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재 박사의 <과학의 자리>에 대한 독서토론 후기
[오늘과 함께하는 현재학]은 사적 경험인 '오늘'과 공적 논의의 무대인 '현재'가 함께 이어졌으면 하는 취지에서 기획한 콘텐츠입니다. 공적 논의의 중심이 평범한 사람들의 사적 경험으로 이동되었으면 하는 소망에서 시리즈를 기획하였습니다. 현재를 다룬 책에 대해 독서 토론을 하며 서로가 느끼는 오늘을 함께 공유한 경험을 정리하며 글을 썼습니다. 2024년 7월에 쓴 글을 이곳에 옮깁니다.
박정희 체제와 '과학의 자리'의 부재
한국의 경제가 성장한 여러 요인을 보지 않고, 박정희 개인의 리더십만을 강조하는 것은 박정희 씨 개인이 독재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논리이다. 실제로, 한국이 지정학적인 위치 속에서 받은 미국의 원조, 동양적 사고에서 이미 만들어진 국가공동체 의식과 중앙권력에 대한 인정, 그리고 국민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잘 살고싶어했던 마음, 그리고 그전에 이미 끝내놓은 토지개혁으로 없어진 지주계급의 기득권, 지나간 이승만 정부의 기초 교육에 대한 투자까지 많은 요소가 한국의 경제 성장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그래도 박정희 개인이 독재자라 하더라도 나는 그를 이북의 독재자들과 동급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유는 그래도 그의 행정부가 여러 시스템을 당시 당면한 과제에 나름대로 알맞은 체제로 만들어서 경제 발전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개인의 영광을 위해 국가 전체의 시스템을 경제 발전과 보편인권에 해가 되는 체제를 만들어놓은 북한의 독재자들과는 질이 다르다.
그러나 하나 확실히 해야 하는 것은 박정희 정부가 아무리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 당시 국가가 당면한 과제를 해결할 시스템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개발도상국에 맞는 목표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론사회학자 김덕영 박사는 박정희 정부가 만든 시스템을 ‘환원근대’라고 비판했다. 한국의 근대화는 국가와 소수의 특혜받는 기업인 재벌이 동맹을 맺고 진행하였으며, 경제적 근대화를 근대의 표본으로 삼았다. 그리고 경제적 근대화의 효율적 진행을 위해 사회적 근대화나 문화적 근대화는 오히려 막아버리는 전략을 취했다. 근대의 핵심은 분화와 개인화이지만, 가치의 영역과 문화의 영역에는 전통적 가치가 강조되었다. 그리고 경제적 요소만 분화와 개인화가 강조되었다. 김덕영 박사는 실제로 박정희 씨 개인은 ‘근대’라는 게 실질적으로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서구의 물건들과 생산시스템만 보고 ‘조국근대화’를 내세웠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공부하다 보면, 아직까지도 한국은 환원근대와 전통적 가치 추구에서 못 벗어났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 풋잠에서 토론했던 김우재 박사가 써낸 ‘과학의 자리’라는 저서는 이러한 한국 근대성의 한계가 단순히 사회적 영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이나 공학 영역에도 만연해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한국에 진보적 과학자의 부재가 가져온 결과는?
김우재 박사는 버널의 사분면을 그려서 현재의 한국 지식인 사회를 그려본다. x축은 진보와 보수이다. 그리고 y축은 과학과 인문학이다. 보수적인 과학 집단은 정치과학자, 보수적인 인문학 집단은 뉴라이트, 진보적인 인문학 집단은 인문 좌파라고 불린다. 그러나 진보적인 과학 집단은 명명할 방법도 없고, 그 집단에 속할만한 사람이 누구인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시인, 소설가, 미학자 등이 진보 영역에 빼곡하지만, 진보적인 견해를 강력히 주장하는 과학자가 잘 생각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김우재 박사는 이 현상이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이며, 과학적 진보 지식인이 리처드 르윈틴, 존 벡위드, 스티븐 제이 굴드 등이 그런 전통에 서 있는 과학자라고 말한다.
