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삼체>가 영화화되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삼체에 등장하는 외계인의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삼체인들은 ‘3중 태양계’라는 매우 독특하고 혹독한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삼체 행성은 세 개의 태양 주위를 공전합니다. 이로 인해 낮과 밤의 길이가 불규칙적으로 변하고, 계절 변화가 극심하며, 예측 불가능한 기후 변화가 일어납니다. 문명이 발전하다가도 갑작스러운 극한의 추위나 더위로 쇠락하기를 반복하는 곳이지요.
삼체인들은 이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문명을 발전시키고, ‘건조’라는 특수한 기술을 개발합니다. 건조 기술은 삼체인의 생존 방식과 관련된 핵심 기술로, 생명체의 신진대사를 멈추고 수분을 제거하여 일종의 '동면' 상태로 만드는 기술입니다. 마치 말린 오징어처럼 ‘건조’된 삼체인은 외부 환경 변화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수백, 수천 년 동안 장기간 보존될 수 있으며, 다시 안정적인 환경이 오면 물에 담가 '생동(生動)' 상태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는 ‘부활’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소설에서는 단지 글로 묘사되었지만, 영화는 건조되어 미라 같던 삼체인을 물에 넣어 다시 깨우는 장면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삼체>는 삼체행성이 곧 파괴될 것이라는 미래를 예측하고 지구로 침략해 오는 외계인과 그에 대적하는 지구인의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삼체인의 ‘건조화 - 생동화’의 능력은 인간의 언어와 닮아 있습니다. 인간은 대상을 개념화하여 ‘이름’이라는 기호를 부여합니다. 들판에 피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그 어떤 것들을 ‘꽃’이라는 이름으로 기호를 부여합니다. 꽃이라는 기호 자체는 메마르고 ‘건조’합니다. 향기도 색도 생명도 담겨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기호는 문맥 속에서 되살아납니다. 필요한 맥락 가운데 꺼내어 풀어놓으면 그 의미가 풍성하게 다시 되살아나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이제 인간의 언어는 원래의 대상보다 더 많은 의미를 담아 생동합니다. 때때로 원래의 대상(개념)보다 더 많은 의미와 감정(관념)을 담아 생동합니다. 관념이란 개인의 경험 속에서 개념에 더해져 얻게 되는 지식입니다. 같은 단어라 할지라도 더 많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장례식장의 국화는 '애도'를 뜻하지요. 이는 '꽃'이라는 건조된 기호 안에는 원래 없었던 새로운 의미들입니다.
언어의 힘은 놀라워서, 무한의 광활한 우주마저 “우주(Universe)”라는 하나의 단어로 기호화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호화된 “우주”는 단순히 별, 행성, 은하 등 물리적인 천체만을 가리키는 것을 넘어, 시간, 공간, 물질, 에너지, 나아가 인간의 의식과 생각, 감정, 문화 등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존재를 포괄하는 거대한 개념이 됩니다. 언어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감각적 한계를 넘어 우주 너머까지도 사유하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노자(老子)는 이러한 인식을 이미 오래전에 갖고 있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은 유명한 첫 구절,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으로 시작합니다.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도(道)는 영원한 도가 아니며, 이름 지어 부를 수 있는 이름(名)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라는 이 문구는, 우리가 언어를 통해 파악하고 규정하는 원리, 법칙, 지식 체계, 현상들이 그 자체의 진실과는 다를 수 있음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즉, 언어라는 기호가 현실을 담아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건조화'의 한계와, 그것이 다시 '생동화'될 때의 가변성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20세기 철학의 주된 관심이 언어로 집중된 것은 이러한 근대의 형이상학, 특히 헤겔(Hegel)로 대표되는 관념론 철학의 거대하고 때로는 모호한 언어 사용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인간의 언어가 진리의 수단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심이었던 것이지요. 철학자들은 세계의 궁극적 실재나 인간 정신의 구조를 직접 탐구하기보다,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하며 소통하는 핵심 도구인 '언어' 자체를 분석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초기 분석철학이 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밝혀 철학적 문제를 명료화하거나 제거하려 했다면, 이후 철학은 언어가 실제 삶의 맥락 속에서 어떻게 의미를 생성하고 행위를 수행하며, 때로는 얼마나 불안정하고 다의적인지를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파고든 대표적인 예가 데리다, 오스틴, 비트겐슈타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데리다(Derrida)의 해체(Deconstruction) / 언어는 고정된 뜻을 담고 있지 않고, 상황이나 독자에 따라 의미가 계속 미끄러진다고 봅니다. 한 단어가 ‘굳어 버린 관념’으로 머무를 수도 있지만, 다른 해석이나 맥락을 만나면 다시 새로운 뜻으로 깨어난다는 것이지요.
오스틴(Austin)의 수행성(Performativity) /“나는 너와 결혼합니다” 같은 말이 실제로 결혼이라는 사건을 만들어 내듯, 언어는 말해지는 순간 행위가 됩니다. 가만히 말라 있던(건조화된) 단어도, 누가 실제로 “그 말”을 하면서 특정 맥락에서 쓰면,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언어 게임 / 단어의 의미는 ‘어떻게 쓰이는지(Use)’에 달려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컨대 “어머니”라는 말은 사전에 쓰여 있는 뜻뿐 아니라, 상황과 사람마다 전혀 다른 느낌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그 단어가 실제 대화나 행동(언어 게임)에 참여해야 ‘살아 있는 의미’가 생기게 됩니다.
생동화된 언어는 때로 왜곡되고 갈등을 낳기도 합니다. 오래되고 많이 사용되는 단어일수록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최민식 주연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 등장하는 ‘좋아한다’는 대사는 충격적입니다.
사이코패스 악인으로 등장하는 영화 속 주인공 장경철이 여학생을 대상으로 범죄를 하려는 순간의 대사입니다. “근데.. 야이 X발 내가 너 좋아하면 안 되냐? 내가 너 좋아하면 안 되냐? 내가 너 좋아할 수도 있잖아?” ‘좋아한다’는 ‘기호’에 구역감이 몰려올 지경입니다. 김지운 감독이 의도를 했든 안 했든, 언어로서의 기호가 어떻게 작동하는 지를 보여주는 ‘어떤 의미에서는’ 최고의 명장면입니다.
이는 인간의 대화가 어떤 한계를 가졌는지, 왜 우리가 늘 진정한 소통을 갈망하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장경철의 말은 말의 모양새이지만 그냥 지르는 괴성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인간의 언어가 아닌 짐승의 으르렁댐입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사람들 속에 살아가지만, 그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아닌 <악>인 것이지요.
오래된 히브리 서사 가운데 등장하는 바벨탑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신에 이르기 위해 높은 탑을 쌓던 인류는 심판을 받습니다. 언어가 혼란스러워지는 징벌을 받게 되었고, 바벨탑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언어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하지만 바벨의 심판이란 어쩌면 서로 다른 언어 사용하게 되는 심판이 아니라,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뜻이 통하지 않는 징계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슬기인간은 높은 지식의 탑을 세웠습니다. 지금 그 탑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가 흔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