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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준경 Aug 29. 2024

딥페이크 성착취물에 대한 메모

딥페이크 성착취물 보도를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공들여 글을 완성하는 일을 개인적인 이유로 최근에는 쉬고 있기에, 브런치스토리에 떠오르는 생각들 정도만 메모로 남겨둔다.


1. 딥페이크 성착취물은 왜 충격인가?


사안 자체가 충격인데, 왜 충격이냐니? 모두가 뉴스에서 충격적이라고 하잖아. 다들 충격 먹을 정도로 사안이 심각해!! 당연하지, 나도 충격인걸!!


그런데 시간을 돌려서 뒤로 가본다고 해보자, 예를 들어 당신이 2017년으로 가는 타임머신을 발명했다고 하자. 그런데 이 타임머신은 한계가 있다. 시간 여행을 하면 당신은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다. 오로지 대화만 할 수 있기에 컴퓨터에 비트코인을 사라, 아니면 주식을 사라는 명령을 내릴 수 없다고 치자.


그래서 당신의 가족에게 찾아간다고 한다. 나는 부모님에게 갈 것이다. 부모님에게 가서, 나는 미래에서 왔다고 알리고 먼저 엔비디아의 주식을 사라고 한다. 부모님은 묻는다.


"와 엔비디 뭐시기라는 회사를 사라는 긴데?"

"미래에는 AI라는 기술이 뜰 거에요. AI 기술이 뜨면 엔비디아라는 회사가 뜰 거에요. 지금은 게임용 반도체를 만드는 회사인데요, 그 반도체가 AI기술의 핵심 기술이 되어버리거든요."

"니, 그거, 어디서 들었노? 친구한테 이상한 정보 듣고 주식 사는 거 아이다. 참말로, 내가 투자 관련한 강의를 해줘야 것구만."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미래에서 왔다니까요. 미래에는 AI라는 기술이 뜬다고요."

"안다, 니 그 이세돌이 이긴 알파고 보고 이야기하는거제? 아따, 나도 뉴스 열심히 본다. 이상한 소리 말고 가서 니 할 일이나 열심히 해라."

"아니, 진짜 어떤 정도냐 하면은, 일반인이 AI 기술을 통해 합성을 해서 그걸 포르노 영상으로 만들어서 공유한다고요."

"아, 당연히 AI기술이 발전하면 성적 범죄 도구로도 쓰이것지, 이 사람아. 비디오가 발명되면 에로 영화가 발명되고, 인터넷 기술이 발전하면서 성인물도 보고, 그런 게 사람 사는 세상인데. 네 오데 부모를 속이려고 당연히 일어날 일을 미래에 직접 보고 온 것처럼 말하노? 가서 공부나 열심히 해라."



그리고 다시 2024로 돌아왔다. 당신은 벼락부자를 꿈꾸고 부모님이 엔비디아 주식을 사놓으셨기를 바랐지만, 당신이 여전히 빈털터리다.


2. 그럼 왜 충격인 것인가?(1)


성인들은 이렇게 너무나도 쉽게 청소년과 대학생들이 광범위하게 불법적인 행동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놀란 듯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놀라울 것도 없다. 신기술을 활용해 청소년들이 광범위하게 접근하는 일은 너무나도 예전부터 있었다.


내가 12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신문 오려서 발표하기 조별 그룹 과제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난다. 어떤 여자 아이가 성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기사로 스크랩해왔다. 청소년들이 너무 쉽게 성인물에 접근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걸 어떻게 검색을 하면 손쉽게 성인물에 접근할 수 있으며, 청소년,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도 너무 쉽게 검색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그것을 기사라고 썼다는 데에 놀랐다. 아니, 나도 아는 방법을 기사라고 쓰다니...


독자들은 의아하실 수 있겠으나, 솔직히 내 생각은 그랬다. 최근에 다시 공개한 에세이 글에도 밝힌 바 있지만 거의 대학원 들어가기 전까지 내 사고관을 지배했던 것은 '나'와 '그들'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또래무리들, '그들'에 늘 속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전의 글들은 취업을 준비하던 시기에는 일반인 코스프레를 위해 써두었으나, 가족들에게까지도 전업 작가를 위해 힘쓰겠다고 밝힌 지금은 굳이 숨길 이유가 없어서...)


