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남> 보고 나에게 묻기

[옆집언니] 영화 <수리남>

by Bamnoon


<수리남>을 썩 유쾌하게 보지 않았다. 찜찜한 긴장의 반복을 아주 잘 연출해 놓은 덕에 초조한 심정으로 ‘다음화’와 ‘오프닝건너뛰기’ 버튼을 눌러대며 6화를 연속해 보긴 했다. 그렇지만, 영화를 오롯이 즐길 수 없게 만드는 지점들이 많았고 모든 회차를 다 본 후에는 찝찝한 긴장은 그냥 찜찜함으로 남았다.


먼저, 단편영화 <남성의 증명>으로 주목받고, 군문화를 담은 <용서받지 못한 자>로 장편 데뷔한 후, <범죄와의 전쟁>, <군도>, <공작>처럼 소위 남탕영화 혹은 수컷들의 전쟁을 당대성을 고발하며 담아내왔던 윤종빈 감독이니 기대랄 것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존재를 철저히 도구화한 납작한 서사와 기획에 ‘그러면 그렇지’하는 실망감은 감출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1화 초반 인구(하정우)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어린시절 회고부분은 황정민 주연의 <국제시장>을 오버랩 시키며 가부장제에 대한 연민의 시선과 정서를 디폴트로 만드는데 이 또한 감상을 갑갑하게 했다. 이 외에도 신도들이 가스라이팅 된 사연이 창호(박해수)의 설명을 넘어 보다 밀도있게 다뤄지지 않은 점, <범죄도시> 장첸을 떠올릴 의도였는지 피가 낭자한 의미없는 살인장면을 긴 시간을 할애해 굳이 전시한 점 등 유쾌하지 않은 지점들이 많았다. 물론 이 드라마의 전부가 맘에 들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단편성을 피한 주요인물들의 캐릭터, 시대성에 대한 고민의 흔적, 극의 흐름에 따른 인물의 다채로운 심리변화가 <수리남>의 단점을 상쇄시키는 매력이 된다.


# 가부장제

전술했듯이, <수리남>을 썩 좋게 보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아버지코드’ 때문이다. ‘K-가장’의 정서를 극 초반에 도장을 찍듯 찍어놓고, ‘가족을 위해 내 몸을 불살라서라도 돈을 벌어야 해’라는 생계부양의 다짐이 극 전체를 추동하는 힘이 되었다. 아무래도 영혼 구원을 위해 결혼한 것 같은 인구의 아내 혜진(추자현)은 해외에 돈 벌러간 남편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처량한 (교회 다니는)여인으로만 기능한다. 이로써, 아무래도 감독은 그 시절 부계사회의 단면을 비판하기 위해 재현한다기 보다는, 서사의 장치로써 남성 중심 체계를 정당화 혹은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지 않았나 싶다. 철저히 사적 영역에 머물러 남성을 기다리고, 용서하고, 더 멋진 남성으로 거듭나게 하는 여인을 통해 말이다. 그러나, 이 서사를 끝까지 아주 나쁘게 비판만 하지 않아도 될 가능성은 이 드라마에서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노래들에서 찾을 수 있다.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 그 곳은 춥고도 험한 곳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 /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 괴롭고도 험한 이 길을 왔는데 /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 그 누구도 말을 않네 / 나는 지금 홀로 남아서 / 빌딩 속을 헤매이다 초라한 골목에서 /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조용필 <꿈>)


“아무도 없는 / 아무도 없는 / 쓸쓸한 너의 아파트” (윤수일 <아파트>)


생계와 가족부양, 출세라는 커다란 임무를 스스로 달고 괴로움으로 여기저기 헤맸지만 결국 경험하게 되는 건 ‘아무도 없는 쓸쓸함’이자, ‘홀로 남아 먹는 눈물’이다. 뇌경색으로 사망한 어머니 죽음 앞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인구의 아버지, 동생들 그리고 새로 꾸린 가정을 홀로 책임지며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강한 남자, 강자에게 복종하고 약자는 지배했던 인구의 남성(중심)의 문화와 삶의 끝은 ‘아무도 없음’인 것이다. 물론 이 드라마의 끝은 인구를 기다린 혜진과 아이들의 뜨거운 재회로 마무리되었으나(수리남에 간 아버지의 선택을 반기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우리 사회의 규범처럼 작동하는 가부장제, 남성중심문화의 지배환상의 결말이 얼마나 허망하고 외로운지, 얼마나 어리석고 쓸쓸한지를 드라마 <수리남>은 노래들을 통해 의도치 않게 비판적으로 전망하고 있는 것이다. 지배할지, 함께할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 경계

