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말들에 관하여

by 노경문

어느 날부터인가,
내가 늘 써오던 말들이
조금씩 낡은 것이 되어 있었다.

'노산'이라는 말도,
'유모차'나 '출산율'이라는 단어도,
그저 익숙하게 쓰던 말이었는데
어느샌가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표현이 되어 있었다.

처음엔 그게 왜 문제인지 잘 몰랐다.
나에겐 그냥 말이었을 뿐이니까.


상처를 주려는 마음도, 누군가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도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이제
‘의도’보다 ‘감정’을 기준으로 말을 재단하기 시작했고,
표현은 뜻보다 뉘앙스로,
맥락보다 분위기로 가늠되기 시작했다.

그걸 이해하려고 애써본 적도 있다.
불편한 사람도 있겠지,
그럴 수도 있겠지.
나도 그런 마음을 느껴본 적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이해는,
늘 나 혼자만 해야 하는 일이었다.

어떤 단어는 누군가의 감정 때문에 바뀌고,
어떤 감정은 ‘예민함’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과정에서 정작
내 말은 설명할 기회도 없이
‘구시대의 언어’가 되어버렸다.

언어 감수성은 원래,
소수의 상처를 돌아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흐름은 단순한 배려를 넘어선다.

단어 하나에 불편함을 느낀 몇몇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 단어는 이제 쓰면 안 된다’는 식의 기준이 되어버리고,
그 기준은 공론화 과정 없이 곧바로 ‘사회적 합의’처럼 작동한다.
누군가의 감정은 기사로, 댓글로, 사과문으로 확대되고
그 사이에서 말은 어느새 낙인이 되어 있다.

그런 흐름이 피로한 건,
단어의 의미가 아니라 감정의 방향에 따라
말의 운명이 갈린다는 점이다.


불쾌감을 느낀 쪽의 감정은 즉각 존중받지만,
그 말을 쓴 쪽의 의도나 맥락은 설명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정작 ‘왜’라는 질문은 사라지고,
‘그 말이 기분 나쁘다니까요’라는 감정만이 기준이 된다.

결국, 이 모든 변화는 공감이라기보다는 일방적 요구에 가깝고,
나는 그 일방성에 지친다.

나는 말을 줄이게 되었다.
웃음에도 눈치를 섞고,
침묵이 더 편한 순간이 늘었다.
설명보다 회피가 덜 피로하게 느껴질 때가 많아졌다.

그런 피로 속에서,
나는 나와 결이 맞지 않는 사람을
말로 걸러내기 시작했다.

‘그런 말은 이제 안 써요’라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대신,
그저 조용히 마음을 접는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건,
더 이상 내 에너지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누군가의 감수성을 위해
내 말을 접는 일에 익숙해질수록,
나는 점점 조용한 사람이 되어간다.

하지만 조용하다는 건,
침묵에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싸우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내 인생은 짧고,
내 마음은 유한해서
모두에게 맞추며 살 수는 없다.

어떤 말은 살아남고,
어떤 말은 사라진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이라는 건,
누군가의 감정만을 위해 만들어진 건 아니었다.

마음을 담아 꺼낸 말에는
맥락이 있었고, 온도가 있었고, 이유가 있었다.

그 모든 결을 지워버리고
단어 하나만 떼어내어 잘라 말할 때,
말은 도구가 아니라,
판결이 된다.

나는 여전히 그 말들을 기억한다.
내가 마음을 담아 꺼냈던 단어들,
누군가와 웃으며 나눴던 말들.

그 말들이
사라져야 할 만큼 나빴던 말은 아니었다.

그저, 이제는 쓰기 어려워진 말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 어려움을 꺼내 쓰고 싶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가끔은 생각한다.

언어는 감정을 위해 존재해야만 할까?
배려 없는 말은 사라져야 하지만,
사유 없는 말까지 사라져야 할까?

말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감정이 차지하고 나면,
우리는 정말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을까?

표현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고들 말하지만,
그 자유는
가장 크게 반응하는 사람의 손에 쥐어진 채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무거움 속에서
말을 삼키는 법을 배워간다.

수, 금,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