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이란 일반적으로 의사소통(意思疏通)의 줄임말입니다. 영어로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으로 번역됩니다. 커뮤니케이션의 의미는 ‘정보전달’입니다. 단순한 정보전달만을 의미하는지, 실패한 정보 전달이나 왜곡된 정보의 전달도 포함해야 하는가에 대한 입장은 일치하지 않지만, 어쨌든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말의 근본 의미는 정보전달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사실 소통이라는 말은 전혀 새롭거나 특별한 단어는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소통이 마치 그 자체로 일종의 미덕처럼 여겨집니다. 소통 자체가 모든 문제의 답이고 숭고한 가치이며, 때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근거로까지 이해되는 듯합니다. 특히 소셜 미디어(SNS)의 등장 이후 이런 현상이 가속화되었습니다. 팔로워 수가 많은 인플루언서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이나 소외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중독’이라는 표현을 쓸 만큼 SNS에 과몰입하는 현상도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소통은 어쩌면 더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을 묻게 됩니다. 과연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잘 소통하고 있을까요? 오히려 더 깊은 고립감 속에서 외로운 날들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소통만 하면 모든 갈등이 해결되고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기대, 그것은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거대한 허상입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 허상을 걷어내고 소통의 본질, 특히 합의에 이르기까지의 어려움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데 있습니다. 소통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며, 모든 소통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해서 실패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소통과 합의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진정한 관계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통”이 현대 사회의 주요 주제로 떠오른 가장 직접적인 요인은 단연 기술과 미디어 환경의 혁신적인 변화입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인터넷의 보급은 시공간의 제약을 무너뜨렸고, 뒤이어 등장한 소셜 미디어(SNS)는 개인 간의 연결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과 같은 플랫폼들은 과거 소수에게만 허락되었던 발언권을 모든 개인에게 부여했습니다. 이제 누구나 자신의 생각과 일상을 전 세계와 공유할 수 있게 되었고, 사회적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디지털 광장이 열렸습니다.
하루에도 수십억 개의 의견과 정보가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실시간으로 흐르며,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규모의 대화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러한 디지털 광장은 현실 세계를 움직이는 강력한 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2010년대 초반 ‘아랍의 봄’ 당시,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시민들이 독재 정권에 맞서 시위를 조직하고, 전 세계에 현장의 목소리를 전하는 핵심 통로가 되었습니다. 또한,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고발하는 ‘미투(#Me Too)’ 운동이나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 역시 해시태그(#)를 통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주목받지 못했던 개인들의 목소리를 사회적, 정치적 의제로 끌어올리는 기폭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새로운 가능성이 오늘날의 포스트모던적 요구에 부합했습니다. “합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현대 사조의 요구입니다. 기존의 거대담론이나 절대적 진리를 해체한 후,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평등한 대화와 토론을 통해 새로운 질서나 합의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요구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버넌스(governance, 협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완벽한 정답이 없는 다원화된 시대에, 끝없는 대화를 통해 ‘잠정적인 동의’를 이루려는 그 역동성 자체가 사회를 이끄는 힘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SNS 시대가 펼쳐졌습니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이 신기술의 소통 수단을 통해 더 쉽게 합의에 도달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큰 기대를 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정보 사회는 정말로 소통의 황금기를 가져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소통의 폭발적 증가는 동시에 “왜 소통이 그렇게 어려운가”라는 새로운 고민도 불러일으켰습니다. 분명 더 많이 연결되고 말도 더 많이 주고받는데, 갈등과 오해는 오히려 더 커진 듯한 모습입니다. 돌아보면, 정말 우리가 ‘진정한 소통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가 의문스러워집니다. 결국 우리는 소통에 대해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묻게 되는 것이지요.
‘합의’란 매우 어려운 기술입니다.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포스트모던의 해체와 합의는 모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포스트모던이 주장하는 "해체"가 모든 방패를 뚫는 창이라면, "합의"는 모든 창을 막아내는 방패와 같습니다. 모든 것을 해체하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고정된 의미나 합의 자체를 기대하는 것이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보면 계속 대화하자고 하면서도 영원히 합의에는 이르지 말자는 모순은 필연적입니다.
합의가 어려운 이유들을 세 가지 정도만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첫째로 인간의 언어가 가진 근본적 한계입니다. 인간의 언어를 통한 완전한 소통은 애초에 불가능한 이상에 가깝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동감한다’, ‘마음이 통했다’고 표현하지만, 사실 문학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언어란 우리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이지만, 동시에 모호하고 한계를 가진 기호체계입니다. 같은 말을 듣더라도 사람마다 각각 그리는 의미는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단어라고 할지라도 자라온 환경과 맥락이 다르면 같은 말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지요.