'나'도 혼자 알아낸 방법인데, 맨날 어울려 다니며 성적인 농담들도 많이 주고받는 '그들'은 더욱 많이 알고 있겠지. 그런데 그게 신기한 거야?


사실 그렇다. 우리는 청소년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청소년 상에다가만 청소년을 가두어두길 바란다. '어른들은 몰라요'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왓챠피디아에 있는 평들을 보았다. 악평이 가득했다. 그러나 청소년들 사이에서 또래 무리에 어울리고 싶다는 강박이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그 안에서 잘나가고 싶다는 욕구가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얼마나 성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지, 그리고 그러한 기회가 박탈된 사람들은 외로워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 어른들은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을 악용하는 또래의 무리가 있다는 사실도. 그래서 거기에 추천수를 가장 많이 받은 평 중 하나는 이 영화에서 봐줄만한 유일한 장면은 이 영화의 감독 겸 배우가 맞는 장면이었다는 평이었다.


나는 언제나 없으면서 있는 척 폼 잡는 인간들이 싫다. 그런 인간들을 모아놓은 어플이란, 에휴. AI기반으로 영화 추천한다길래 열심히 영화 별점 매겨놓은 내가 바보지. ㅋㅋㅋㅋㅋㅋ. 또 이 영화가 해외영화제에서 상 받았다고 언론 기사에 뜨면 영화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을 사람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언급한 그 평은 비추천이 가장 많은 평이 될듯....


어쨌든 어른들은 모른다. 청소년을 특정한 범주 안에 넣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모여서 그들만의 질서를 만들어내도록 하는 학급 구조, 즉, 반이라는 개념은 그들이 그들의 세계에서 살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들은 만약에 수렵채집기였다면 이미 생식 활동을 했었을 시기를 향해 가고 있거나, 아니면 정상적으로 이미 둘쨰를 낳았을 시점까지 되어있다.


그렇기에 그들이 만들어낸 그들의 질서에는 성적인 대화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굉장히 거친 방식으로 그러한 성이 표현된다. 어디까지나 부모님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그렇기에 어른들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성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하도록 막혀 있다. 인간이라는 종이 설계된 시기에는 분명히 왕성한 생식 활동이 벌려져야 했을 때인데.


범죄자의 심리를 설명하는 논리 중에 하나에 이런 게 있다고 한다. 원하는 게 있고, 그것을 정상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고 느껴질 때에 특정한 사람들은 범죄를 저질러서 원하는 걸 얻게 된다고.


사실 청소년이 정상적으로 성적인 접촉을 성취할 수 있는 수단은 별로 없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청소년 간의 이성교제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를 학교에서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토론하게 시켰다. 아니, 근데, 그걸 왜 니들이 보는 앞에서 니들 감독 하에 토론해야 하는데? ㅋㅋㅋㅋㅋ. 나는 알아서 할 일이라고 적어냈다가 한 소리 들었다. 입장을 정하라고.


생각해보면 그런 것 같다. 나는 원하면서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모님에게 청소년 때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


청소년이 이성과 관계를 성적인 접촉을 맺어서는 안 된다는 발상 자체가 사실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을 어른들이 금지시키면 어른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더 이상한 행동을 많이 한다. 그것도 어른들이 잘 사용하지 못하는 신기술까지 활용해가며.



3. 왜 충격인가? (2)


학생회장일 때에 과 동기가 선배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했지만, 당사자가 나의 개입을 원하지 않았기에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선배랑 나랑 어느 술 자리에선가 만난 적이 있었는데, 분명히 나랑 같은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다른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탔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버스가 하필이면 내 동기의 집 방향으로 가는 버스였다. 그래서 내가 동기에게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동기는 말했다. 자신이 분명히 말을 했으니까 다시는 안 그럴 거라고.