발제자분은 현대 사회에서 진보적인 과학자의 자리 이외에 지나치게 주목받거나, 지나치게 주목받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분야가 무엇인지를 물어보았다. 나는 인문 좌파 집단에 속한 사람으로써 느끼게 되는 공허한 자리 같은 것을 말하게 되었다. 한국은 지나치게 두 종류의 인문학자, 혹은 사회과학자만이 존중을 받는다.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트 두 집단을 대립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와 지나치게 상대주의적 관점에 몰두하여 근대적 사고의 결과들을 너무 많이 부정하는 경향이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한국의 인문 좌파에게 존중받는 두 가지이다. 그리고 그 두 가지 경향의 연구 성과가 적지 않음을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막상 정신질환을 심하게 앓았고, 실제 ADHD로 내 인생에 많은 영향이 있었던 사람으로서 푸코가 근대 정신의학에 대해 비판하는 논지나 의료인류학자들이 ADHD의 의료화를 비판하는 글을 읽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당신들이 하는 연구의 방향이 옳을 수는 있어도, 나에게 해줄 수 있는 대안이 무엇이냐, 라는 생각에서 기분이 묘하게 나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근대성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하지만, 정작 정신의학의 영향권 안에 있는 나에게는 아무런 실익 없는 비판인 것 같아서 듣다보면 기분이 좋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또한, 자본주의의 발달사를 보면, 자본가의 노동자 착취가 심화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으로 인하여 자본주의는 무너지게 되리라는 마르크스의 예측 자체가 기술 혁신의 국면이 나타날 때마다 틀렸음에도 계속 마르크스의 말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논의를 이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마르크스주의를 사회과학의 중요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마르크스의 분석틀이 사회과학 이론에 많은 공헌을 했기 때문이지,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편식 자체는 본 책에서 김우창 박사가 지적하듯이 지나치게 한국의 좌파들이 서구 근대 과학의 논의와 그로 인한 혁신 자체를 비판적으로만 받아들이는데 익숙해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과학적 지식인이 자리를 잡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진보적 과학자의 부재가 가져온 인문사회계열 내의 편향에 대해 이야기를 해나가다가 한국에서 과학 및 과학 지식인의 자리를 찾게 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지에 대해 발제자분의 질문을 받았다. 나는 우선 교육의 문제를 꼽았다. 일단 교육 자체가 아이들의 창의력을 제한하고, 아이들이 나름대로의 논거를 가지고 주장을 펼칠 때 어른의 생각과 다르면 주장 자체를 폄하해 버리는 특성이 한국에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내가 기숙학원에 잠시 머물 때 있었던 일을 말했다. 어떤 서울대 나왔던 사교육 강사가 약간은 군기(?)를 잡아보기 위하여 한국에서 서울대 가기는 중국에서 베이징대, 미국에서 하버드대, 일본에서 동경대 가기보다 쉽다, 왜 그런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가장 합리적인 대답을 말해보았다. 중국은 인구수가 13억, 미국은 3억, 일본은 1억 이상이기 때문에 1등 대학 가기가 인구수가 5000만명인 한국보다 가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하자 그게 말이 되느냐는 면박을 들었다. 사교육 강사가 원했던 대답은 한국의 청소년들은 정신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나름의 논거를 가지고 원하지 않았던 대답을 하니 사교육 강사 입장에서는 열이 받았던 것이다. 한국은 어른들이 무조건 발언권을 얻어야 하고, 학생들은 늘 듣는 입장에 서야 한다고 생각해왔었다. 그것이 어쩌면 문화적 근대화, 사회적 근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은 한국의 한계일 수도 있다.
그런 이야기를 하니, 발제자 분도 하나의 경험을 말해보았다. 발제자분은 초등학교 시절 물이 수증기가 되는 것을 무엇이냐고 말하는지를 묻자, ‘기화’라고 답했다가 오답 처리가 되었다고 답했다. 교육과정에서 배운 것은 ‘증발’뿐이었기에 ‘증발’만을 정답으로 인정했다고. 어쩌면 한국은행 총재 이창용 박사가 작심하고 말한 한국은 모든 것이 공급자 위주로 설계되어 있고 수요자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 교육의 분야에도 적용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은행 총재 이창용 박사의 경제에 관한 논평도, 그리고 한국 교육의 문제도 개발도상국 시절에 당시 당면한 과제에 맞도록 박정희 정부가 설계해놓았던 제도를 그 누구도 혁신적으로 선진국 경제 규모에 맞도록 변화하고 조정하지 않았기에 생기는 일이 아닐까 싶다.
