은유적으로 빗대고 있다는 듯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선을 넘는 것은 바뀌지 않는 냄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냄새는 우리의 것이다. 인간은 모두 씻지 않은 냄새가 난다. 지하철의 냄새, 그것은 반지하에서만 사는 기택 가족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지하철에서도 여러 냄새가 공존한다. 너무 익숙해져서 이제는 무감각해진 지하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들, 사람들에 부대껴 나는 땀냄새, 밤만 되면 술 취한 냄새로 진동하는 전동칸. 냄새는 하나로 수렴할 수 없다. 또한 선에 집착하는 박사장과 같은 삶도 돈이 있어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의 선을 갖는다. 선을 넘는 인간을 만난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화를 표출하거나, 만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더 이상 보기를 거부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사고가 자본주의라는 맥락에서만 해석되도록 한다.
사회의 단면에 대한 은유로 이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 반지하와 지하실의 가족으로 이미지가 너무나 고정되어 있는 것이 문제이다. 작품의 주제가 위와 같다면 일반 주택, 아파트 작은 평수에 사는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영화 이후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인데, 관객들은 기택의 삶, 반지하와 지하실에서 영위하는 삶들을 주변화하게된다. 자신들의 삶과 연결 지어 생각하지 못하고 남일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스크린을 통해서 전시된 인물들의 삶을 공감하면서도 그것은 일상의 삶이 아니라고 생각되도록 구분 짓게 되었다. 사람들은 교훈을 얻는 법만 배워가며 정작 치열한 고민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문제이다.
한편 실제로 반지하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먹고살기 위해 하는 노력이 우습게 비칠 수 있다는 점에서 봉준호가 대변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피자 박스를 접는 일도 누군가에게는 진지한 생계가 될 수도 있고, 월급이 적어도 아끼면서 부지런히 그들 나름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고단하다'거나, '무계획'이라거나 하는 프레임이 씌워진다는 것이다. 전교 1등에게 멍청하다고 하면 아무 타격도 없지만, 성적이 잘 안 나오는 학생에게 같은 말을 했을 때는 엄청난 모욕이 되듯이 말이다. 더구나 그렇게 표현하는 기준이 성적이 되었을 때 또 다른 재능(옷, 미용이나 전문 기술들)은 고려되지 않듯이, 그들에게는 '자본'이 그들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획일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자본주의 구조를 비판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도리어 자본에 따른 아키타입, 전형을 형성하고 있다.
영화를 재미있게 보기는 하였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부분은 기택이 살인을 저지르고 밖으로 나왔을 때, 스스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았다고 나직하게 내레이션 하던 부분이었다. 다시는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장 안전한 지하로 들어가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의 아이러니란. 다만 우리가 아이러니함 속에서 구조적 문제를 읽어냈다고 한다면, 그저 한 사람의 지하실 이야기로만 남겨두기에는 세상이 너무 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