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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민 Feb 25. 2024

런던에는 사물노래가 없다.

240219

 한동안 열심히 바쁜척하며 지내다가 오랜만의 휴무일이 되었다. 빨래를 돌리고, 전자레인지에 점심밥도 돌리고, '빙빙 돌아가는 회전목마처럼...' 콧노래를 부르며 한껏 게으르게 지냈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런던에서 산지 4년이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 도시는 확실하게 결여되어 있다. 전자레인지와 세탁기의 종료 소리, 지하철의 도착 소리, 전화통화의 연결 소리.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던 그 가락들이, 여기엔 없다.




 지멘스, 베코, 보쉬. 런던에 이사 온 후, 나는 발음하기 어려운 기업들의 가전제품을 써왔다. 이들은 노래하지 않는다. 예전 집에서 쓰던 밥솥처럼 친절하게 말해주지도 않는다. 전자레인지는 벨소리, 오븐은 짧은 경고음 다섯 번, 세탁기는 긴 경고음 세 번, 식기세척기는 가장 긴 경고음 한 번.


 다음날 출근해서 그렉과 인사를 나누고 나서 따지듯이 물었다. 왜 이 나라의 가전제품은 노래하지 않는가. 그렉은 그것이 중요하냐 물었다.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경고음은 담백해서 좋지만, 낭만이 없다.



런던에 이사와서 처음 살았던 아파트. 침대, 빨랫대, 책상을 놓으면 방이 꽉 차곤 했다.

 영국에선 처음으로 헌혈의 집을 찾았다. 어려운 단어들이 빽빽한 문진표 작성과 간단한 채혈 이후, 커다란 바늘이 보였다. 눈을 질끈 감고 다른 생각을 하다 보니 맥주 한 잔 정도를 채웠다. 짧은 경고음이 울렸다. 송어도, 호두까기 인형도, 볼레로도 아니었다. '삑- 삑- 삑-' 여기에도 낭만은 없었다. 초콜릿과 과자를 받은 것은 좋았지만, 내가 기대하던 수준의 팡파레에 비해 생동감이 부족했다.


 저녁으로는 역시 케일을 먹어야 했다. 케일은 확실히, 맥동하는 야채라는 느낌이니까. 3번째로 간 슈퍼에서 겨우 케일을 찾을 수 있었고, 또 하나의 무서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이슬란드, 테스코, 모리슨. 이들은 노래하지 않는다. 이 도시의 슈퍼마켓에서 나오는 노래들은 최신 음악들 뿐이었다.


 한국에서 영국으로 이사한 후 가장 다른 점은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질문에 "대체로 비슷한데, 언어가 다른 부분이 크다."라고 두리뭉실하게 대답하곤 했지만, 이제는 나도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이 나라의 가전제품, 슈퍼마켓, 기차역은 노래하지 않는다. 이건 확실히 거대한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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