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나는 괜찮은 삶을 살고 있어요.
"이제 걔네들은 탄탄대로지."
얼마 전, 가족 모임에서였다. 사촌오빠는 대기업을 다니고, 새언니는 결혼 후 사촌오빠를 따라 지방에 내려 가는 바람에 직장을 그만 둔 상태였다. 2명의 아이를 기르며 육아에 전념하던 새언니가 얼마 전, 시간제 공무원에 합격했다는 소식이었다. 아버지의 반응은 '탄탄대로'였다.
아버지가 말했던 탄탄대로란 어떤 것이었을까?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탄탄대로는 평평하고 넓은 길, 어려움이나 괴로움없이도 수월한 길이다. 아마 아버지가 생각했던 30대가 걷는 탄탄대로의 기준은 '적당한 경제적 여유와 적당한 안정감을 주는 직장'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세대는 IMF라는 거대한 직격탄을 온몸으로 맞은 세대다. IMF를 겪으면서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성이 좋은 직장의 첫 번째 요소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공무원, 교사 등의 안정적인 직업이 '워너비' 직업이 되었고, IMF의 소용돌이 속에서 명맥을 이어간 대기업이 그 다음이 되었다. 쓰나미 같았던 IMF에 속절없이 무너진 개인 사업은 수많은 부모님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길이 되었다.
급격한 경제 변화 속에서 가장의 역할은 처자식을 책임지는 것이었다. 눈 깜빡할 새에 변화하는 경제 활황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빠른 기회에 올라타 기반을 마련해야 했고, 위태롭게 추락하는 경제 위기 속에서도 가족을 지켜내야 했다. 그 결과 현 2030세대의 아버지들은 무채색 정장을 입고 직장에 다녔고, 평범한 날에는 소주를 마시고 귀한 날에만 종종 위스키를 마셨으며, 취미는 골프였다. 직업도, 취향도, 취미도, 그 어떤 선택에 있어서도 개인의 선호나 꿈이 우선순위에 있지 않았다.
그런 세대를 겪은 나의 아버지는 으레 여자 직업으로는 교사가 최고라는 말씀을 하셨고, 대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줄곧 행정고시를 준비하기를 바라셨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아버지가 말하는 탄탄대로 속에 개인의 꿈과 적성이 없다는 객관적 사실은 여전히 유효했다. 죄송하게도(?) 나는 교사도, 공무원도 적성에 영 맞지 않았다. 아이를 대하는 것이 어른을 대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사람이었고(여전히 그렇고), 조용히 묻어가기 보다는 존재감이 있는 사람이 되기를 지향했다.
아버지의 탄탄대로와 내 성향의 적절한 타협점이라고 생각했던 대기업에서 첫 커리어를 시작했다. 대기업 중에서는 혁신적인 기업문화를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던 곳이었다. 해외 사업을 하는 부서에 발령을 받아 사원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해외 출장도 다니며 협상 테이블에도 앉아 보고, 임원 회의에 참석해(비록 회의록을 적는 역할이었지만...) 경영진들의 생각과 회사의 큰 그림을 엿볼 수 있는 기회도 많았다.
입사한지 4년째가 되던 해에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회사생활이 재미있어서, 퇴사를 했다. 정확히 말하면 회사가 아니라 일을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일을 쉬고 싶다는 목적으로 퇴사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회사를 다니면서 일을 한다는 것이 나에게 에너지를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오랫 동안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퇴사에 대한 고민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회사를 다니면 내가 언제까지 일을 할 수 있을까?
회사에서 높은 직급이거나 회사에 오래 다닌 분들을 떠올렸다. 40대에 임원이 된 분들도 많았고, 나이가 많아야 50대 초반이었다. 그나마도 여자는 현저히 적었다. 남자 임원들은 당연하리만큼 가정을 이루고 아이도 낳았지만, 그나마 몇 안 되는 여자 임원들은 대부분이 미혼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웠고, 강단보다는 깡이 느껴졌고,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의든 타의든 인생에서 무언가를 포기한 것 같았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제쳐 두고라도, 결과적으로는 그랬다. 성별로 편을 가르자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여자의 회사 생활에 한계가 없다고 생각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렇다고 남자라고 크게 나아 보이지는 않았다. 제 때에 임원으로 진급하지 못한 사람들의 좌절과, 계약직 임원이 된 사람들의 절박함과,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한 불안이 치워도 치워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방구석의 먼지처럼 널려 있었다.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오랫 동안 일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회사라는 조직이 가진 한계를 꾸준히 보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넥스트를 생각하게 되었다. 언젠가 해야 하는 퇴직을, 길지 않은 재직 기간을 몰랐던 건 아니지만, 회사라는 조직 안에서 그 한계에 직면한 사람들과 뒤엉켜 매일을 생활하는 건 또 다른 깨달음이었다.
