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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두리로 읽는 아모스

정의와 공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

by 천생훈장

제가 참여하는 기독청년의료인회라는 모임 성서나눔에서 발제한 내용입니다.




들어가면서

제가 좋아하는 앤서니 드 멜로 신부님의 이야기 하나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요즘 제 마음이 딱 이렇거든요.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의 방문을 두드립니다.

"얘야, 일어나거라!"

"일어나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

아버지가 다시 소리칩니다.

"일어나, 학교 가야지."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아요."

"왜 싫어?"

"세 가지 이유 때문에요.

첫째 거긴 너무 시시하고,

둘째 아이들이 성가시고,

셋째 저는 학교가 싫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말씀하십니다.

"그래, 그럼 난 네가 왜 '반드시' 학교에 가야 하는지 세 가지 이유를 말해 주마.

첫째 그건 네 의무이고,

둘째 네 나이가 마흔다섯 살이고,

셋째 너는 그 학교의 교장이기 때문이다."

- 앤서디 드 멜로, 「깨어나십시오! 깨달음의 영성」, 분도출판사(1993)


1.

꽤 오랫동안 모임에 소홀했습니다. 물리적으로 시간이 나지 않는 건 아닌데 에너지를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아서 이 핑계 저 핑계로 그리되었네요. 죄송한 마음입니다.

학교의 책임을 맡으면서, 뜻하지 않게 힘에 겨운 상황을 겪으면서 스스로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됩니다. 허둥지둥, 우왕좌왕하면서 살고 있다는 걸요. 머리로는 좀 더 단호하고 침착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일들을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학생들도 좀 더 만나고 교수님들이나 관련된 분들과도 더 많이 이야기하고 설득해야 하지 않나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설득이나 노력이 더 큰 오해나 비난으로 돌아오는 걸 겪으면서 마음 한쪽에 쌓인 우울과 분노, 무기력이 잘 갈무리되지 않는 나날들입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올해 1월에 학장직을 마치고 평교수로 돌아와서 수도원 순례도 같이 다녀왔어야 하는 건데요. ‘간곡히 부탁’한다는 총장님의 요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다시 학장직을 이어가고 있는 탓입니다.

4월에는 학생들이 돌아오기를 기대했지만, 모두들 아시는 대로 그리 되지는 않았고, 과연 이 사태가 어떻게 수습이 될지, 수습이 된다 한들 그 후유증은 또 얼마나 오래 갈 지 잘 짐작이 되지 않습니다.

학교에 몸담은 지 25년째가 되었고, 그리 훌륭한 선생은 아니었어도 아이들이 싫은 적은 없었는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제 온갖 이유로 아이들이 미워지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을 방패삼아 자신의 욕심과 주장만을 늘어놓는 어른들도 역시 싫어지기는 마찬가지입니다만.

며칠에 한 번씩 헤른후트 묵상집을 펼쳐보는 것으로 겨우 겨우 연명하고 있습니다만, 역시 영적으로 고갈되어 있음을 모를 수는 없습니다. 일상의 기쁨과 감동들이 사라진 채 마른 걸레처럼 지내고 있으니까요. 뽀대나는 표현으로 하자면 ‘영혼의 어둔 밤’을 지나고 있다 하겠습니다만, 그런다고 마음이 나아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2.

넋두리가 길었습니다. 하필 이럴 때 아모스라니 참 당황스럽습니다만, 그것도 이유가 있겠지요. 앞서 발제하신 선생님들께서 아모스 선지서의 배경과 메시지에 대해서 잘 정리해 주셨습니다. 저도 chat GPT의 도움을 받아 이런저런 내용들을 찾아보면서 생각해 봅니다. 아모스서의 배경이 되는 시기인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의 통치는 40년 동안 지속되었고, 전체 왕국의 역사 중에서 사회경제적으로는 가장 부흥한 시기였다네요.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종교적으로 타락했고, 그 상황을 보다 못한 호세아, 아모스, 요나 같은 선지자들이 나타났다구요.

소선지서들이 잘 읽히지 않는 이유는 예언의 배경이 되는 시대적인 상황을 알기 어렵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인 배경과 당대의 사회적인 상황에 대한 구체적이고 면밀한 이해가 있어야만 오해 없이 이 메시지들을 이해하고, 그런 이해의 바탕 위에 우리 각자가 처한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상황에 대한 개별적인 의미들을 길어 올릴 수 있겠지요. 제 능력으로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으니, 주어진 본문에서 떠오르는 단상들을 듬성듬성 나누어 볼까 합니다.

