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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브릭 Nov 26. 2018

언덕 위의 달

캐논 DSLR, 샌프란시스코


수업이 끝나고 나오니 해는 붉은색 코트를 뽐내며 조금씩 바다 뒤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뉘엿뉘엿.


'바람이 차네'


얇은 체크 셔츠 하나만 입고 나온 정우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학교 앞에 묶어두었던 자전거의 자물쇠 두 개를 풀었다. 앞바퀴에 하나 뒷바퀴에 하나. 얼마 전 자전거의 뒷바퀴와 안장을 도둑맞은 후로는 더욱더 꼼꼼히 바퀴를 묶어 놓는다. 샌프란시스코에선 흔한 일이란다. 고가의 자전거를 운전하는 친구들은 아예 바퀴를 분리해서 강의실에 들고 들어가기도 한다. 처음에 도둑맞았을 땐 이런 일이 다 있나 싶었다. 한국에선 바퀴만 따로 훔쳐가는 도둑은 본 적이 없었으니까.


정우는 메신저 백에 U자형 쇠 자물쇠 두 개를 집어넣고 자전거에 올라탔다. 빨간 픽시(Fixie) 자전거의 두 바퀴가 사뿐히 도로에 내려앉았다. 정우는 샌프란시스코에 유학 와서 처음 픽시를 접하게 되었다. 지옥 같은 언덕이 많은 이 동네엔 이상하게도 기어가 달린 자전거보다 싱글기어인 픽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더 많이 보였다. 스트릿 문화에 정통한 디자이너 형이 말하길 샌프란시스코가 스케이트 보더들과 픽시 라이더들의 성지란다. 다른 지역에서 이 언덕을 즐기기 위해 원정도 온다고.


'우리가 겨울에 스키 타러 다른 지역 가는 거랑 비슷한 개념인가?'


픽시 자전거는 가볍고 빨랐다. 내가 페달에 힘을 주는 만큼 쭉쭉 속도를 내는 재미도 있었다. 소위 말하는 엔진, 허벅지의 힘이 강할수록 자전거의 속도도 빨라졌다. 정우도 금방 이 픽시의 재미에 빠져들었다. 가파른 언덕들도 많았지만 또 그놈들을 정복하는 쾌감도 있었다. 무엇보다 메신저백을 메고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을 누비다 보면 자신이 힙스터가 된 것 같은 우쭐한 기분이 좋았다.


'배고프다. 집에 고기 있나?'


정우는 잠시 고민했다. 정우가 사는 동네는 이탈리아 타운과 차이나타운의 경계에 있었는데 관광지에 가깝다 보니 마땅히 사 먹을만한 식당이 없었다. 주머니 사정이 초라한 정우는 웬만하면 집에서 해결하자 주의자였다.


'에이, 오늘은 그냥 사 먹자.'


며칠째 김, 밥, 김치로만 끼니를 해결하다 보니 지겨워졌다. 엄마가 직접 담근 총각무가 그리웠다. 차이나 타운에서 파는 짝퉁 한국 김치는 정말 살기 위해 먹었다. 유니온 스퀘어 쪽을 지나다 보니 공원 중앙에 대형 크리스마스트리를 설치하는 인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연말이 오긴 오나보다. 올해도 눈 없고 덜 추운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홀로 보낼 예정이다. 운이 좋으면 한국에 안 가고 남아있는 친구들끼리 햄버거나 사 먹겠지. 아니면 무조건 집에서 라면이다. 중국산 짝퉁 김치랑.


정우는 스탁턴(Stocton) 스트릿을 달리다가 자전거를 세웠다. 집으로 향하는 가장 평평한 길이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정우는 자전거 핸들을 돌렸다. 테일러(Taylor) 스트릿 근처에 도착한 정우는 자전거에서 내렸다.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기엔 너무 가파른 언덕이었기 때문이다. 찬바람을 맞으며 수많은 여행객들의 행복한 얼굴을 볼 때면 조금 우울해진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정우는 스스로가 그렇게 비참한 하루를 살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냥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뭐.'


정우는 숨을 헉헉거리며 빨간 픽시를 끌고 테일러 길에서 가장 가파른 언덕을 올라갔다. 청록색 담벼락을 지닌 낡은 집 앞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금발의 여자 세명이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마리화나 연기를 뱉어내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눈이 풀려서 정우를 향해 소리쳤다.  


"Come on bro!! You almost there!"


엄지 척. 그녀가 검정 매니큐어가 칠해진 하얀 엄지 손가락을 정우에게 꺼내 들었다. 정우 역시 억지로 웃으며 왼쪽 엄지 손가락을 그녀에게 선물해주었다. 금발미녀 셋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어째튼 금발 남자한테 응원을 받는 것보다는 금발 미녀가 낫다고 생각하며 정우는 언덕의 꼭대기에 도착했다. 이제 당분간은 평탄한 길이다.


놉힐(Nob Hill)이라고 불리는 이 동네는 정우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중 한 곳이다. 부자 동네답게 한적하고 주택들의 디자인은 하나같이 고급스럽다. 걷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동네. 정우는 놉힐까페라고 간판이 붙은 커피숍 앞에 멈춰 섰다. 종종 지나다니면서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던 곳이다. 문 앞에 메뉴판이 놓여있었다. 정우는 스타벅스보다 2배는 족히 비쌀 것 같은 아메리카노의 가격을 보고 마음을 접었다.  


'그냥 가자. 밥이나 사 먹자.'


잠깐의 낭만을 위해 쓰기엔 꽤나 큰돈이었다.  카페를 지나쳐 조금 더 걷다 보니 올라온 만큼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특징이다.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비례하는 내리막이  등장한다. 오늘따라 하늘이 유독 파란 건 기분 탓일까. 이른 저녁인데 달은 벌써 산책을 나왔다. 정우는 잠시 자전거를 세워놓고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계속해서 카메라의 세팅값을 바꾸며 달이 가장 잘 담길 때까지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아무리 줌을 당겨도 달과의 거리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에이.'


정우는 자전거에 올라타고 내리막길 앞에 섰다.

저녁 메뉴를 정한 뒤 페달과 브레이크를 동시에 사용하며 천천히 내려간다.


'오늘은 엄마한테 전화해야겠다.'


정우의 빨간 픽시 자전거가 언덕아래 왼쪽 골목으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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