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 출구 바로 앞에서 깜빡이 없이 끼어들려는 차를 봤다.
평소 같았으면 창문을 내리고 한 마디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은 그냥 비켜줬다.
상대는 손을 흔들지도 않았다.
감사의 눈빛도 없었다.
그런데 묘하게,
나쁘지 않았다.
아들이 장난감을 집어던졌다.
“하지 마!”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잠깐 멈췄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아이를 봤다.
그 아이는 아직 나를 무서워할 줄 모른다.
그게 고마웠다.
그리고,
그 순간의 나도 조금은 괜찮아 보였다.
아주 어릴 적, 지하철에서였던 것 같다.
자리 하나 차지하기도 힘들던 만원 지하철에서
머뭇거리다 할머니께 자리를 양보했다.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지만
고맙다고, 착하다고 말해주셨던 그 짧은 인사가
내 안에 오래 남아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배웠기에 했던 행동인데
그게 참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건 원초적이고, 아주 순한 보람이었다.
반대로,
가장 보람 없었던 기억도 그맘때이다.
집 앞 문방구에서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몇 번씩 물건을 훔쳤던 일.
그땐 갖고 싶어서라기보다
그 분위기에 끌려갔던 것 같다.
걸렸을 때의 두려움과
그 후에 찾아온 죄책감은
지금도 또렷하다.
그때 처음 알았다.
쾌락은 순간적이지만,
보람은 오래 남는 감정이라는 걸.
보람은 자존감을 세우는 데 꼭 필요한 감정이다.
특히 내가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도움을 줬다는 실감,
그리고 그로 인해 누군가가 “고맙다”고 말할 때
나는 내가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게 돈이든, 말 한마디든,
심지어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학창시절엔 잘 보이기 위해 행동했다.
부모님에게, 선생님에게, 친구들에게.
그때는 보람이 아닌 '인정'이 필요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모든 것이 다 나를 준비시키는 과정이었음을.
지금의 나는, 그 ‘연습’을 지나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아버지도 그런 분이었다.
퇴직 전 교장선생님이셨던 아버지는
매일 아침, 학교 교문 앞에서
등교하는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하이파이브를 건넸다.
당시 나는 그 모습이 조금은 이해가 안가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면
그날 아이들의 표정, 말투, 작은 변화까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셨다.
“오늘 그 아이는 유난히 밝더라.”
“쟤는 어제 혼났는지 눈빛이 다르더라.”
그에게 그건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자리에서,
그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일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보람’이란 단어의 실제 얼굴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그런 어른을 곁에 두고 자랐기 때문에
일상의 보람이라는 감정을
놓치지 않고 따라올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그 연습을 못한 채 어른이 된다.
작은 보람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는
이기심과 비교를,
보람보다 더 ‘이득 있는’ 감정이라 가르친다.
돈, 자극, 승리 같은 감정들만을 우선순위에 놓고
양보와 인내, 이해 같은 감정은
낭비로 취급한다.
보람은 그저 착한 마음이 아니다.
그건 감정의 힘줄이고,
삶을 지탱하는 방향감각이다.
우리는 쾌락의 무게를 너무 쉽게 느끼지만
보람의 가치를 너무 빨리 잊는다.
그리하여 결국,
자존감이 비어가고
우울이 들어찬다.
그래서 나는 오늘,
아무도 몰랐지만 나만 아는 그 작은 선택을
‘보람’이라 부르기로 했다.
그 보람이 쌓이면,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세상도 덜 날카로워지지 않을까.
거창한 제도나 거대한 개혁보다
길에서 양보하고,
화를 삼키고,
이해하려 애쓴 그 순간들이
우리 사회를 지탱해주는
보이지 않는 뿌리일지도 모른다.
보람이란 결국,
나 하나 잘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나를 통해 세상이 덜 아프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그러니 당신도 혹시 오늘,
누구도 몰랐지만 당신만 아는 그 작은 선택이 있다면
그걸 보람이라 불러도 괜찮다.
세상은 그런 마음들 위에 간신히 서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