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가짜와 진짜 사이: 시뮬라크르 시대의 삶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잠을 자는 장면입니다. 아름다운 여주인공은 잠을 자는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언젠가부터 드라마에 몰입이 힘듭니다. 너무 아름다운 주인공의 자는 모습이 자꾸 현실감을 무너트리기 때문입니다. 심할 때는 립스틱을 바른 채 잠을 자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렇게 화장하고 자는 사람이 어디 있어..’라고 구시렁 대면 아내는 그냥 보라고 합니다. 전에는 저도 그런 거 상관없이 드라마에 몰입해서 잘 봤던 거 같은데, 언젠가부터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하기 전 몇 달간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사무실에는 제 또래의 여직원이 있었습니다. 군에서 막 제대한 저는 많이 어설펐는데, 그녀는 일처리도 깔끔했고 자신감 있는 당당한 모습이었습니다. 어느 더운 여름날, 제가 사무실로 복귀하는데 마침 그녀가 세수한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며 사무실에 들어왔습니다. 당황했습니다. 그녀의 눈썹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눈썹만 사라진 게 아니라, 제가 보아온 얼굴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당황해하는 저를 보며 그녀가 말했습니다.‘여자 얼굴은 화장한 얼굴이 진짜 얼굴이에요’왠지 설득당해야 할 것 같은 멋진 말이었습니다.
시뮬라크르에 대한 이야기 쓰려했을 때 떠오른 두 사건입니다. 시뮬라크르는 포스트모던 사조의 주된 논의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뮬라크르는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에 의해 제기된 이론입니다. 그는 1981년 출간한 저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에서 이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했습니다. 시뮬라크르는 원본과 관계없이 독자적인 현실을 구성하는 이미지 또는 기호를 뜻합니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불분명한 현대 사회의 특징을 설명하는 개념이지요.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고, 사람들은 실제보다 이미지를 더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현상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스마트폰 화면과 인터넷 속 수많은 이미지, 영상, 정보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친구의 SNS에는 화려한 여행 사진과 웃음 넘치는 모임 모습만 보이고, 유튜브에는 완벽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브이로그가 쏟아집니다. 뉴스를 켜면 믿기 힘든 자극적인 이야기들이 금세 퍼져 나갑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복사된 이미지가 실제 사물보다 더 진짜처럼 여겨집니다. 보드리야르는 이런 현상을 "하이퍼리얼리티(초현실)"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흐려져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TV나 영화 속 이야기가 우리 현실보다 더 실감 나게 느껴지기도 하고, 사람들이 현실 속 친구보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에 더 마음을 쏟기도 합니다.
이렇듯 현대인의 일상 곳곳에는 시뮬라크르, 즉 현실을 흉내 낸 가짜 이미지나 정보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을 보면 모두가 멋진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늘 행복한 순간만을 살고 있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철저히 편집되고 필터링된 현실의 일부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삶의 하이라이트, 가장 빛나는 순간만 골라 올리기 때문에 마치 모든 날이 휴가처럼 보이는 착시가 생깁니다. 정작 그 이면에는 힘든 일상, 지루한 시간, 누구에게나 있는 고민들이 가려져 있지요.
햄버거 광고를 떠올려봅시다. TV나 메뉴 사진 속 햄버거는 크고 속이 꽉 차 보이며 정말 먹음직스럽습니다. 그러나 막상 가게에서 받아 든 실제 햄버거는 사진과 달리 빵은 찌그러져 있고 속 재료도 광고만큼 풍성하지 않을 때가 많지요. 이렇듯 광고 이미지는 현실의 제품을 똑같이 보여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더 맛있고 커 보이도록 연출된 복제물입니다. 우리 머릿속에는 광고 속 이미지가 먼저 각인되어 기대치가 생기고, 실제 제품을 보면 실망하게 됩니다.
TV 리얼리티 쇼나 유튜브 브이로그는 일견 일상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대부분 각본과 편집을 통해 제작됩니다. 예능 프로그램의 '리얼리티' 코너에서 사람들의 갈등이나 로맨스가 극적으로 펼쳐지지만, 촬영이 끝나면 출연진은 일상으로 돌아가 서로 잘 지내거나 전혀 다른 삶을 살기도 합니다. 시청자는 화면에 비친 상황을 100% 현실로 받아들여 울고 웃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연출이 있습니다. 이런 프로그램을 오래 보다 보면 우리도 모르게 “TV 속 저 삶을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이”여기 게 됩니다.
정치인들에 대한 인식도 일종의 시뮬라크르입니다. 실제로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안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대의제 민주주의 제도 속에서 과연 대중의 권력을 위임받을 만한 능력과 자격이 되는 사람인지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대중은 미디어를 통해서 만들어진 이미지로 정치인들에 대해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잘 연출된 사진 한 장에 대중은 쉽게 열광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일상 벌어지는 일입니다. 사실이 아닌 정치적 음모론에 빠져드는 과정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가짜 뉴스는 실제 현실에 기반하지 않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어디서 봤는데 사실이라더라” 하는 허구의 현실을 만들어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렇게 만들어진 가짜 뉴스가 진짜 사실보다 더 빨리, 더 널리 퍼진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거짓 정보를 진실이라 착각함으로써 현실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잘못된 선택이 공동체를 갈등과 위기로 몰아갑니다.