또한, 적절한 토론을 해나가는 문화도 정착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서는 한국 사회에서 토론하고 비판하는 문화도 생겨나지 않았냐는 반론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지금 생겨나는 토론 문화는 지나치게 누군가를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타겟팅한 후에, 마음껏 모욕하고 제도적인 해결책이나 더 나은 방안을 생산하지 못하고 끝내버리는 경향이 강하다고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풋잠 모임의 대표분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토론을 할 때 누군가를 조롱하는 방식이 있어서는 어떤 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진보적 과학자가 가져다 줄 수 있는 변화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 부재한다고 생각되는 진보적인 과학자가 사회에 존재하면 생길 수 있는 변화가 무엇일까 우리는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기술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이 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도 했다. 가끔은 기술의 발전을 너무 지나치게 과장해서 받아들이고, 무엇인가를 인간들이 더 할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에 기본소득만을 해답으로 말할 때 답답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는 인간이 하지 않아도 될 일 하나를 발견하면, 해야 할 일 두 개가 생기면서 발전했다고. 자본주의는 수요와 공급으로 발전하는데,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에 공급이 변화하면 또 다른 수요가 생겨버린다고. AI는 데이터를 분석해서 이야기하는 것에 능하니까, 새로운 수요의 중심에는 기존의 데이터와 다른 인간의 욕망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발제자분은 지금 AI로 인하여 타격을 받는 사람들은 결국 디자이너 쪽이라고 들었다고 말했다. 새로운 수요가 있을 것이라는 나의 주장과 모든 사람이 고흐와 같이 혁신적인 미술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발제자분의 주장이 맞섰다. 이를 듣고 풋잠의 주인장분은 사진기 이전의 그림은 시각을 재현하는 것이었지만, 사진기 이후의 인상주의는 결국 시각으로도 담아지지 않는 감각들을 표현해내는 방향으로 만들어진 사례를 말씀하시면서 나의 주장이 이것을 표현하려고 한 것인지를 물었다. 찰떡같이 내 말을 알아듣고 이해하기 쉬운 방향으로 말하는 풋잠 주인장분의 능력에 감탄하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IT현업에 계신 분은 AI 자체가 현재 가지고 있는 한계를 말씀해주셨다. 그래픽 디자인이 아직까지 세밀한 부분을 표현하는 능력에는 여전히 한계가 존재하고, 그렇기에 AI를 잘 활용한 후 세밀한 부분을 조정해주는 디자이너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사례로 중국의 한 그래픽 기업을 말해주셨다. 중국의 IT 기업에서 AI를 활용할 계획을 세우고 모든 디자이너들을 해고하였으나, AI로 디자이너를 완전히 대체하는 데에 드는 사용료가 인건비보다 훨씬 많이 들었던 사례를 말씀하셨다. 그렇기에 해고했던 디자이너를 다시 고용해서 AI를 어느 정도 사용하면서 디자이너를 고용하는 방향으로 바꾸었다고. 여전히 인간은 AI에 의해서 대체되기는 어려운 것 같다고.
한국 사회는 자본주의에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던 기술 혁신에도 떨고 있다. 그 기술 혁신에 떨고 있는 이유는 어쩌면 다른 선진국들과 달리, 이번이 사회 제도가 확립된 이후로 처음 겪는 기술 혁신이기 때문일 수 있다. 90년대 IT 버블 이래로 정보통신 기술과 자동화 기술의 사용이 점차적으로 증진되어 왔지만, 그 두 기술이 확대되어서 아예 기술적 특이점으로 다가오고 또다른 종류의 산업 혁명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국면까지 온 것은 최근 들어서의 일인 것 같다. 기술적 특이점은 대한민국이 사회 제도를 확립한 이후에 처음 겪는 일이 아닌가 싶다. 다른 선진국들은 이런 종류의 기술 혁신 국면을 겪어왔고 그때마다 혼란을 겪으면서도 사회가 알맞게 이를 발전적으로 소화하여 선진국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박정희 정부가 사회 제도를 확립한 것이 1960년~1970년, 내 인생으로만 따지면 옛날옛적의 일이지만 사회사의 관점으로만 보자면 아주 단기간 전에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파편적인 근대화여서 한계가 분명한데도, 이 사회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간신히 이 사회에서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무서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달리 생각하자면, 이전의 선진국들이 해온 것처럼 지금 다가오고 있는 기술적 특이점이 어쩌면 한국의 제도를 혁신시키고, 불완전한 근대화를 완성시킬 하나의 기회일 수도 있다.
과학과 기술은 분리되어야 할까?
