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이름으로 사다리를 부순 제도들
누구나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이치가 있다.
빈자와 부자의 존재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는 단지 현실의 풍경을 묘사하는 문장이 아니라, 인간 사회를 관통해온 하나의 구조이자 리듬이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금까지도 ‘가진 것의 평등’이 완전히 실현된 사회는 존재한 적이 없다.
공산주의 실험은 실패했고, 복지국가조차 계급을 지우지는 못했다. 차이는 단지 ‘격차의 폭’이냐, ‘이동의 가능성’이냐의 문제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평등’이라는 단어에 깊은 애착을 갖는다. 정치권은 종부세, 증여세, 상속세 같은 제도를 통해 그 단어를 실현하려 한다.
의도는 분명하다.
과도하게 가진 자에게서 덜어내고, 가지지 못한 자에게 기회를 돌려주자.
그러나 현실은,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종부세는 말한다. “부동산으로 부를 축적한 이들을 겨냥한 정의로운 세금이다.”
그러나 한 채의 집을 가진 은퇴 고령자에게도 수백만 원의 세금이 부과된다. 살던 집을 팔거나, 어쩔 수 없이 임대사업자로 등록해야 한다. 그것은 생존 전략이지, 정책 효과가 아니다.
증여세는 외친다. “부의 대물림을 막아야 공정성이 확보된다.”
하지만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내 집 마련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이 제도는 오히려 중산층 이하 가정의 사다리 자체를 무너뜨린다.
상속세는 경고한다. “죽음 이후에도 부는 공평히 나누어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집 한 채밖에 없는 상속인은 현금 없이 세금을 낼 수 없어 결국 거주지를 매각해야 한다.
이런 제도들은 원래 천장을 만들려는 시도였다.
과도하게 오른 자들에게 경고를 주고, 그 위로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장치.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에서 이 천장은 사다리 전체를 부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사다리뿐 아니라 그 옆에 있던 밧줄, 그리고 로프까지 모두 끊기고 있다.
중요한 건, 빈자는 이 세금을 직접 내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문제는 따로 있다.
이러한 제도들이 설계된 방식 때문에, 부자가 될 수 있는 경로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세금은 언제나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세금은 결국 전가된다.
부자에게 부과된 세금은 임대료, 물가, 서비스 가격 등 형태를 바꿔 서민에게 내려온다.
시장 안에서 가격 조정이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세금은 아래로 흐른다. 겉으로는 정의로운 과세처럼 보여도, 현실에서는 소리 없이 빈자를 압박한다.
한때는 믿었다. 노력하면 계층을 바꿀 수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부모의 자산이 없으면 출발선조차 접근할 수 없다.
상위층은 상속세를 피하기 위해 법인을 만들고, 증여를 분산하며, 우회 전략을 짠다. 자산은 차명으로 관리되고, 절세는 전문가가 설계한다.
그들에겐 세금조차 설계 가능한 전략의 일부일 뿐이다.
반면, 사다리 아래 있는 이들에게 세금은 경로의 차단선이다. 시작할 수 없고, 물려받을 수 없으며, 도전해도 돌아올 수 없다.
가장 큰 충격을 받는 계층은 중산층이다.
자산은 조금 있지만, 절세할 여유는 없고, 정책의 보호도 받지 못한다.
은퇴한 부모가 자녀에게 집을 물려주려 해도, 증여세는 버겁다.
자녀가 상속을 받으려 해도, 양도세·취득세·상속세가 연쇄적으로 덮친다.
부동산을 팔아서 낼 만큼의 현금도 없는데, 국가는 그것을 현금처럼 요구한다.
이들은 부자가 아니다. 그러나 ‘부자처럼 간주되기 때문에’ 기회의 구조 밖으로 밀려난다.
위는 막혔고, 아래는 열린다.
낙하만 허용된 사회다.
정책은 부자를 겨냥했지만, 현실에서는 가장 애매한 위치의 중산층을 먼저 무너뜨리고 있다.
정책은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설계됐지만, 그 불평등을 바꿔보려는 상상조차 지워버리는 구조로 작동한다.
이것이 바로, 정의의 이름으로 사다리를 걷어차는 구조적 역설이다.
물론 공공 재원을 위한 과세는 필요하다. 복지, 의료, 교육, 인프라를 위한 부담은 공동체가 나눠야 한다.
그러나 그 정당성은 기회를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공공을 앞세운 정의가 기회의 구조를 파괴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정의가 아니라, 균등한 절망이다.
사다리를 남긴다는 건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집 한 채를 물려줄 수 있는 권리,
청년이 처음으로 자산을 형성할 수 있는 경로,
중산층이 무너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의미한다.
공정한 사회란, 누구에게나 그 사다리가 존재하는 사회다. 그 사다리에 발을 디딜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정의가 가진 유일한 설득력이다.
세상은 본래 불공평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워야 할 결함이 아니라, 더 나은 방향으로 설계해야 할 현실의 조건이다.
불평등은 줄여야 하되, 사다리는 반드시 남겨야 한다.
그 사다리를 타고 오를 수 있는 가능성만큼은, 어떤 제도보다도 소중하다.
우리는 사다리를 없앤 게 아니라,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던 감각을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예전엔 그 감각이 있었다. 적어도 내 아이는 나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하지만 분명한 상상 말이다.
그 상상이 사라지고 있다. 사다리를 만들자는 말은 이제, ‘특권을 지키려는 기득권의 언어’로 매도된다. 도전은 특혜로, 노력은 운으로, 축적은 죄로 취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집 한 채를 물려주는 일이 죄인가?
평생 일해서 소유한 것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부도덕한가?
자산을 갖고자 하는 꿈조차 불온한가?
아울러, 다른 삶의 관점도 떠올려본다.
누군가는 말한다. 꼭 올라야 하냐고.
사다리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 위로의 이동을 강박적으로 추구하지 않는 삶.
그저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며, 물려줄 것이 많지 않더라도 마음만큼은 평안한 삶.
이 관점은 현실을 수용하며, 계급 상승보다는 존엄한 일상을 더 귀하게 여긴다.
이러한 삶은 한편으로 우리 사회에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사다리를 만든다는 것이 꼭 위로 올라가기 위한 것인가?” “지금 있는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기반은 왜 사다리로 불리지 않는가?”
정의에 대한 대답은, 삶의 방향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기에 정의는 단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공존 가능한 시선이어야 한다.
사회가 사다리를 부수는 데 몰두할수록, 남는 것은 계급이 아니라 고립이다. 더 이상 올라갈 곳도, 내려다볼 곳도 없는 고립.
그렇다면 사다리를 다시 만든다는 건, 특권을 복원하는 일이 아니라, 공통의 출발선 하나쯤은 다시 허용하자는 제안일지도 모른다.
지금 필요한 정의는, 누군가의 것을 빼앗는 정의가 아니라, 모두에게 오를 수 있는 방향을 남겨두는 정의다.
그 정의는 단순하지 않다. 그러나 가능성은 언제나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다시, 오를 수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