술을 한 잔했던 터라, 평소 같으면 친구에게는 차마하지 않았을 말까지 해버렸다. 한국 남자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일본어가 뭔질 아냐고. '야마테'라고. '야마테'가 무슨 뜻인지 아냐고. 그만하라는 뜻이라고.


그랬더니 동기는 짜증을 냈다. 니들 남자들은 왜 그러냐? 낸들 아냐, 어떻게 하다가 처음 본 성적 접촉이 그런 형태인건데....


남사스럽고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성인물을 아직 본다. 연인이 없을 때에는 그것을 보며 성적인 욕구를 달랜다. 끊어보려고도 했지만, 처음 성이란 것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때에 욕구를 해소했던 것이 성인물을 통해서였기에, 성인물 없이 성적인 욕구를 달래는 게 안 되더라.


양심적으로 성착취물은 보고 싶지 않기에 한국인들이 나오는 영상은 보지 않는다. 그럼 선택지는 일본이냐, 미국이냐다. 그런데 사실 인종이 다른 경우는 나의 경우에 보고 싶지 않게 되는 것이 많다. 나의 경우는 그것은 육체적인 컴플렉스 때문인 경향이 강하다. 다른 남자들의 선택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렇다면 남게 되는 선택지, 일본. 어떤 글에서 그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성인물을 보면 동양의 경우는 "속물"적이고, 서양의 경우는 "동물"적이라고.


그 말이 어느 정도 맞다고 생각한다. 서양은 남들의 시선에서 가장 자유로운 듯한 절정의 행위를 가장 좋은 상품성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반면에, 동양의 경우는 상하의 관계 속에서 하가 착취당하거나 아니면 봉사하는 듯한 행위를 가장 좋은 상품성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현실의 성적인 관계보다, 포르노 판타지 속의 성적인 관계에 더 익숙할 수밖에 없는 청소년에게는 이와 같은 정서적 잔상들이 머릿속에서 남는다. 


"성 -> 착취하거나 봉사받거나"


그리고 신기술이 발명되면서 법적인 규제를 피해서 그것을 동영상으로나마 실현시킬 방법까지도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의 성인물 사업 규제는 오히려 음성화를 부추기기도 하며, 그것은 이웃나라의 좋지 못한 성적 판타지가 수입되어지게 만든다. 미투 운동이 벌어지지 못하는 유일한 선진국의 졸렬한 형태의 성적 판타지를.



4. 개인이 없는 나라의 비극이기도 하지 않을까?


사실 이 이야기를 가장 해보고 싶었다. 서울대 N번방 사건으로 이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 최초 보도자는 분명 그 사건의 주도자가 졸업하고도 한참 오래 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한 성인은 왜 생겨나는 걸까?


한국은 예술이 없는 나라다. 무슨 문화강국이네 뭐네, 말하지만, 솔직히 속빈 강정의 문화만 있다. 힙해보이는 외형을 갖추는 데에는 탁월하지만. 그 이상으로 개인이라는 정신은 없는 예술이다.


솔직히 현실이 그렇다. 대중문화 산업은 강국인데, 그것을 위해 바이럴 업체를 넘어 역바이럴 업체가 있다는 말까지도 떠돈다. 왜냐, 집단이 힙하다 멋있다고 말하면 힙한 것이 될 수 있고, 집단이 멋없다고 말하면 멋없는 것이 된다. 신기한 나라다, 참.


다른 건 몰라도 밀란 쿤데라가 문학이 무엇인지를 말하며 문학의 시초를 세르반테스로 잡은 것에는 동의하는 편이다. 문학,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문학은 근대문학으로 한정된다, 문학이 담아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개인이 홀로 마주하는 세계이다. 개인이 홀로 마주하며 감내해야 하는 세계이며, 그것을 하는 여정이다. 그렇기에 나는 어릴 때 어린이판으로밖에 읽지 않은 돈키호테가 문학의 시초라는 것에는 동의할 수 있다.


한국은 개인이 개인으로 세상을 마주하기 참 어려운 나라다. 나 같은 무명인이 쓴 이렇게 긴 글을 여기까지 읽고 계신 분이라면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김덕영 교수의 환원근대 책을 좋아한다. 한국의 근대는 비동시성의 동시성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다.