그럼에도, 수리남의 인물들은 어딘가 재밌다. 분명히 자주 보아왔던 캐릭터인데도 식상하지 않은데 여기에는 인간에 대한 감독의 어떤 특별한 인식과 세계관이 녹아있는 듯하다. 강인구는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동생들을 뒷바라지해야 했던 인물이다. 결혼도 인구의 ‘가장’ 기능을 돕는 역할로 해치우듯 이뤄졌다. 가족을 지키기 위한 책임감과 도덕적 의무와 의리 사이에서 인구는 돈만 밝히는 능글맞은 비즈니스맨이 되었다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을 둔 맘씨 좋은 아버지가 되어 돈을 날릴지라도 갇혀있는 소녀를 구하고자 한다. 전요한(황정민)은 어떤가. 의심많고 의뭉스러운 목사(사이비 교주)이면서 전세계의 코카인 밀매 왕. 악 그 자체인 사람이다. 그는 돈이라면 함께 지내온 식구를 죽이는 것쯤은 아주 쉬운 악인이면서 동시에 박찬호 경기와 사인볼, 조용필의 노래에 열광하며 어느 누구 한명 쯤은 믿고 싶은 아이 같은 사람이 바로 요한이다. 최창호도 마찬가지다. 그는 국익을 위해 몸을 불사르는 열정적인 요원이면서, 인구의 인간적 제안을 머뭇거리며 받아주는 부드럽고 엉뚱한 상만이 형이 된다.

그러니까, 수리남의 인물들은 어느 한 자리에 자신을 위치시키거나 규정하지 않고 다양한 모습이 된다. 캐릭터의 색깔이 완벽히 선명해지다가 다시 다른 색이 덧칠해지고, 또 다른 색이 덧칠해지는 것 같달까. 난 이 ‘자리’나 ‘규정’, ‘선명함’이란 말을 ‘경계’라고 바꿔 부르고 싶은데, 윤종빈 감독의 전작과 그의 수리남 인터뷰를 살펴보면, 그는 인간을 ‘경계를 알 수 없는 혹은 경계를 지을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는 듯하다. 때문에 관객은 수리남의 인물들을 보며 일말의 동질감을 느낀다. 악인에게서도 선인에게서도 자신을 발견하며 반추하거나 반성하거나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시대로 인해, 환경으로 인해, 사건으로 인해 돈과 삶을 두고 갈등하고, 생계와 좋아하는 것을 두고 고뇌하며, 대의와 관계 가운데에서 머뭇거리는 우리를 보게 한다는 말이다.



# 진짜와 가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창호는 인구에게 “전요한 만나고 왔는데, 말 좀 전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자기가 꼭 돌려받을 게 있다고. 무슨 야구 사인볼이라고 하던데?” 이 말을 들은 인구가 “아, 짝퉁 사인볼?”이라고 대답하자 창호가 “아끼던 거라고, 자기가 가진 것 중에 ‘유일하게’ 진짜라고” 말한다. 마약 밀매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전요한에게 ‘진짜’는 유일하게 박찬호 사인볼이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수리남>에만 등장하지 않는다. 최근 높은 시청률로 종영한 <작은 아씨들>에서도 부유하고 유력한 가문인 월령가의 딸 효린은 친구 인혜에게 “우리집은 다 가짜”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지난 여름 종영한 드라마<안나>에서도, 유망한 벤처기업 대표 최지훈이 자신의 회사가구를 모두 가짜로 인테리어 해놓은 장면이 방영되었다. 실제로 찾아보니 부자들이 가품을 일상에서 진품의 대체재로 사용한다는 기사와 분석들이 존재했다. 부자들 대부분이 자신이 들면 누구도 가짜라고 생각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에서 가품을 구매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가 부자인 것은 ‘진품’에 대한 경험치에서 갈린다고. 명품경험이 많아 고급스럽고 세련된 눈을 탑재해 진품과 질좋은 가품을 쉽게 선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질좋은 가품을 구매해 일상생활에서 대체품으로 활용하고, 정말 중요한 자리에서 진품을 사용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씌워진 어떤 틀이 대체품으로의 가품을 사용하게 하는 것인가.

나아가, 이 세 장면은 전부 부 축적의 ‘과정’에 대해 짚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쌓아올린 부는 진실을 토대로 쌓아졌는가, 거짓이 부를 퇴적한 소재인가. <수리남>의 전요한은 수리남의 영향력 있는 한인교회 목사로 드러나지만, 실제 마약으로 불안한 환경의 성도들을 조종해 부를 축적했다. <작은 아씨들>의 월령가는 대외적으로는 약자들을 위한 기부에 앞장서는 것처럼 포장되지만, 자기 가문에 방해가 되는 사람이라면 가차 없이 죽이며 재산을 불린다. <안나>의 최지훈도 월령가와 마찬가지로 미디어에 의해 건실하고 의식 있는 정치인으로 비춰지지만, 실제로 약자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 비정한 인물이다.


우리의 ‘어떠함’은 어떤 과정으로 쌓아올려졌는가. 아니 ‘나’는, 내 존재는 어떤 토대로 퇴적되었는가. 내가 서있는 토대가 타인의 고통과 죽음이라면 나의 자리는 진실한가. 대체품을 써서라도 나의 위치를 명품으로 전시하고자 하는 심리는 과연 안전한가. 내 생활에서 드러냄과 감춰짐의 갭은 너무 크지는 않은가. 스스로에게 질문해보길 바란다. 모래와 같은 거짓으로 포개어진 집은 금방 무너진다(마태복음 7장 26-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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