만들어진, 시뮬라르크와 실제 현실을 구별하는 것, 실제와 모방을 구별하는 능력을 갖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중요한 능력입니다. 가상의 이미지나 왜곡된 정보가 주는 세계는 달콤하고 편안해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상과 실재를 구별하지 못할 때 생기는 문제들은 매우 다양하고 실제적인 어려움으로 나타납니다. 몇 가지 경우만 살펴보겠습니다.
현실에 대한 왜곡된 기대: 반짝이는 가짜 현실만 보다 보면, 정작 실제의 삶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됩니다. 사실로서의 나의 삶이 아니라 왜곡된 삶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되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이 늘 행복하고 완벽해 보이니, 나도 그래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기대를 스스로에게 품게 되죠. 우리가 살아야 하는 현실이란, 늘 이런저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누구나 슬럼프도 있고 실패도 겪습니다. 시뮬라크르에 젖어 지내다 보면 이러한 현실의 당연한 모습들조차 견디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마치 필터 없이 찍은 내 셀카가 남들의 보정 사진과 비교되어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처럼요. 결국 현실에 실망하거나 회피하게 되는 태도가 생길 위험이 있습니다.
사회적 고립과 소통 능력 저하: 인터넷과 게임, 가상현실을 통해 많은 사람과 연결된 듯 보여도 실제 인간관계는 부족할 수 있습니다. 온라인에서는 마음에 안 들면 쉽게 차단하거나 피할 수 있지만, 현실 인간관계는 갈등을 맞닥뜨리고 풀어나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만약 가상 세계에만 머문다면 이러한 사회적 기술을 연마할 기회를 잃게 됩니다. 또한 화면을 통해서만 타인을 대하면 표정, 말투, 분위기 같은 실제 만남에서 느낄 수 있는 미묘한 소통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결국 실제 만남을 부담스러워하거나 사람 관계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커질 수 있습니다. 친구와 채팅으로는 편하게 이야기하다가도 막상 얼굴을 보면 어색해지는 일이 그런 예입니다. 진짜 만남을 피하면 점점 더 현실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장 기회의 상실: 가상 세계에서는 실패도 리셋 버튼 한 번이면 그만이고, 어려운 일은 피하거나 건너뛰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게임 속에서는 건물을 짓다가 잘못 지으면 그냥 부수고 다시 지으면 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직접 무언가를 만들 때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배워야 하고,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죠. 현실의 도전은 때로 고되고 위험부담이 있지만 그만큼 우리에게 새로운 기술과 경험, 성취감을 안겨줍니다. 반면 시뮬라크르 세계에만 머물면 이러한 배움과 성장의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현실에서 부딪혀 얻는 교훈은 없고, 오로지 안전하고 익숙한 것만 반복하게 되니까요. 그 결과 새로운 문제를 만나면 당황하거나 쉽게 포기하는 낮은 회복탄력성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가짜로 꾸며진 편한 세계에만 머무는 것은 우리 마음을 일시적으로 편하게 해 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현실을 더 두렵고 힘들게 만들 뿐입니다. 인터넷 밈 중에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농담이 있었지요. 밖에 나가 봐야 고생만 하고, 차라리 이불속에서 안전하게 있는 편이 낫다는 우스갯소리입니다. 그만큼 이 시대의 현실에서의 삶이 고단하고 때론 힘겹다는 것을 센스 있게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집이나 가상의 공간은 편하고 안전하게 느껴집니다. 실패할 일도 없고, 상처받을 일도 크게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가상의 것이 아닙니다. 마치 자동차 운전 게임의 고수가 된다고 해서 실제로 운전을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지요. 실제로 운전대를 잡게 되면, 게임 속 자동차와 현실의 자동차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곧 느끼게 됩니다. 실제의 운전은 위험하고 버겁습니다. 작은 접촉 사고 하나만으로도 운전을 포기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보고 판단해야 할 조건과 상황들도 게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다양합니다.
이렇듯 현실 세계에서 직접 경험하고 도전하는 과정은 우리를 단단하게 성장시킵니다. 처음엔 사소한 도전이라도, 실제로 부딪혀 보면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법을 배우면서 우리는 한층 성숙해집니다. 현실에서의 경험은 때론 상처를 남길 수도 있지만, 그 상처를 통해 배우고 회복하는 힘(회복탄력성)이 길러집니다. 이는 오직 이불 밖 현실에서만 얻을 수 있는 귀한 선물입니다.
물론 현실 세계는 가상에 비해 불확실하고 위험한 면이 있습니다. 실패할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으며, 마음이 다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삶의 과정입니다. 실패를 해봐야 성공의 감격을 알고, 슬픔을 겪어봐야 기쁨도 더 크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듯 온전한 삶의 스펙트럼을 경험하는 것이 곧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길입니다. 온실 속 화초처럼 보호받기만 하면 강한 꽃을 피울 수 없듯이, 우리 삶도 현실이라는 햇빛과 비바람을 맞아야 비로소 온전히 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삶은 이불 밖 현실에 있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