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뤄놓은 것들을 꺼내어 바라보기
4月 28日.
얼마전에 빨간 그물망에 담긴 양파를 샀다. 편리하게 쓸 수 있게 진공포장된 깐양파를 사려고 마트에 갔다가, 빨간 그물망에 담긴 껍질 겹겹이 양파가 너무 자그맣고 귀여워서 (심지어 세일까지 .. !) 홀린 듯 집에 데려왔다. 작은 사이즈의 양파를 보고 있자니 서양 양파인 샬롯같기도 하고 - 샐러드에 쓰기에도 딱 좋겠다 싶어서.
나는 왜인지 두손 한가득 들어오는 일반적인 K-양파의 크기가 싫다. <양파> 라고 하면 보통 한 손 가득 들어오는 커다란 양파가 생각이 난다. 엄마가 된장찌개에 숭덩숭덩 썰어놓던 커다란 알양파가. 그렇지만 나는 항상 조그만한 작은 양파를 찾아 헤멘다. 왜냐하면 일단 혼자 살다보니 생각보다 한식을 안먹게 될 뿐더러, 가-끔 양파를 쓰면 겨우 반개를 쓰고 꼭 남아버리는데. 남은 양파만 따로 보관하면 꼭 그렇게 물러버린다. 양파는 왜 그렇게 빨리 무르는 건지! 자그만한 양파가 딱 요리 한번에 다 털어넣어 쓰기가 좋다.
하여튼 그래서 빨간 그물망에 담긴 K-샬롯 (aka. 미니양파)를 샐러드도 해먹고, 파스타에도 써먹어야지 ! 하는 야심찬 마음으로 사왔는데도 불구하고.. 일주일동안 이 빨간망 양파는 햇빛 한번 보지 못했다. 그러면 그렇지. 평일의 게으른 직장인은 양파 깔 마음의 여유가 없다. 아.. 양파 까야되는데.. 이 생각만 일주일째. 미루고 미루다가, 이러다 양파 다 버리겠다 싶어 마지막날인 일요일 오전에 드디어 칼을 빼들었다.
이름하야 <양파 순살 만들기 프로젝트>. (말만 거창하다. 근데 거창해야 움직일 재미가 돋는다. 흐흐.)
일단 예쁘게 셋팅부터. 예쁘게 셋팅하면 기부니가 좋거든요. 키친크로스 위에 오늘의 주인공 빨간 망 양파를 올리고, 적당한 크기의 보울 두개를 준비. 보울은 꼭 두개가 필요하다. 왜냐면 양파를 두껍게 감싸고 있던 껍질을 담을 보울이 필요하고, 뽀오얀 깐양파를 담을 보울이 필요하니까.
주방 왕 가위를 꺼내서 일주일동안 양파를 감싸던 빨간 망을 두두둑- 끊어내고, 과도로 양파 하나씩 껍질 벗겨내기 시작. 나름 사각사각 벗겨내고 있자니 은근히 힐링이다. 일종의 명상효과 같달까. 반복적으로 양파 껍질 샥샥 벗겨내면서, 일주일동안 묵은 생각의 때도 샥샥 벗겨낸다.
첫번째 앙파를 깔 때는 이걸로 뭐해먹지? 생각하다가, 세개째 양파에서는 이번주 회사에서 참지 못하고 동료에게 뾰족하게 말했던 순간에 대한 반성, 다섯개째까지 가니까 어제 엄마한테 괜히 짜증냈던 일에 대한 반성까지 하게됐다. 그리고는 이거 끝나고 엄마한테 화해의 전화 한통을 해야겠다는 야심찬 다짐까지.
뽀오얀 양파들을 보고 있자니 괜시리 뿌듯한 마음이 고개를 든다. 그리고는 일주일 동안 쌓여간 마음 속 찌꺼기들에 대한 일종의 디톡스 효과까지. 청소된 마음만큼 위장도 (?) 왜인지 비워져서, 양파 하나를 숭덩숭덩 썰어 두부김치를 만들었다. 샬롯 대신 사용해서 샐러드나 파스타를 만들겠다는 마음은 허기진 위장 앞에서 도무지 맥을 못 춘다. 아휴 노동에는 한식이지 !
두부를 따듯한 물을 팔팔 끓여 삶아주고, 참기름 & 간장 & 참치액을 한스푼씩 쪼로록 섞어 볶아내어 두부김치를 만든다. 김치에 푹-익은 기미가 없어서 시큼한 맛을 내 줄 식초를 한스푼 둘러주고, 따듯한 두부에는 참기름과 깨를 뿌려서 고소한 맛을 더해준다. 시큼하고 매콤하고 고소한 맛. 한국인이라면 입이 먼저 반응하는 바로 이 맛.
미뤄뒀던 시간값으로, 일곱알 중에 두알은 버렸다. (세일해서 산값 말짱 도루묵 됐다.) 그래도 더 버릴 뻔 한거, 지금이라도 깨끗이 까두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람. 오늘도 벗겨내지 못했으면 하나도 못 먹을 뻔 했는데.
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있지만 미뤄놓고 꺼내어보지 않는 것들이 있다. 한번에 다 들여다보려면 어렵지만, 하나씩 하나씩, 한꺼풀씩 벗겨내어 들여다보면 어느새 끝이 나 있다. 언제나 하나씩, 한개씩, 한걸음씩.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하나씩 나아가는 것의 힘을 오늘도 이 작은 양파로 배운다.
Tip. 양파는 하얗게 깐 뒤에는 크린랩으로 싸두면 오래 보관이 가능합니다. 이걸 모르고 키친타올만 깔아서 양파를 보관했다가 2주도 못가서 버렸지 뭐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