단순히 양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백지 같은 신입사원일 때에는 회사가 시키는 일만 해도 배움이 있었다. 회사가 가진 한계는 일단 제쳐두고, 어쨌든 회사는 나보다 사회 생활을 오래한 유능한 인재들의 지성이 집적되어 있는 곳이다. 그래서 회사에서의 모든 경험으로부터 나는 성장했고, 지금도 그 때의 경험들이 유효하다. 심지어 이유도, 목적도, 의미도 모르고 했던 일들과 당연한 과정처럼 거쳐야 했던 삽질에서도 얻을 만한 것들이 있더라.
그러나 그런 생활이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고... 나는 여전히 시키는 일을 해야 했다. 대리, 과장, 차장은 팀장이 시키는 일을, 팀장은 임원이 시키는 일을, 임원은 또 누군가가 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촘촘한 위계 질서 안에서 실무진의 생각과 의지가 끼어들 틈은 없어 보였다. 기획부서였지만 '기획'하기보다는 이미 정해진 것들을 '수행'하는 부서에 가까웠다. 무언가를 기획하려고 하는 워킹 레벨들은 그 자체로 인정받기 어려웠다. 일을 잘한다는 의미는 시키는 일을 시키는대로 깔끔하게 처리한다는 것과 같았다.
나는 자의에 의해 쉬고 싶을 때까지, 나의 의지와 생각이 이끌어 가는 일을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랫 동안 나의 성장을 견인하면서도 무언가를 생산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런 나에게 부서를 옮기거나 회사를 옮기는 일은 단기적인 타협점일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퇴사라는 옵션을 고려하게 되었다. 그 때 다행히 나에게는 나보다 먼저 결단을 내렸던 현 트래블코드 대표와,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던 트래블코드 디렉터들이 있었다. 우린 각자 회사를 다니면서도 사이드 프로젝트들을 함께 하면서 합을 맞춰 왔던 사이였고, 자연스럽게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2016년 3월, 나는 물 흐르듯 퇴사를 했다.
퇴사한지 딱 2년이 되었다. 퇴사 후 내 생활은 퇴사 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다이나믹했다. 1달 동안 발리에서 지낸 적도 있었고, 런던, 대만으로 출장을 다녀 왔고, 질리도록 도쿄를 드나들었다. 공동저자로 이름을 올린 <퇴사준비생의 도쿄>가 세상에 나왔고, 이코노믹 리뷰에 칼럼도 연재한다. 퇴사 전보다 콘텐츠를 읽고 생산하는 데에 훨씬 재미가 붙었고, 방향성도 생겼다. 쌓이는 지식과 센스는 내 인생 구석구석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콘텐츠를 만드는 중간 중간에 회사의 재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물건도 팔았다. 그 중 몽골 캐시미어 목도리는 단기간에 500장 정도를 판매했다. 생존을 위해 선택했던 커머스였지만, 성장을 위한 새로운 영역의 청사진을 그리는 계기가 되었다.
돌아보면 분명 탄탄대로는 아니었다. 돈을 위해 돈을 번 적도 있었고, 눈 앞에서 돈이 날아가는 경험도, 한꺼번에 수천만원이 꽂히는 경험도 했다. 구멍이 날까봐 아찔했지만, 벼랑 끝에 살아남아 가슴을 쓸어내린 적도 있었다. 사기에 연루될 뻔 했었는데, 순간의 기지로 벗어난 적도 있었다. 돌이켜보니 안 해도 될 고생도 했고, 동시에 해보지 못했으면 아쉬울 뻔한 경험도 많이 했다. 덕분에 생각은 더 넓어졌고, 마음은 더 여유로워졌고, 인생을 채우는 뜻밖의 기회들이 생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의지대로 오랫 동안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기반을 닦았다.
아버지의 차 안에서 부러움, 아쉬움, 걱정이 뒤섞인 '탄탄대로'라는 말 한 마디에 만감이 교차했다. 이제는 더 이상 친구들에게 '우리딸 어디 다녀'라는 한 마디로 어깨를 으쓱할 수 없는 아버지의 앞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내 편에 서 있는 아버지의 앞에서, 하지만 여전히 탄탄대로에 대한 미련을 내비치는 아버지의 앞에서, 탄탄대로를 걷지 않아 뜨끔했던 나였다.
그래도 나 자신한테는 뜨끔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으니까, 적어도 일단은 괜찮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