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일기 쓴 수험생
2008년 12월 6일
신림동
아, 세상에 생각보다 더 엄청난 분위기.
학교와는 전혀 별개의 세상. 재수 시절 그 느낌.
오랜만에 보니 이상하다.
길 위의 사람들은 거의 내 또래.
20대를 이렇게 보내는 사람들과 나의 모습.
이제야 실감이 난다. 진짜구나. 현실이구나.
2009년 5월 1일
뭔가 기운이 나는 시작이다.
신이 나는 기분이랄까. 더 체계적으로 스스로를 가꾸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아.
앞으로 내 삶이, 계속 이런 기분이기를 하는 마음 :)
2009년 5월 11일
두 발로, 내 스스로 힘으로 이곳에 서서
살아남기란 쉬운 것이 아님을
새삼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23년동안 차곡차곡 쌓아둔 내 모든 것을
나를 위해 쏟아부어야 할 지금
지금을 뚫고 나갔을 때에는
두발로 이곳에 서서
조금은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똑똑하고 현명하게
나를 내가 지킬 수 있게 자라고 싶다.
그동안 참 편히 살았다.
그래서 일어설 수 있는 내가 된거다.
혼자 일어서는 법을 배웠으면
이젠 정말 일어서야 할 때.
떨리고, 무섭지만,
설레고 기대되는 앞으로의 시간들.
그러니 조금 더 단단해지자 :)
2009년 5월 12일
너는 지금 네 앞 길을 잘 걸어가고 있니
일을 벌이기 전에 네 일부터 잘 수습해야 한다.
미래를 생각하지 말고 오늘을 위해서 살자.
2009년 8월
이곳에서 난, 부모님의 딸도, 친구들의 베스트도, 동생의 언니도, 00대 07학번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처음엔 그게 그렇게 싫었다.
세상에서 밀려나 아무도 없는 곳에 그저 버려진 기분이 들어서 정말 끔찍했다.
길 위에 내 이름을 아는 사람도 없고,
내가 어떻게 살든 어느 누구도 나와 관계 맺어 있지 않았다.
어느 순간,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내가 되었을 때 스스로를 지탱시켜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나는 과연 오롯이 혼자서 이 세상을 살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할 줄 알지. 나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를 단단히 세우자. 흔들리지 않는 강함으로
2009년 8월 6일
여태 내가 쓴 것은 무엇이었을까.
섬세한 언어를 1%조차 사용하지 않은 글이 글이었을까.
눈으로, 코로, 귀로, 입으로
정보와 이미지가 끝없이 들어오는데
난,그 중 어느 것에 대해 묘사할 수 없다.
내가 하는 말은
좋다, 싫다, 별로다, 맛있다, 맛없다, 크다
이 따위의 단편적인 어휘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내가 벙어리가 되고
문맹자가 되는 것과 뭐가 다를까
2009년 8월 8일
Body = Flesh + Effort
2009년 9월 생일
生日
한자에는 시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生日을 태어난 날이라고 해석한다.
그렇지만 生日은 살고 있는 날
현재 시제에 가깝지 않을까.
23년째 살아내고 있음을 축하하는 날.
태어나서 처음—처음인지는 모르겠으나,
生하고 있는 스스로를
진심으로 축하하고 싶은 日
2009년 추석
외갓집을 가는 길에 휴게소에 들렀다.
처음 명절의 휴게소에 가서
'이게 명절이구나!’하는 들뜬 기분이 들었다.
23년 살면서 정말 많은 것을 함께한
가족인데도 아직 해본 게 적다.
부모님은 지금이, 네 가족이 간만에 한가한 지금이,
마지막인 것처럼
함께 하는 추억을 더 늘리려고
노력하시는 것 같아 보인다.
날아갈 자식들과 마지막을 즐기 듯이.
언제까지나 함께일꺼라 생각했는데
어떤 의미로든 각자의 삶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공유하는 삶의 조각이 줄어들 수 밖에 없는
당연하지만 슬픈 사실이 왜이리 아픈지
그러니까 더 함께 행복한 이야기를 쌓아야지.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으로 남을 수 있게.
2009년 10월 15일
합격자 발표.
치토스 봉투를 열어 “꽝, 다음 기회에”라는 문구를 보는 기분이었다.
아쉬웠지만 예상 못한 일은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엔 분명 나의 최선이었을 그 답안지.
지금 보면 그저 부족한 것들.
요행이든, 기적이든 조금의 미련이 막연한 기대를 만들었던 시간이 끝나고
남은 건 조금 더 가벼워진 발검이었다.
앞으로 나갈 시간 들은 지금보다 더 힘든 시간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발걸음은 더 가벼울 것 같다.
물론 가슴 한켠은 저릿하다. ‘불합격’ 세글자는 여전히 아프니까.
그렇지만 늘 그랬듯 긴장하고 무장하고 환하게 웃자.
2009년 11월 10일
20세기와 21세기 사이를 가르는 경계에서
나는 한 발 물러선 20세기형 인간이었나보다.
더 이상 적이 없는 세상에서
대안을 찾아야 하는 21세기에
나는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너도, 세상도, 나도 서로가 서로에게
아군이며 적군인 세상에서
내가 더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가장 큰 명제를 되새기지 못했다.
대안이 발전과 미래를 의미한다는 것을
어슴프레 깨닿는다.
21세기형 인간이고 싶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 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대로 세계를 볼 수 있더.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꽥꽥거리며 달뜬 목소시로 네가 있어야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내게 조국은 하나뿐입니다 선생님. 나 자신이죠.
2009년 하반기
시간을 모으는 게 참 좋다.
일기, 스케쥴러, 편지, 사진...
2009년도 남겨졌다.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한 해이지만
그 흔적은 남을 수 밖에 없는 걸.
여기저기 흩어진 기억을 모아 담아내니
정말 2009년과는 안녕을 하는 기분이다.
미처 챙기지 못한 어떤 기억이, 시간이 남아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담아서 봉인해버리니, 다니는 뛰쳐나와 나를 괴롭히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