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리대로 살기

나를 견디게 하는 것들

by 모지란

좋은 일이 있으면 찾는 전통주 주점이 있다. 이름은 ‘아카사니’이다. “아이구머니!”와 같이 뭔가 찾다가 발견했을 때 쓰는 우리말 감탄사라고 한다. 처음 이 곳을 발견했을 때 느꼈던 마음과 같다. 아카사니는 주점 하면 떠오르는 전통적인 이미지와 달리 모던하고 힙한 내부를 자랑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오픈키친 주변에 둘러진 짙은 나무색 바가 눈에 먼저 들어온다. 내편과 찾는 날에는 바 자리에 앉아 셰프와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제철 맞은 재료로 만든 요리, 그와 어울리는 전통주를 추천받을 수 있다. 간간히 찾는 우리를 기억해주는 다정함은 덤이다. 첫 술로는 언제나 솔송주를 선택한다. 솔향기가 식사를 시작하기 전 입가심을 돕는다. 내편은 이강주를 좋아한다. 이강주는 배와 생강으로 만들어져 회, 샐러드처럼 익히지 않은 음식을 돋보이게 하는 술이다. 나는 좀더 자기주장이 강한 술을 좋아하는데 복분자 증류주인 만월이 대표적이다. 만월은 닭튀김이나 전골처럼 맛이 강한 음식과도 대등하게 겨룬다. 드라마 『호텔 델루나』에서 주연을 맡았던 아이유의 극 중 이름도 만월이었다. 만월은 여리여리하고 투명한 체리빛을 띄고 있어 드라마의 캐릭터를 생각나게 한다. 제법 과일향이 짙으면서 달지않다. 마실 때는 담백하고 천천히 취한다. 단, 다음 날 숙취는 조금 있는 편이다.



20230411_171904.png 연남동 아카사니, 매실로 만든 오매락


몇 년 전 막걸리 빚는 청년들의 창업을 도운 적이 있다. 쌀을 씻고, 찌고, 발효시켜 술을 빚어내는 과정이 정성스러웠다. 청년들의 막걸리를 명절에 외할머니댁에 가져갔더니 다들 익숙한 맛이라고 했다. 집에서 빚는 술맛이 난다는 것이었다. 결국 할머니가 쓰던 코끼리 밥솥을 가져왔다. 유튜브를 따라해봐도 잘 되지 않았다. 동네 양조장에서 가양주빚기 클래스를 수강하기도 했다. 잘 익은 술은 소리만으로 알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청력이 좋지 않은 모양이라 좋은 술을 사서 마시기로 했다. 또, 한동안은 연남동에 새로 생긴 모던 전통주 주점들을 돌아다녔다. 개성있는 전통주와 곁들일 훌륭한 안주를 찾기 위해서였다. 몇 번 가서 먹어보고 레시피를 추리해보며 장금이 놀이를 했다. 술 아직 못 빚어도 안주는 이제 맛있게 만들 수 있다. 특히 바지락술찜은 나의 자랑인데 와일드루꼴라와 버터 한 덩이를 넣으면 유명한 집과 비슷한 요리가 나온다. 술 한잔에 조개를 조금 까먹고 난 뒤 파스타면을 볶으면 봉골레파스타가 된다. 중요한 날에 옷차림을 점검하듯, 술과 어울리는 상차림을 고민하는 편이다.


이렇게 전통주를 좀 아는 척 글을 쓰고 있어도, 정작 술맛 안지 얼마 안되었다. 남들은 고삐 풀린다는 대학시절, 나는 집이 엄하다는 핑계로 술을 거절했었다. 취한 뒤의 내가 어떨지 모른다는 것이 큰 두려움이었다. 작은 버킷에 병맥주를 담아와 마시는 단골술집에 가면, 선배들은 초콜릿맛 머드셰이크를 사주었다. 얼음컵에 조로록 부어 마시면 알콜향은 전혀 나지 않았다. 알고 보니 머드셰이크는 보드카였다! 가격도 일반 맥주에 비해 비쌌다. 대학생 선후배라고 해봐야 몇 살 차도 안나면서 나를 배려해 준 마음이 고맙다. 나는 졸업을 코 앞에 두고 나서야 술을 조금 배웠다. 우리가 자주 다녔던 신촌의 독방(진짜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은 3명의 이모가 운영했는데 어느 날 쌍꺼풀 수술을 예쁘게 하더니 문을 닫아버렸다. 거길 찾는 우리도 언제나 셋이었는데, 겨울에 소주가 얼어나오면 동시에 동치미 국물처럼 후루룩 마시던 기억이 참 좋다. 우리는 매 번 거나하게 마셨다. 하루는 친구 하나가 술에 취해 후배에게 고백을 하고, 바로 차이고, 다시 돌아와 또 마신 적도 있다. 안주는 늘상 번데기탕과 계란말이, 돈이 생기면 짚동가리 생주라는 전집에서 감자전을 먹었다. 축하할 일이 있으면 감자전에 치즈를 올리는 호사도 부렸다. 나의 친애하는 술독들은 죄다 미국에 가 있다. 치즈와 감자만 잔뜩 있고 소주는 없는 쓸쓸한 천국이라고, 가끔 안부를 전한다.