첫 번째 드는 생각,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었을까입니다. 어릴 때는 성경의 이야기를 들으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짠하고 나타나시거나 번개가 치듯이 말씀을 뚝 떨어뜨려 주는 줄 알았지요. 사실은 지금도 성경의 말씀들이 그렇다고 생각하시는 기독교인들이 꽤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모스 선지자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들 들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새번역 1장 3절에서는 ‘나 주가 선고한다’라고 너무도 확실한 어조로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임을 선포하고 있는데 말이지요.

두 번째 드는 생각은, 그렇게 선포되고 기록된 이 말씀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져서 결국에는 성경이 되기까지 했을까라는 생각입니다.

신학적으로야 경전의 형성사나 공의회의 확정 과정 등을 논할 수 있겠지만 그런 학문적인 논의가 아니라 어떻게 이런 내용들이 수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사람들의 영혼을 울리는 메시지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셋째는 아모스서가 강조하는 정의와 공의에 대한 질문입니다. 5장 24절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개역개정)’,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새번역)’라는 구절은 아모스서 전체를 대표하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모스를 정의의 선지자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역시 chat GPT에게 물어보았더니, 이렇게 알려줍니다.


아모스서에서 말하는 “정의(미쉬파트, מִשְׁפָּט)”와 “공의(체다카, צְדָקָה)”는 단순히 "공정하게 재판하는 것"이나 "착하게 사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사회적 질서와 밀접한 개념입니다. 이 둘은 구약 전체에서 자주 짝을 이루며, 특히 아모스서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1) 정의 (미쉬파트): 질서와 공정한 심판

‘정의’는 옳고 그름을 바르게 판단하고, 약자에게 억울함이 없게 하는 공정한 재판과 사회 구조를 의미합니다. 아모스 시대에는 부자와 권력자가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며 가난한 자를 억압했습니다 (암 5:7, 5:12). 하나님은 이런 부정한 체제를 고발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2) 공의 (체다카): 관계적 올바름과 자비

‘공의’는 정의보다 더 관계적인 개념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사람 사이에도 의롭고 자비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법을 지키는 것을 넘어,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나그네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책임감이 포함됩니다.


통찰을 주는 chat GPT입니다. 그러니까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는 사회, 사람 사이에 의롭고 자비로운 관계가 이루어지는 사회가 아모스서 5장 24절이 요구하는 사회라는 거네요.

지난해에는 의료계와 의대생들이 요구하는 내용과 방법에 대해서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어느 정도 양해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정부가 오죽 무도했으면 전공의나 학생들이 저렇게까지나 할까’라는 마음이었달까요. 그런데 올해는 사회적인 여론도 그렇고 저도 생각이 좀 바뀐 것 같습니다. 정부가 무도하고 신의 없는 건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인데, 그걸 빌미로 이렇게까지 하는 건 너무 명분 없고 정의롭지 못하다는 마음이랄까요.

사태를 주도하는 강경파 학생들과 전공의들은 극단적이고 막무가내라 심하게 표현하자면 자해공갈단 같고, 학교로 돌아가고 싶지만 비난이 무서워 말하지 못하고 움츠려 있는 대다수의 학생들을 보면 측은하고 이해가 되기도 하면서 한편 ‘침묵하는 방관자’ 같아서 화가 나기도 합니다.


3.

정의와 공의는 머리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고 추구하는 일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학생들에게 화가 나면서도, 스스로 살아온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면 나 역시 그보다 더 정의롭거나 선량하게 산 것 같지도 않으니까요.

자신의 허물을 성찰하고 용납하면서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위해 허물 있는 사람들끼리 함께 연대해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 결국 길을 내는 일텐데, 그러려면 역시 기도와 수행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공명심에 눈이 멀어 기도와 수행을 내팽개치고 헉헉대면서도 공적인 역할을 놓지 못하고 있는 제 꼴도 참 우습기는 합니다만, 그 또한 제가 다 알 수 없는 뜻이 있으려니라고 위로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듯이 함께 노래할 때, 함께 기도할 때 잠시 멈추어서 다른 이들의 노래를 듣는 순간, 다른 이들의 기도에 기대는 순간도 있는 걸 테니까요. 마치겠습니다.



<함께 나누는 질문>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방법으로 알아듣고 있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어떤 방법으로 내 삶의 이야기가 됩니까?

정의와 공의는 내 삶에서, 우리 사회에서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함께 듣는 노래>

연휴 기간에 딸이 일하는 강릉을 다녀왔습니다. 오가는 차 안에서 바오로딸 수녀회 수녀님들의 노래를 주로 들었는데, 특히 이 노래가 위로가 되었습니다. 노래를 부르신 수녀님의 인터뷰도 유튜브에 있으니 나중에라도 한 번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주여 내려오소서

https://youtu.be/lLfpa5HBkuQ?si=yLswz4YE5Grgx3uK


노래를 부른 이장규 베로니카 수녀님 인터뷰

https://youtu.be/oIyQYrUVZJA?si=DHAOYhIKvry56-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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