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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수 Dec 29. 2020

연말정산#1 : 밀린 일기를 쓰는 마음으로

글을 쓰겠다는 연초의 다짐은 어김없이 또 무기력해졌다. 글은 뒤로하고 미친 듯이 이야기가 될 만한 것에 집착하면서 보낸 한 해였다. 일기를 쓸까라는 생각도 종종 스쳤지만 결국 또 쓰지 못했다.


나에게 일기를 쓰는 마음은 남들과는 조금 다르다. 나의 하루를 기록한다기보다는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를 미리 예행연습하는 것 같다. 그래서 한없이 사적인 영역이면서 동시에 타자의 영역인 것이다. 일기를 쓰다 보면 우습게도 언젠간 이 일기를 우연히 주워서 읽게 될 누군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럴 때면 일기인데도 불구하고 구린 걸 쓰면 안 되는데라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그런 맥락으로 언젠간 유서를 쓴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읽을 수 있는 문장으로만 구성된 글이었으면 한다. 어차피 남길 재산은 없을 테니 마지막으로 쓴 글이 덜 구리면 좋지 않을까. 유서도 하나의 이야기처럼 보였으면 좋겠다.


'제가 아는 사람들은 다 이야기를 필요하거든요'라는 말의 따듯함을 곱씹어보는 연말이다. 미친 듯이 글을 써야 한다고 채찍질했지만, 진짜로 찾으려 했던 것은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코로나로 흉흉했던 날들을 버티게 했던 동력이 사람들과의 대화였으니까. 그 대화를 그대로 글로 옮겼을 때 결국 이야기가 되니까. '글'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리고 퉁치기에는 이야기도 너무 중요하다.(물론 글도 소중하다.)


연말 정산이지만 새해 다짐 하나 끼워 넣자면,

20년의 다짐은 글을 쓰자였고 21년의 다짐은 이야기를 쓰자가 될 거다.


글을 쓴다는 것이 이기적이고, 또 이기적이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다시 읽게 되는 글들은 나를 생각하며 쓴 것보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쓴 글이었다. 그래서 내가 글을 쓰고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만나 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이야기를 쓸 때도 미안함보다는 감사함을 담으면 조금 더 좋아질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올 초 다정해지자라는 다짐도 있었던 것 같은데, 혼자 다정해지기란 사실 불가능일지도 모른다. 다정도 결국 사람들에게 배워가는 거였다. 안 괜찮은 일들 만큼이나 괜찮은 사람들이 많았다. 덕분에 연말에 글을 쓸 수 있는 에너지와 마음이 남아있을 수 있다.


꾸준히 글을 쓰지는 못했지만 틈틈이 메모를 해두었다. 몇몇은 이야기와 글이 되기도 했고 몇몇은 아직 메모로 남아있다. 정신없이 그냥 벌써 한 해가 끝나버린 것 같지만 쌓인 메모들을 읽으니 꽤 많은 일들이 있었다. 순간의 생각을 기록하는 거는 일기 대신 메모가 그 몫을 해주고 있었나 싶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메모들을 보다 보면 그것도 그것 나름으로 의미가 있기도 하다. 글자가 글이 될 때 그리고 글이 이야기가 될 때. 우리는 글 때문에 최소 두 번 정도는 설렐 수 있다고 믿는다.


이야기가 아직 되지 못한 올해 쓴 몇몇의 메모들을 남기며 첫 번째 연말 정산을 마친다.




1월 2월은 일기를 쓰고 3월 4월은 메모를 남기지 못함


5월

-어떤 관계는 멀지는 않지만 복잡스러워 두 번 환승해야 하는 지하철 같았다.


6월

-일 번 플랫폼에서 십 번 플랫폼을 지나기까지 나는 그동안 얼마나 무해했나.


7월

-예술이 노동이 된 사회에서 광대는 떼돈을 벌고


8월

-마음은 한 없이 작고 좁아지는데 방의 크기는 변함이 없었다.


9월

-꽉 찬 책장에서 책 한 권 꺼냈을 때, 비어진 공간으로 쓰윽 책들이 밀려 쓰러지는 소리 정도의 따듯함.


10월

-삶이 우울한 순간을 넘어 어느 순간 억울해졌을 때 미친 듯이 살고 싶어 졌다 그 억울함이 싫어서.


11월

-가을에는 소리가 없다. 눈을 감으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12월

-"사계절이 없었다면 글을 쓰지 못했을 거야"

-"세상엔 일 년 내내 겨울이고 일 년 내내 여름인 마을도 있다던데"

-"그 마을에서 시인이 탄생하는 날엔 아마 눈이 오거나 비가 내렸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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