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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룰루 Sep 27. 2021

미국에서 만난 적군 같은 아군, 나탈리아 교수님

나탈리아 교수님은 거침없이 “No!”라고 외치는, 미국에서 보기 힘든 유형의 교수님이었다.      


미국에서 만났던 교수들은 대부분 자유인지 방임인지 모를 방식으로 강의를 진행했다. 강의 시간 대부분은 교수님보다 학생들이 말을 많이 한다. 마치 좋아하는 가수 콘서트에 갔는데 가수 목소리보다 떼창 목소리가 큰 느낌이랄까. 학생들의 질문 중에서 정말 좋은 질문도 있지만, 사전에 공지된 논문 목록만 읽어도 알 수 있는 내용들을 묻는, 혹은 정말 뜬금없는 질문을 하는 질문도 많다. 교수님들은 어떤 질문을 해도 끝까지 들어주고, “오, 너의 말도 일리는 있네.”라며 맞장구를 쳐준다. 질문을 한 학생은 자기 생각을 막 뱉어내고는 다시 수업을 듣는다. 신선했다. 강의실에 모두 침묵하며 앉아있는 우리나라의 강의실과 달랐다.     


‘아, 이게 자유로움의 상징이라는 선진 미국식 교육이구나!’ 감탄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질문이 쏟아지는 강의실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얻으려면 스스로 중심을 잡고 찾아야만 한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교수님들은 모두 상냥하고, 아주 똑똑했으며, 늘 웃으며 “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공부하면서 뭔가 비어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빈 곳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강의 시간엔 내가 아니어도 넘쳐나도록 질문을 하는 (나보다 영어 잘하는) 수많은 학생이 있었고, 교수님들은 너무나도 상냥하고, 인자하게 나를 응원해 줄 뿐이었다.     


그런 나에게 나탈리아 교수님은 학교에 유일하게 비빌 구석이었다. 그녀는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러시아에서 자랐고,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 해체된 이후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오셨단다. 러시아 억양이 묻어나는 알아듣기 힘든 영어를 구사하고, 늘 화려한 스카프와 정장을 갖춰 입은 전형적인 러시아 미인이었다. 미국인처럼 늘 웃는 얼굴도 아니기에 길 가다가 마주쳐도 “와, 러시아 사람이다.” 싶은 인상이었다. 서늘한 눈빛으로 “No!”라고 단호하게 외칠 때면 툰드라 지역의 한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1년 동안 지도교수로 함께하며 논문을 쓰고, 강의를 들으면서 수많은 “No!”를 들어야만 했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너무 협소해서 No. 문제를 분석하는 틀이 너무 부실해서 No. 해결책은 문제를 제대로 분석한 후에 제시해야 하니 너무 섣불리 결론 내리지 말라고 No. 영어 쓰기가 완벽하지 않으니 영어 교정을 받아서 다시 제출하라고 No. 이제 됐겠지, 싶은 순간에도 No. 미국에서 나에게 이렇게 많은 No를 외친 사람은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도로 주행시험을 볼 때 만났던 시험관 이후 처음이었다. (물론 그 시험관과 본 면허시험은 떨어졌다) 덕분에 논문을 마무리하기 위해 한 달 동안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어야 했고, 남편은 공부하는 부인이 집중할 수 있도록 아이를 데리고 매일 잔디밭으로 달려 나갔다. 워드 한가득 달린 코멘트들을 벽돌 깨기 하듯이 지워나가면서 말이다.     


학교생활에서는 더없이 단호한 그녀였지만, 다른 나라에서 아이를 키우는 나를 누구보다 많이 생각해준 사람이었다. 아이가 아파 강의 시간에 넋이 나가 있으면 수업이 끝나고 무슨 일이 있냐며 안부 메일을 보내주었다. 강의 도중 말할 기회를 놓치고 머뭇거리는 영어 말하기가 상대적으로 서툰 나에게 먼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먼저 말해주었다. 가끔 버벅 버벅 말을 하면 본인이 아는 지식을 더해 나의 말을 정확히 옮겨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가 아이를 키우며 공부하고 있다는 것에 과하게 배려해주거나 아이가 없는 것처럼 몰아붙이지 않았다. 가장 인상적인 일은 논문을 마무리하는 막바지에 둘째를 임신해서 산부인과에 가야 했던 시기였다. 미국 병원은 예약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어찌어찌 병원 예약했는데 하필 교수님과의 세미나 시간과 겹쳤다. 교수님께 사정을 설명하고 혹시 세미나 일정을 변경할 수 있는지 메일을 보내자 세미나에 참석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일정 변경 의견을 물어보고 모두 괜찮다고 한다면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덧붙여 논문을 잘 마무리해야 하니 몸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보통은 ‘임신 축하한다, 몸조심해라’라고 하지 않나? 흔하다고 생각했던 Congratulation 한마디조차 메일에 없었다) 그 한 줄에서 임신을 하든 육아를 하든 나의 논문은 교수님이 원하는 수준에서 마무리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비행기 타기 직전까지 책상 앞을 떠나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 시간 동안 아이가 있더라도 내가 걸어오던 길들을 포기하거나 내 인생의 목표가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조금 힘들지언정 아이로 인해 내 모든 것이 무너질 필요는 없다는 희망을 보았달까. 아이를 낳고 본인의 경력을 포기하지 않고 달려온 교수님이기에 본인도 똑같이 겪었을 순간들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와 마지막 미팅에서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직장에서 일하면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많이 활용하도록 해.”라고 하셨겠지.     


한국으로 돌아오고 그녀에게 신년 카드를 미국으로 보내면서 짧은 1년, 그것도 대부분 집에만 있어야만 했던 코로나 시국에 감사 인사 전할 곳이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올해 연말에도 미국으로 카드를 보내려고 한다. 카드에 나는 여전히 공부하고 있고,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고 쓸 수 있기를. 둘째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면서 그냥 매일 똑같이 살고 있다고, 쓰지 않기를. 2021년의 남은 시간들에게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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