그것은 경제적 근대로 환원시킨 근대화다. 그리고 문화는 전통적 문화를 담는다. 오히려 전통이 근대화를 지탱한다. 그래서 새마을 운동도 서양의 근대적 행위들에서 시초를 찾지 않고 두레나 향약에서 행위의 근거를 찾는다.


이렇게 된 데에는 다른 게 없다. 안타깝게도 근대화를 기획한 박정희 대통령이 근대가 모르는 양반이었다. 일본까지 가서 유학한 게 사관학교인데 뭐.... 문화적 근대를 알았을 리 있나?.... 일본은 지식인이 힘이 없다. 군인이 힘이 있다. 그래서 모든 걸 계급으로 나누는 게 우위에 있다.


그리고 그 일본식 근대가 동양식 근대의 원형이 되었으니, 동양의 나라들이 다 요 모양 요 꼴로 개인이 없는 나라들이 되었다. 그리고 창의성이 필요한 시점에 항상 뒤떨어지는 나라들이 된다.


이 동아시아 땅에서 인정받는 창의성이란 증빙될 수 있는 창의성이다. 아니, 없는 걸 만드는 게 창의성인데 어떻게 그걸 증명해요?..... 공모전이요? 자격증이요? 아니 그딴 게 창의성의 기준이 된다고요....?....?....? 이미 정해진 틀 속에서 사고해서 성공한 심사위원들이 어떻게 새로움을 판단하죠....?....?....?


모른다. 웃기는 나라다. 대학 학점도 교수 의견에 얼마나 부합하게 적어내느냐다. 나 같은 괴짜는 교수와 싸우자는 심보로 교수가 싫어할만한 발표, 교수가 싫어할만한 답안지를 척척 냈다. 아니, 척척 낸 게 아니라 타협을 잘 못하겠더라. 그랬더니 졸업할 때 같이 졸업식에 온 양반들을 둘러보니 내가 학점이 꼴찌였다. (소수 인원의 학과였기에 이미 학점을 어느 정도 아는 상태였다.) 그런데 우리 학과에서 성적 잘 나왔던 열정 넘치던 사람들이 도전했던 서울대 인류학과 입학에 나만 성공했다. 심지어 면접 때 지금은 지도교수가 된 분이 질문하신 "인류학과 사회학과 민속학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말에 대한 대답을 그럴싸하게 말해버려 그 자리에 계시던 교수들의 모든 이목을 끌었고, 지도 교수님은 첫 학기에 면접 시험 때만 본 나를 조교로 채택하기도 하였다. 뭐.... 대학원에서 잘 했냐는 별개의 문제다.


그런데 참 웃기다. 학점을 그렇게 못받았는데도 학점을 잘 받은 이보다 대학원에 잘 진학을 했고, 심지어 학부 때 지도교수님께 메일을 드린 적이 있는데, 그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지도해본 학생 중에 가장 탁월한 학생"이었다고.... 그러면 C+을 주시면 안 되는 거 아니였나요??...... 참고로 그 분은 많은 수업을 함께 했으나 나에게 단 한 번도 A+을 주신 적이 없다..... (1학년 2학기 때 B+ 맞았더니 동기 왈 "경한이는 교수님의 개였는데" ㅋㅋㅋㅋㅋㅋ)


어쨌건 그렇게 졸업하면 남들보기에 있어보이는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나는 그걸 피해보고자 대학원에 갔으나.... 저출산고령화 사회에서 정규직 교수로 살아남는 행운이 나에게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서 더 진학하기를 포기했다. 이미 경험해봤다. 많은 경우, 대학은 경영학TO를 줄이기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소수학과 자체를 없애버린다.


그리고 나온 사회, 어떻게해서든 회사에서 자리를 잡아야지. 그런데 자기소개서는 개인이 소개되어서는 안 되는 신비한 방식의 소개서였다. 소설의 창작보다도 고통스러웠다. 내가 하기 싫은 없는 게 있는 척하는 기술서를 내가 어떻게 작성한단 말인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없는 게 있는 척하는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능력을 쌓기 위해 실제로 쌓을 수 있는 능력들을 쌓을 시간은 버린다. 개인적인 것의 축적을 포기한 사회다.