안타깝게도 우리집은 술맛 아는 사람이 아예 없었다. 아빠는 주량이 막걸리 반 병, 엄마는 별명이 목사 사모님이셨다. 술맛은커녕 이런 집 분위기에서 취하는 것은 곧 죄였다. 술 먹은 날이면 부모님께 도서관에서 밤샘공부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지금에서야 고백하건대 나는 변절자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친정의 가르침과 반대로 두 명의 ‘주’를 섬긴다. 신앙은 주인 주(主), 생활은 술 주(酒). 일요일은 성찬식 포도주만 허용되었던 우리집 전통을 깬 것이 나다. 자랑스러워 할 만한 일은 아니이지만, 그 편이 좀 더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도 잔치집에 술이 떨어지자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까지 일으키시지 않았는가. 취하는 일은 고난이 더 많은 삶에 흥을 잃지 않으려는 필사의 노력이다. 우리 몸은 70% 이상이 물로 이뤄졌다고 한다. 약간의 술이 들어가 몸 전체에 취기가 오르는 것은 기적과 흡사하다. 잔을 채우고 마시면 붉은 피는 포도주가 된다. 복분자를 마시면 다음 날 토도 붉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날, 우리집 화장실 욕조에서 자다가 엄마의 사랑이 가득한 등짝 스매싱을 경험하였다. 와인과 친해지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는 소주를 가장 좋아한다. 소주는 튀지 않고 다른 음식을 높여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리하는 입장에서, 소주는 맛을 정리하는 역할을 하니 틀린 말은 아니다. 합성원료로 만들어져 향은 그닥이다. 처음부터 쭉 코를 쏘는 알콜 냄새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는 겸손하고 따뜻한 사람이면서도 보통내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내편이 되어 나와 어울리며 살기를 선택해주었다. 소주는 처음에 알콜이 35도였다가, 요즘에는 순한 맛을 찾는 사람이 많아져서 16도 언저리에 멈췄다. 그이도 그렇다. 전쟁 같았던 연애시절과 달리 같이 사는 삶은 잔잔하다. 가랑비에 옷 젖듯 서로에게 적응한 결과다. 매일 서로의 좋음을 한 치씩 더해가는 삶이다. 우리의 사랑은 ‘처음처럼’보다 ‘좋은데이’에 가깝다.


주는 익숙해지는 것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다. “송나라에는 시와 산문을 모두 섭렵했던 소동파가 있었고 대한민국에는 소주와 맥주를 혼합하여 섭렵하는 소맥파가 있다”는 친구의 농담이 기억난다. 나는 소맥파다. 사회생활에 발을 들인 뒤 소맥을 넘어 폭탄주 제조법을 익혔다. 무림의 초짜가 고수로 거듭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저것 섞으면 술의 도수는 낮아지고 소주의 향은 옅어지진다. 물론 숙취는 그와 반비례한다. 폭탄이라는 말이 우악스럽지만 섞어놓은 것들 각각의 이름은 문학적이었다. 가령 ‘고진감래’는 소주잔 두 개를 겹쳐 사이에 콜라를 넣고, 소주를 붓고, 그것을 맥주가 가득 든 잔에 넣어 마시는 것이다. 술을 거의 다 마실 때쯤 잔이 열리면서 달콤한 콜라가 입에 들어온다. 그 전에 마신 쓴 술맛을 다 까먹고 또 먹으면 그대로 사망이다. 소주, 백세주, 산사춘, 맥주를 섞는 ‘소백산맥’도 있다. 낭만주객이 주변에 많았던 것 같다.


수많은 종류의 술이 나의 희노애락과 함께 했다. 같은 술도 상황에 따라 다른 맛이 났다. 회식은 무슨 술을 먹어도 즐거웠던 적이 없다. 될 수 있으면 좋은 날에는 좋은 술을 마시려고 노력했다. 이름 있는 술은 확실히 이름값을 했다. 술과 친구는 오래된 것이 좋다고 하는 옛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인생이 좋은 날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슬퍼서 마신 적도 있다. 하지만 슬픔을 술 푸며 달래면 매번 끝이 좋지 않았다. 그런 날은 술도 감정도 폭음하게 된다. 감정은 가벼운 취기와 비슷해서 무심히 스쳐지나가듯 자연스레 깨어나니 술로 잡아두면 안된다. 그래서 나의 음주는 단 하나의 확실한 원칙이 있다. 위로는 술 아닌 사람으로만! 슬픔에 공감 할 수 있는 사람은 많고 기쁨을 함께 나눌 사람이 적다. 좋은 일은 애꿎은 자랑이 될까봐 감추기도 한다. 살면서 깊은 정을 나누는 사람은 존재 자체로 행복이다. 그런 이와 만나면 사람만으로 충분히 취할 수 있다.


결국 이런 저런 핑계로, 나이 먹을수록 술약속이 줄어든다. 주량을 다투던 혈기왕성한 나날이 지나고 순리에 따르는 것이 편해진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넷플릭스를 켜고 시원한 맥주 한 잔 들이키면 그것대로 좋다. 노곤한 몸에 톡 쏘는 탄산이 어울린다. 이제보니 순리는 입말로 읽으면 술:리구나! 취할 때마다 세상 이치가 쉽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나는 술리대로 살고 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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