두 번째 오늘날 소통이란 겉도는 수준을 넘어서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서로 간에 진정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 채 끝나버리기가 십상입니다. 모두가 바쁘고 메시지는 넘쳐나는 상황 속에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눌 여유가 없습니다. 회의나 토론같이 소통을 목적으로 한 장소에서 조차 각자 자기 할 말만 하고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조직이나 공적인 영역에서의 소통이란 일종의 형식적인 절차일 뿐 정작 결정권자는 이미 결론을 정해두고 묻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정권자를 앞에 모시고 다양한 의견이 충분히 소통이 되어 한 가지 안으로 수렴이 된다는 것은 허구에 가깝습니다.
세 번째로 인간이 가진 편향과 감정의 장벽도 문제가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필터를 통해 세상을 보고 듣습니다. 내가 믿고 싶은 정보만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무시해 버리는 이른바 ‘확증편향’은 소통을 어렵게 하는 대표적인 심리현상입니다. 누군가의 메시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다음부터는 상대가 어떤 말을 하던 있는 그대로 듣기보다 반박거리만 찾게 됩니다. 말 한마디로 친구가 되기도, 원수가 되기도 하는 것이 인간 소통의 취약점입니다.
인간의 합의가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세 가지로 꼽았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요인들이 우리가 기대하는 건강한 소통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정보의 과부하, 편향된 노출, 익명성에 의한 과격화. 피상적 대화방식 등등 수많은 요인들이 얽혀서 오히려 진정한 소통을 방해하는 역설의 상황을 낳고 말았습니다.
더 나아가 합의가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로, 포스트모던적 태도인 '해체'와 그것이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합의' 사이에는 어쩌면 해결하기 어려운 긴장이 존재합니다. 포스트모던의 '해체' 정신은 모든 기존의 권위와 진리 주장(방패)에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고 균열을 내는 날카로운 창과 같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포스트모던은 절대적 기준이 사라진 자리에서 평등한 대화를 통해 새로운 '합의(공동의 기반)'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해체하는 과정이 과연 견고하고 안정적인 합의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오히려 해체의 칼날은 새롭게 만들어진 합의마저 곧바로 다음 해체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을 의심하기에 영원히 대화해야 한다"는 요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합의해야 한다"는 요구 사이에 딜레마가 있는 셈입니다.
실제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 중에는 합의라는 개념을 경계하고, 대신 끝없는 차이와 논쟁(paralogy)을 옹호한 이들도 있습니다. 모두가 고개 끄덕이는 결론에 도달하는 순간 오히려 다양한 목소리가 사라지는 위험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우리는 소통의 한계를 직시해야 합니다. 소통은 소통일 뿐 정의도 아니고 누가 알아줘야 하는 것도 아닌 것이지요. 말을 잘한다고 해서, ‘댓글’과 ‘좋아요’가 많다고 해서 옳은 것도 아니고 정당성을 갖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의 ‘슬기의 위기’ 또한 결국 우리가 제대로 된 소통 방식을 찾지 못한 결과일지 모릅니다.
인터넷 댓글과 악플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젊은이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 시대의 ‘과장된’ 소통의 의미를 돌아보게 됩니다. 모든 소녀와 소년들이 인터넷상의 왜곡된 ‘소통’에 상처받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소통이란 누군가가 던진 악플이나 팔로워의 숫자 같은 것일 수가 없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소통은 매우 어려운 기술입니다. 차라리 '불통'이나 '의견 불일치'를 자연스러운 정상 상태로, 대화의 기준값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슬기로운 태도일 수 있습니다.
결국 소통이란 일종의 과정(process)입니다. 소통의 궁극적 목적은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고 동감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 못 하더라도 계속 관계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완전한 합의나 감정이입까지는 못 가더라도, 계속해서 이야기 나누는 관계 자체가 소중하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슬기는 소통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통을 포기하지 않는 의지이지 않을까요?
어쩌면 우리의 삶 전체가 더 나은 소통을 수련의 장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제가 지금 훈련하며 이글을 쓰는 이유도 그러합니다. 사실 진정한 소통이란 마음과 서로를 아끼는 마음 그리고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이해라는 고급진 땅 위에만 피울 수 있는 아름다운 꽃과 같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