5. 전체주의적 개발독재 후에 찾아온 것은 프랑스적 포스트모던의 남발 (개인 없는 사회에 붙여)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프랑스적 포스트모던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게 들기도 한다.


사실 한 분야의 대가는 사안의 여러 측면을 모두 생각해본 후에 그에 관련해서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 글을 쓰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이 없는 글은 한철 장사로 끝나기 마련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다. 한때 서점에서 한병철 붐이 불었지만, 한병철 붐은 일시적이었다. 이제는 한병철 아저씨가 책을 내도 서점의 정중앙에 위치하지 못한다.


한병철에 대하여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은 이런 종류다. 동물을 조련하는 방식은 당근과 채찍이다. 그런데 채찍을 맞는 것이 일상화되면 어느 순간에선가 동물은 채찍에 너무 적응해버려서 채찍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근대 사회도 매한가지다. 근대화 초창기나 폭력을 통한 근대 사회의 작동이 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면 불행한 일이 닥친다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각각의 물건에는 소유권자가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할 권리는 소유권자에게 있다는 논리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사실 계속 당근과 채찍이 있는데, 사람들 눈에는 당근만 보이는 거다. 사실 채찍은 점점 더 강해져서 몸이 힘들어미칠 지경이어도, 당근을 보고 달린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2010년대~2020년대 사회의 모습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병철은 그걸 보고 당근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말하는 거다.


사실 포스트모던이란 것도 그렇게 파편적인 지식이 남발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 읽기도 너무 어렵게 만들어놓은 괴랄한 프랑스 서적에 담겨있기에, 파편적으로만 알고 교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만 발췌해서 이해하고 나머지는 쇠귀에 경 읽기 식으로 읽어도 아는 척 하는데 지장 없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지도교수가 선호한 관계로 나는 관심도 없던 들뢰즈를 논문에 넣어야 할 것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한참을 들뢰즈라는 것을 넣고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런데 솔직히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발표를 해야 했다. 그런데 발표를 마치고 난 후에 어떤 박사 분이 나의 발표를 칭찬하는 줌 메시지를 보내셨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 분이 당시 맡으셨던 직책 상, 학과에 오래 얼굴을 내비치지 않던 내가 드디어 졸업 논문을 준비한다는 것에서 격려의 의미로 보내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때 당시는 들었던 생각이, 아니, 내가 무슨 말인지 모르는 발표를 했는데 칭찬받고 있는 이 상황이 맡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대적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세미나를 학교에서 한 적이 있었다. 교수들도 좋아라하고, 이론적으로 박식하다는 학생이 한 명 끼어있었다. 한참동안 부르디외의 개념에 대해서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당시 문학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던 나는 그렇게 말했다. 말씀하신 문화자본, 문화산업이라는 뷰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사실 권위에 의한 거품이 많이 끼어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좋아한다. 그런데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진짜 악평이 많은 웹소설이랑 비교하라고 하면, 나는 채식주의자가 더 명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어떠한 다른 이들의 평가 요소를 전혀 반영하지 않는다고 쳐도 나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느낀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말을 했다. 그랬더니, 본인도 최고의 소설은 마르셀 푸르스트의 시간 뭐시기 (뭐, 그 유명하다는 소설인데, 김연수 소설가도 다 못 읽고, 계획을 세워서 조금씩 나눠 읽어도 포기했다고 '소설가의 일' 초장부에 밝힌 그 소설 있지 않습니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게 부르디외가 좋아하는 소설이라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부르디외는 마르셀 푸르스트가 최고의 소설가로 쳤다는 말도 했다. 그러다가 뭐, 이론적인 공백은 있는 것이라는 말로 덮었던 것 같다.

(선배 이론가가 못 채운 걸 채워내야 하는 게 신진연구자의 과제 아니었나.....? 대학원생은 어떻게 그 과제를 맞이할 준비를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지....)