김우재 박사는 근대 과학이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발전에 끼친 영향을 강조한다. 근대 철학의 발전도 자연과학적 사고들과 함께 교류하며 발전되었으며, 근대 철학의 개척자들은 모두 자신만의 자연과학적 관심사가 있었음을 강조한다. 한국의 경우, 아쉽게도 학문별 분과 체제가 확립된 이후, 2차 세계대전이 주었던 과학의 무기화로 인한 무서움이 강조되었을 때부터 인문학을 활발히 받아들이게 된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과학과 기술을 연장선상에서만 바라보고 과학기술이라는 용어로 자연과학의 성과 자체를 터부시하는 경향을 인문사회계열에서 가지고 있기도 하다. 특히 한국의 사회제도를 확립한 박정희 체제 내에서는 발전된 상품경제를 생산하는 것으로만 기술로 보고, 순수한 과학적 원리보다는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기술을 중심으로 학문을 수입하고자 했다. 그렇기에 순수한 과학적 원리에 관한 토론의 과정은 받아들여지지 못한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과학은 기술의 영역으로만 신성시되고, 과학기술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받아들여졌다. 김우재 박사는 이를 비판하며 과학과 기술을 분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발제자분은 이 대목을 짚으며 “저자는 기술과 과학을 선형적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만, 저는 현대사회에서는 과학과 기술이 선형적 관계를 어느 정도 이루고 있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현대 기술 개발자 중 과학에 바탕을 두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과연 DNA와 유전자의 발견 없이 유전자 재조합 기술이, 원자구조의 발전 없이 원자폭탄 기술이 개발될 수 있었을까요?”라고 질문을 던지셨다. 이과가 아닌 입장에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기에 흥미로웠다.
우선 IT현업에 있던 분이 유튜브 언더스탠딩 채널에서 민태기 박사가 유체역학의 발전과정을 설명했던 대목을 언급해주셨다. 라이트 형제는 유체역학을 알고 비행기를 개발한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비행 실험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고, 자신들도 이끌려 비행 실험을 시도해서 시행착오 끝에 기술적인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리고 그 원리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유체역학이라는 하나의 분야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듣고 나도 내 견해를 말했다. 고차원적인 기술의 경우에는 과학의 원리를 통해 발전한 것은 맞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는 지나치게 생산의 관점에서 이과적 지식들을 받아들인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저자의 문제의식은 그것보다는 자연의 구성원리라는 부분에서, 보다 근본적인 호기심의 차원에서 과학문화라는 용어를 통해 과학과 기술을 분리하고자 한 것 같다고. 그런 근본적인 호기심 자체가 없기에 결국은 한국이 제조업 강국만 되고 자연과학 자체의 발전이 더딘 것은 아니냐고 말해보았다.
그러자, IT현업에 계신 분은 다시 한 번 내 생각 자체도 편향되었음을 알려주셨다. 한국은 제조업 강국이라고 말하지만, 삼성전자는 반도체 기술 중에 가장 하단의 기술인 메모리 반도체만 잘할 뿐이라고. 그리고 그마저도 일본과 미국이 가지고 있는 원천기술 자체가 없으면 돌아가지가 않는 구조라고 말해주셨다. 원천기술이 무엇인지를 얕잡아봐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면서 어떤 종류들이 있는지를 말해주셨다. 그것들을 자체 개발하려고 해봤지만, 사실 자체 개발을 하면 오히려 한국은 적자인 상황이라고.
토론 이후에 한일 무역 갈등 시기에 이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찾아보았다. 국내에서 원천기술 국산화에 성공했다는 기사들이 많았으나, 겨우 한두 개만이 현실이 어떤지를 알려주는 기사가 있었다. 원천기술 국산화에 성공했으나, 일본의 기업들이 수출을 위한 방편으로 한국 땅에 합작회사를 세워서 그 공장에서 생산한 것인 경우가 많다고. 그래도 원천기술만큼이나 최첨단 반도체를 양산하는 기술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날 토론에서 풋잠의 주인장분께서 지적하신대로 한국이 반도체 양산 기업들을 손아귀에 쥐게 된 것은 일본이 미국을 추월할 수도 있다는 분석들이 횡횡하게 되자 미국이 플라자 합의 등으로 일본을 주저앉히는 과정에서, 미국이 일본의 반도체 기업들에게 불이익을 주고 한국과 대만에 반도체를 생산하는 데에 특혜를 주고 몸집을 키워준 경향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미국 일극 체제 속에서 자유무역이 기조였던 시대가 지고, 다시 지정학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은 다시 일본의 기업들에게 반도체를 생산할 때 특혜를 주려고 하고 있다. 대만의 TSMC는 아예 일본에 공장을 짓도록 유도하고 있다. 한일관계가 나빠서 한국의 삼성과 하이닉스에게는 일본에 공장을 지으라고는 못하고, 아예 미국에 지으라고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김덕영 박사의 주장대로 국가-재벌 동맹 체제 속에서 국가대표 기업들만 잘 성장하면 우리나라 경제는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한국인들은 과연 그 결실을 누릴 수 있을까? 최근에는 1분기에 수출이 증대되었다고 고무적이라고 사람들이 말했지만, 정작 삼프로 티비에서 조영무 박사가 그 수출 증가가 미국에 한국 기업들의 공장 설비들을 보내면서 잡힌 수출액도 많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는 분석을 듣고 우울했던 적이 있었다. 몇 분기만 버티면 그래도 수출금액이 돌고 돌아 서민경제에도 긍정적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언론들이 말을 하지만, 과연 그럴지는 지켜봐야 알 일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과학의 자리 부재가 가져다 준 우리의 능력의 한계, 즉 박정희 체제 자체가 가져다 준 우리 경제 성장의 한계에 직면하게 된 것이 아닌지 두렵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과학문화 확산을 위한 시설들
마지막으로는 저자가 제안했던 타운랩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다. 근대적인 과학문화의 증진을 위해 기초적인 실험 시설들을 동네의 공용 실험 시설에 놔두고 동네 피아노를 배우듯이 일반인도 논문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한 것이다. 그것이 과연 현실적일지에 대한 토론을 나누었다.
