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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죄입니까 - 질문이 잘못되면

2025. 12. 3. 수요예배 설교말씀

by 천생훈장



담임목사님의 출타로 대신한 수요예배 설교입니다. 몇 주전 묵상한 말씀 경험에서 주제를 가져왔고, 본문의 작성과 수정에는 여러 인공지능(챗지피티, 제미나이, 클로드)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누구의 죄입니까” – 질문이 잘못되면

본문: 요한복음 9장1절-12절

2025. 12. 3. 수요예배 설교


들어가면서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아는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치유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났는지 본문은 정확히 말해 주지 않지만, 실로암 연못의 위치를 보면 예루살렘 성전 근처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8장에서 예수님이 성전에서 돌에 맞을 뻔하시고 피하신 직후이니, 아마 성전 가까운 어느 골목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성전에서 나와서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 하나를 보게 됩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믿고 있었던 종교적인 통념, 그러니까 구약 시대부터 있었던 부모의 죄가 자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전통적인 생각으로는 이런 결함을 가진 사람은 날 때부터 결함이 있고 저주받은, 그러니까 본문이 질문처럼 부모나 본인의 심각한 죄로 인해 이런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이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죄입니까?”라고 물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모두들 그렇게 믿고 있는 상황이었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 제자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하십니다. 이 대답은 어쩌면 당시의 사람들이 갖고 있던 종교적인 신념을 정면으로 거스를 만큼 위험한 대답이었을도 모릅니다. “이 사람의 죄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하나님의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날 때부터 눈 먼 사람을 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땅에 침을 뱉어서 진흙을 개어 눈에 바르시고는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하셨지요. 왜 하필 침을 뱉어서 진흙을 개셨는지, 굳이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는지에 대해서도 다양한 신학적인 해석이 있고 그 이야기를 묵상하는 것도 참 은혜롭지만, 오늘은 ‘누구의 죄입니까’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에 좀 집중해 보고 싶습니다.


제자들은 정성을 다해 배우던 사람들이었지만,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이미 마음속에 결론을 어느 정도 정해 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원인은 죄다. 그 죄가 누구 거냐?”라는 틀 안에서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당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눈먼 사람과 죄에 대한 교리적인 생각이었지요. 그래서 이 질문의 목적은 “사람”이 아니라 “죄의 원인”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질문과는 완전히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그의 죄 때문도,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려 함이라.”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몹시 놀랐을 것 같습니다. 판단하고 정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하는 질문, 그런데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던 질문의 의도를 돌아보게 되지 않았을까요. “아 우리가 이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저 정죄하려고만 했구나”라고요. 그렇게 예수님의 대답은 “틀린 질문” “의도를 가진 질문”에서 우리를 꺼내서 새로운 길을 보여 주십니다.


1. 잘못된 질문은 사람을 가둡니다

사실은 우리도 종종 제자들과 비슷한 질문, 우리 안의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의도로 질문을 할 때가 많습니다. “저 일이 일어난 건 누구 때문일까?” “저 사람은 왜 저 모양일까?” “누가 잘못했을까?”

회사에서 일이 잘못되었을 때, 뉴스에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접했을 때, 교회에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대할 때, 그리고 배우자나 가족의 단점을 볼 때도 우리는 '원인'을 찾고 그 원인을 가진 사람에게 쉽게 낙인을 찍습니다.


정답을 이미 정해 놓고, 그 틀 안에서 사람을 판단하고, 누군가를 죄인으로 만들고, 그 사람 위에 죄책과 낙인을 씌우려 할 때가 너무나 많다는 말씀입니다. 개인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그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완고한 신앙적 틀, 오래된 교리의 오해, “원래 그런 거야”라고 굳어진 생각들이 누군가를 억압하고 숨 막히게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신앙의 질문과 신학적 틀은 필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설명하는 구조가 있어야 우리는 그 안에서 신앙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으므로 이런 교리나 설명은 우리를 돕는 좋은 도구가 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도구가 사람들을 살리는 일이 아니라 억압하고 정죄하는 일에 쓰이고 있지는 않은지 늘 돌아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도구를 위해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도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요.


2. 신호등 비유 — 틀은 도구입니다

길을 가다보면 수많은 신호등을 만나게 됩니다. 신호등은 질서를 위한 좋은 틀이지요. 빨간 불일 때는 건너거나 달리지 마라, 파란 불일 때는 건너도 좋다. 혹은 차를 몰고 지나가라는 약속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만일 신호등이 없으면 도시는 혼란에 빠지고, 교통사고도 훨씬 더 많이 나게 되겠지요.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횡단보도 위에 쓰러져 있거나 사고가 나서 사람들이 다친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평소에는 신호를 철저히 지키는 것이 질서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살리기 위한 ‘특별한 순간’에는 신호의 원래 목적인 사람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해집니다. 그러니 신호를 무릅쓰고서라도 사람을 구하는 일이 우선이 되지요.


