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럽게 하루의 휴가가 주어졌다. 떠오르는 친구가 한 명 있었다. 며칠을 말을 걸어보려다가 적당한 때를 놓쳐, 못 본 기간이 꽤 길어진 친구였다. 오랜 기간 보지 못한 만큼,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긴긴 안부 나눔이 끝날 무렵 친구는 엽서를 하나 내밀었다. 인터넷에서 보게 된 글귀를 보고 내 생각이 났다는 말과 함께.
엽서의 가장 위쪽에는 나태주의 <잠들기 전 기도>가 적혀 있었다. 새벽에 뒤척인다는 나의 이야기를 들었던 친구는, 내가 아직도 잘못 잘까 걱정했던 듯했다. 그 아래에는 이슬아의 서평집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의 한 구절이 적혀 있었다. 모두 공개하면 친구의 마음이 사라지는 듯하여, 마지막 문장만 알리려고 한다. 마지막 문장은 딱 두 글자였다.
잘 자.
친구의 편지를 읽으며 아이유의 <밤편지> 생각이 났다. 아주 소중한 사람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보고픈 마음을 반딧불에 담아 대신 보낸다는 그 고운 마음이 이 글자 안에서 보였다. 글자를 좋아하는 내게, 섬세하게 밤 인사를 건네는 듯 느껴졌다.
이 편지와 함께 주고 싶었다며, 친구는 유진목 시인의 <식물원>을 한 권 보내주었다. 사진과 시가 함께 수록되어 있는, 묘한 매력의 책이었다. 목차도, 사진도, 글자도 쉬이 이해되지 않는 책이었다. 그런데 그만큼 무엇 하나 약한 인상을 지닌 것이 없었다.
<식물원>에 입장해서 퇴장하기까지, 미간이 펴지지 않았다. 아리송한 느낌이 가득했다. 하나만이 명확했는데, 이 안에 '삶'이 쓰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진 속에 흐르는 시간도 그러했고, 0에 쓰인 '이른 아침 그는 식물원으로 들어갔다. // 해 질 녘 그가 식물원에서 나왔을 때는 전 생애가 지나버린 뒤였다.' 속 의미도 '삶'으로 보였다. 식물의 이름이 붙어 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을 이야기하는 시의 내용도 그러했다.
이해되지 않는 이 시집이 마치 삶 같다고 느꼈다. 한 살 한 살 나이 들어갈수록, 인생이 논리적으로 흘러가길 바라는 게 허상이라는 걸 느낀다. 이처럼 내가 단숨에 이해하지 못하는 게 삶 같았다. 인생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다. 시의 제목과 내용을 쉽게 결부시키지 못하는 내게서 삶의 단면을 쉽게 평가했다가 얼떨떨해하는 나를 목격했다. 나는 누군가를 나의 손가락 틀에 가두어둔 채,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몰랐다. 그래 놓고 뒤통수 맞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내 편견이었을 뿐이다. 나와 다른 성질을 가진 사람을 100%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 시에 나오는 인물의 일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건 내가 그들의 단면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해를 못한 데에 대한 자기방어일 수도 있지만, 물음표가 가득한 감상도 삶의 일부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해하진 못했을지라도 기억에 남는 시는 있었다.
종려나무가 있었다.
그는 이 땅에 살면서 많은 일을 겪었고, 그중에서 어떤 시간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시간에 그는 자주 고개를 숙였고, 남몰래 주먹을 쥐었고, 그러다 하품을 하였고, 이대로 끝이 난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종려나무> 중에서
이 부분이 기억에 남는 건, 요즘의 생각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삶을 살아낸다기보다, 삶을 흘려보낸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몇 가지 일은 기억이 나지 않고, 가끔은 힘들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기억나지 않는 것. 이것이 내가 사는 삶이자 대부분이 살아가는 시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이 부분이 기억에 남았다.
마지막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지 식물원에 입장한 내가, 언제인지 모를 퇴장시간까지 되도록 많은 식물을 보고 떠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현재 내가 꿈꿀 수 있는 최대한의 욕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