그래서 내가 제안해본 것은 꼭 논문의 형식이 아니어도 사람들이 에세이 형식으로 글을 쓰고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전문가 집단이 언제나 논문의 출판 확률을 높이기 위해 내가 생각했던 가설이 맞다는 형식이 아니라 내가 생각한 가설이 틀린 경우를 최대한 많이 공유하는 형태가 괜찮지 않겠냐고 했다. 잘못된 가설이 실패한 사례들을 실어준다면 과학 전체의 발전에 아마추어도 프로만큼이나 기여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작 실패했던 이야기들이 없이 성공 사례들만 접하면 과학 자체가 어렵게 느껴지고, 나만 못난 것 같을 뿐만 아니라, 실패한 사례들이 공유되지 못하면서 비슷한 도전자들이 같은 실패를 반복하게 된다. 그렇기에 아마추어들의 실험 실패 사례 공유는 전문가에게도 충분히 같은 실패를 경험하지 않을 수 있는 동력도 된다.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정부의 국책 과제들은 모두 다 성공이어야 하는, 경직된 구조의 과학을 다루는 한국의 방식에 대해서도 말하게 되었다.
발제자분은 퇴근하고 돌아와서 과연 그러한 실험을 할만한 에너지가 남을지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탈진하도록 만들어서야 퇴근할 수 있는 기업 구조를 만든 것도, 박정희 체제에서 조금이라도 혁신하는 것을 두려워한 우리 모두의 불안 때문을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토론 이후 이런 글을 정리하면서 생각한 것은 우리가 정말로 그런 시설을 갖추고자 한다면 그런 시설을 도입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학령인구 감소로 결국 대학의 시설 곳곳은 빌 것이다. 그리고 곳곳에 있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교실들도 빈 곳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은 교육 시설이기에 기초적인 실험 도구들은 다 있다. 없어도 구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이를 지도해줄 수 있는 인력도 이미 다 마련되어 있다. 사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근대 과학과 일반인이 친숙해질 수 있도록 할 것인가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의지이다.
박정희 체제의 혁신과 '과학의 자리'
박정희 체제를 우리는 혁신할 수 있을까? 한국의 자칭 ‘민주화 세력’은 자신들이 집권하면 보수 정부가 만들어놓은 현 체제를 완전히 뒤바꿀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곤 했다. 그러나 누구를 우리 손으로 뽑든 ‘선출된 왕’을 모시듯 해야 하는 우리의 관행은 늘 여전했고, 국가-재벌 동맹 체제는 사실 누가 집권하든 매한가지였다. 한국에서는 한반도천동설에서 기인한 외교정책 상의 차이만을 제외하면 정치적 변화의 모멘텀에서 항상 여당과 야당의 논리만이 있었지, 보수와 진보의 논리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민주화 세력’은 항상 ‘촛불 혁명’이라는 말을 내세우지만, 백승욱 박사가 <1991년 잊힌 퇴조의 출발점>에서 분석하였듯이 우리는 촛불 정국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자유주의적 전환에 실패하였고, 결국 ‘박근혜 없는 박근혜 체제’가 계속 유지되었다.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단지 정권 교체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화적 근대화, 그리고 사회적 근대화이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많은 인문사회계열의 먹물들이 생각지 못한, 그러나 완전한 근대 사회 도래에 필요한 중요 포인트가 있다면 김우재 박사가 강조하듯 과학의 자리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결론은 좋은 책을 선정해준 풋잠의 주인장 어르신과 훌륭한 발제를 해준 발제자분, 그리고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공유해준 IT 현업자분 모두에게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