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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경화 Apr 15. 2020

자유 의지, <스갱아저씨의 염소>

알퐁스 도데 지음, 에릭 바튀 그림

5살 남짓의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갔다. 아마 이십년 쯤 전의 일인가 보다. 

어릴 때부터 설탕물에 밥을 말아드시곤 했다는 엄마는 부엌 찬장에 늘 과자를 든든히 채워두고 계셨고, 아이들은 그런 외가를 좋아했다. 

부엌에서 엄마와 수다를 떠는데 아이들은 끊임없이 들어와서 과자를 더 달라고 했다. 어느 순간 단호한 목소리로 '이번이 마지막이야!'라고 말하면서 주었는데 다시 또 아무렇지도 않게 와서 손을 벌리는 아이에게 안 된다고 말했다. 평소엔 대충 이 정도면 통했는데 외할머니 앞이어서인지 아이는 더 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약속을 지켜야 하는 거라고 기어이 과자를 주지 않고 돌려보냈는데, 엄마가 말씀하셨다.


"딸내미 이겨먹으니 좋냐?"


얼마나 당황스럽고 황당했는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순간이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아는 엄마는 늘 원칙주의자였고, 딱 엄마만큼만 아이를 잘 키우고 싶었던 나는 그 원칙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아이를 길렀는데, 엄마가 그렇게 말씀하시다니!


어쩌다 아이를 셋이나 낳았는데, 나는 출산보다 육아가 너무 힘들었다. 몸이 힘든 거야 짜증도 내고 쉬기도 하면서 어찌어찌 시간을 보내면 해결이 되었지만 매 순간 부딪치는, 정답이 없는 선택지를 받을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가장 힘든 것은 아이에게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안 된다고 해야 하는지의 기준점이었다. 어떤 육아책에서는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했고, 어떤 육아책에서는 엄마가 너무 엄하면 아이의 자존감이 없어진다고 했다. 한때는 색칠공부를 하면 창의력이 떨어진다고 하더니, 또 언젠가부터는 컬러링이 정서 안정에 도움이 된다고 유행이다. 제발 정답이 정해져 있고, 그 정답을 알려달란 말이야!!! 라고 소리지르고 싶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림책 <스갱아저씨의 염소>(알퐁스 도데 지음, 에릭 바튀 그림, 파랑새)를 읽으면서 나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스갱아저씨는 염소를 사온다. 이미 여섯 번이나 염소가 숲으로 도망쳐 늑대에게 잡아먹힌 경험이 있는 아저씨다. 일곱번째 사온 아기염소는 너무너무 예쁜 흰 염소이다. 온갖 정성을 들였지만 이 염소 역시 숲으로 가고싶다고 말한다. 다시는 염소를 잃고 싶지 않은 아저씨는 오직 염소를 위해! 방에 가두지만 염소는 결국 도망쳐 숲으로 간다. 그 후 결말은 뻔하다. 즐겁게 자유를 만끽하던 염소는 밤이 되자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는 스갱아저씨에게 돌아가지 않고, 늑대와 새벽까지 싸우다 흰 털이 피로 물들며 죽는다. (나쁜 알퐁스 도데. 설마 하면서 끝까지 봤는데... 정말 죽는다.)


누구보다 독립심이 강한 막내가 이 이야기를 듣더니, 염소를 이해한다고 했다. 자기가 염소라도 숲으로 가겠다고. 평생 울타리에 갇혀서 살 수는 없는 거라고. 나는 이미 엄마 마인드라 스갱아저씨에게 빙의가 되어서, 죽을 줄 뻔히 알면서 보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생각이 들었다. 갇혀서 불행해지더라도 죽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그러나 내가 염소라고 생각해보니, 나라도 갔겠다. 그래 내가 염소라도 갇혀있는 안정된 삶보다는 단 하루라도 자유롭게 내 뜻대로 살 수 있는 산으로 갔을 것 같다. 뻔히 다 보이는 남이 설계해준 인생, 설렘 없는 인생은 정말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아, 그러나 내가 스갱아저씨라면 절대 나의 아이를 숲으로 보내지는 못할 것 같다. 죽을 게 뻔한 길에 내 아이를 어떻게 보내나. (그러고 보면,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의 어머니들은 정말 대단한 분들이다.) 이 얼마나 앞뒤 안맞는 말인가. 나는 자기 주도적인 삶을 꿈꾸지만 내 아이는 안정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니, 이 세상에 원칙이라는 게 있기는 한 것인가. 나의 원칙은 그러니 모두 내 맘대로 하겠다는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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