한국 지성계는 이런 종류의 포스트모던이 넘쳐흐른다. 파편적이기 그지 없는 포스트모던. 자신도 잘 모르는 때도 많은 것 같다. 그러나 프랑스식 포스트모던의 가장 대가인 미셸 푸코는 분명히 개인의 힘을 믿었던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편인 것 같다. 내가 졸업논문에서 인용한 그의 책은 주체의 해석학. 최근에 점점 핫해지고 있는 콜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 중에 하나인데, 어째서인지 그 강의록은 주목받지 못하는 듯하고 90년대에 주목받았는지 2000년대 초반에 주목받았는지, 아니면 주목은 안 받았는데 번역가가 쓰고 번역해보고 싶었던 것인지.... 그때쯤 나온 그 책은 절판된 채 구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주체의 해석학에서 분명히 푸코는 개인에 주목한다. 그리고 온전히 개인이 자기자신을 돌보고 바라보기를 계속적으로 요구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소비되는 푸코는 개인의 무력함을 호소하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젠장, 지들이 개인으로 홀로 설 용기 없으니까 푸코를 소비하는 거겠지. 한국 사회에 프랑스식 포스트모던 담론이 계속 흘러넘치는 데에는 미국 학계의 분위기 뿐만 아니라, 이러한 지식 소비자들의 행태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편인 것 같다.


그런데 난 사람들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나도 개인으로 홀로서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인으로 홀로 서기 어려운 이 분위기가, 문제인 것이 아닐까?



6. 개인의 성숙성을 길러야 할 앞으로의 시대


그런데 이게 딥페이크 성착취물이랑 무슨 상관인데 이렇게 길게 글을 쓰고 앉아있냐고?


사실 그마만큼 한국 사회에서 개인이 홀로서서 성숙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사회라고 생각하는 편이라서 그런 것 같다.


근대세계가 탄생된 이후에는 과학기술이 계속 개인에게 힘을 부여하는 형식으로 세상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의 정점에 이르는 지점이 AI가 아닐까 생각하는 편이다.


내가 왜 윤석열 대통령을 싫어하고 문재인 대통령을 미워하느냐? 바로 박수받기만 좋아하고 개인이 한 일에 대해 책임 지기는 싫어하는 한심한 작태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한심한 작태를 유지하면서 큰 힘을 가지려고 했고, 큰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박수받기만 좋아하고 개인이 한 일에 대해서 책임지기 싫어하는 한심한 작태로 개인들이 남아, AI 기술을 맞이한다면 그것은 파국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분명히 2차 세계대전만큼의 파국이나 혼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게 뭐냐고 묻는다면, 세계대전은 아닐 것 같다고만 말할 뿐이다. 파국이나 혼란은 예측하지 못하기에 두려운 것이다. 그런 걸 예측하고 앉아있으면 내가 돗자리 깔고 앉아서 돈방석을 만들었겠죠.


다만, 예술가를 꿈꾸는 자로써 무엇이 바뀌어야 하냐고 말해야 하냐면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한국의 예술관은 변화해야 한다. 한국의 예술관은 개인이 부재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근대적이지 않다. 사람들이 본받을만한 어떤 교훈을 전달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는 측면에서 근대적이기보다는 공자적이다. 그러나 공자의 시대와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고 있음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안 된다.


예술에서 왜 표현이 잔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예술에서 왜 표현이 외설적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예술에서 왜 표현이 과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예술에서 왜 사회적인 의미를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왜 신형철 씨처럼 예술이 윤리적이여야만 한다는 어떠한 사고관에 사로잡혀 있는가? 예술이 남을 이해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다. 예술은 그냥 작가에게는 작가 개인을 위한 것이고, 수용자에게는 수용자 개인을 위한 것이다. 그 이상이여서도 안 되고, 그 이하(개인의 파편적인 어떤 한 욕망에 관한 것)이여서도 안 된다.


나랑 생각 다르면, 설득할 생각까지는 아직 없고.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의 추천영화는?


작가미상(2018) (뭐지... 난 2020년쯤에 영화관에서 본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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