우리가 평소에 가지고 있는 교회의 규칙, 신학의 말들, 신앙의 판단도 비슷합니다. 평소에는 우리를 보호하고 돕는 “신호등”이지만 그것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수치심을 더하게 하고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과연 그 틀이 옳은 것인가”를 먼저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살리자고 만들어진 도구가 오히려 사람을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정직하게 살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바로 그런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잘못된 틀, 사람을 규정하는 정답, 누군가를 죄인으로 만드는 시선을 넘어 생명을 먼저 보시는 분입니다.

신호등이 도구일 뿐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어겨도 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나 혼자 빨리 가고 싶어서,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신호를 어기는 건 전혀 다른 경우니까요. 교회의 질서를 위한 틀이나 교리적인 해석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이러한 전통과 규칙을 존중하고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마치 그런 규칙이나 생각이 절대적인 것처럼 무작정 신봉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율법이나 교리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습니다(마 5:17). 문제는 교리나 틀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성경을 열심히 연구했지만,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같은 성경으로 사람을 살리고 자유케 하셨습니다.


3. 예수님은 틀린 질문에서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을 책망하지 않으셨지만, 그들의 관습적인 생각을 따라가지도 않으셨습니다. 대신 “누구의 죄 때문인가?”라는 질문을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려 한다”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살리시는 일, 풀어주는 일, 품어주는 일을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답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었습니다. 잘못된 질문을 넘어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 그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4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아직 낮일 때, 우리가 무언가를 할 수 있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처럼 움직이고 사람들을 만나고 같이 밥먹고 하는 일이 너무나 당연해 보이지만, 언제까지나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누리고 행하는 모든 일들은 다 시한이 있습니다. 그러니 아직 낮일 때, 살리는 일, 풀어주는 일, 품어주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4. 오늘 우리가 돌아볼 질문

그래서 오늘 이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습니다.

“혹시 너희도 정답을 정해 놓고 질문하고 있지 않느냐?”

"너희가 붙잡고 있는 틀이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있지 않느냐?”

“도구가 사람보다 중요해진 순간은 없었느냐?”

교회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또 신앙의 여정에서 하는 질문이 누군가의 마음을 가두고 낙인을 찍고 생명의 가능성을 막고 있다면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도 이 본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 질문, 그 선입견을 잠시 내려놓아라. 그리고 내가 바라보는 생명의 자리를 함께 보자.”


신앙은 정해진 답이나 내 의견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이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인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일인가”라고 돌아보는 것, 나는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정직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나가면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교리도, 신학적 틀도, 교회의 규칙도 우리에게는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사람을 살리는 도구일 때 의미가 있습니다. 쉽게 결론 내리지 말고,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일인가라고 묻는 훈련을 하는 것이 신앙의 여정입니다.


예수님은 잘못된 질문과 굳어진 틀에서 우리 모두를 자유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 아닐까요.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묻기보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지를 보라.”

“정답을 찾기보다 사람을 살리는 길을 먼저 걸어라.”

“틀에 갇히기보다 사랑으로 자유롭게 하라.”

주님은 언제나 사람을 먼저 보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시선과 마음을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주님의 시선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자유로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생명의 하나님,

오늘 저희에게 “누구의 죄입니까”라는 질문 속에 갇힌 마음을 돌아보게 하시고, 예수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고, 생명을 먼저 바라보는 길을 가르쳐 주심에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는 고백합니다.

너무 쉽게 판단하고, 너무 빨리 결론 내리고, 사람보다 내 생각의 틀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누구의 죄입니까?"라고 물었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사람을 보지 못하고 정죄의 잣대만 들이대며 살아온 때가 많았습니다.

주님, 용서해 주옵소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열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드러날 가능성이었고, 정죄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음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우리에게도 그런 시선을 주옵소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이 세상 가운데서 사람을 먼저 보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먼저 구하게 하옵소서.

아직 낮일 때, 우리에게 주신 이 시간이 있을 때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동참하게 하옵소서.

정죄하는 질문 대신 살리는 손길을, 굳어진 틀 대신 따뜻한 품을, 낙인 대신 사랑을 나누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잘못된 질문에서 건져내시고, 언제나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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