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취학 아이 둘이랑 박물관이라고?
영국박물관 1차 관람기
우리 가족은 박물관 옆에 살고 있다.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터를 잡고 산다는 것은 어느 장소에 대해 경외감과 놀라움에 더해 연대감과 애착을 갖게 되는 여정이다. 여행길에 만난 박물관은 신기하고 멋진 공간으로 남을 수 있지만, 집 주변에 있는 박물관은 처음 만날 땐 여행길에 만난 신기한 관광지였다가, 어느 날엔 지나가는 길의 풍경이었다가, 어느 날엔 아이들과 소풍 가는 곳이다가, 어느 날엔 잠시 쉬어 가는 쉼터가 된다.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다 보고 가야 한다는 강박 없이 올 때마다 조금씩 찾아보면서 쉬엄쉬엄 쉬어갈 수 있는 곳이 된다.
하지만, 첫 영국박물관은 녹록치 않았다. 런던에 도착하고 일주일이 채 안 되었을 때 아이들과 함께 영국박물관을 찾았다. 무척 더웠던 한여름의 한국을 뒤로하고 쨍하게 파란 하늘의 가을을 맞이한 런던에서 처음으로 찾은 박물관이었다. 집에서 박물관까지 가는 길목의 러셀 스퀘어(Russell Square)에는 주말을 즐기는 런던 사람들과 영국박물관을 향해 바삐 움직이는 전 세계 사람들이 가득했다. 아이들과 벤치에 앉아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먹으며 첫째는 비둘기를 쫓아다녔고, 둘째는 비둘기를 쫓는 첫째를 쫓아다니는 평온한 주말 아침이었다. 공원에서 더 놀고 싶다는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 박물관에 도착했다. 아침 일찍 갔음에도 꽤 긴 줄을 기다려야 했지만, 다행히도 둘째의 유모차 덕분에 우선 입장이 가능한 줄을 따라 간단히 짐 검사를 마치고 박물관에 들어섰다.
박물관보다 기억에 남는 가을의 러셀 스퀘어. 낙엽과 비둘기가 좋은 5세, 3세 어린이와 함께 했다. 정문을 거쳐 그레이트 코트(Great Court)에 들어서자 삼각형 유리지붕 너머로 파란 하늘이 비쳤다. 유리 사이로 스미는 햇볕이 새하얀 대리석 바닥에 부딫혀 하얗게 부서졌다. 아름다웠다. 이집트 미라가 보고 싶다는 첫째를 위해 바로 3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전시실 가득 미라와 미라를 만드는 도구들이 전시되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둘째는 유모차에 앉아 고양이 미라를 보며 즐거워했고, 첫째는 자기 생각보다 큰 규모의 미라에 푹 빠져 한없이 전시품을 들여다보았다. 15분. 미라 전시실에서 아이들이 푹 빠져서 감상을 한 시간은 15분이었다. 이제 다리가 아프다는 첫째와 지루하다는 둘째의 칭얼거림이 시작되었고, 나와 남편은 퇴로를 고민해야 했다. 일단 서둘러 0층으로 내려와 테이블 한자리를 차지한 후 전시를 진지하게 관람한 미취학 두 아이에게 폭풍 칭찬세례를 퍼붓고 준비한 간식을 꺼내 먹였다. 칭얼거림이 폭발하기 직전 무사히 1차 위기 진압에 성공했다.
이대로 그냥 집에 가긴 아쉬운 게 어른들 마음인지라 아이들에게 온갖 허풍과 과장을 섞어 박물관에 더 오래 머무르게 꼬셨다. “덤덤, 검검하고 말하는 돌아저씨도 있어(이스터 석상)! 아까 본 미라를 만든 나라(이집트) 왕도 있대. 한번 가볼래?“라는 영업용 말들을 날렸지만, 간식을 오물거리는 아이들의 눈은 건너편 기념품 가게에 고정되어 있다. "저 쪽에 장난감 많으니까 저기 가자.“ 첫째의 표정이 단호하다. ”음... 우리 돌아저씨 한번만 보고 가자. 금방 볼 수 있어!“ 엄마도 한치의 물러섬이 없다. 아이는 잠시 고민한 후 ”그래 그럼 그것만 보고 장난감 가게 가는거야.“라며 협상을 받아들였다. 다행히 하나는 더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집트 전시실을 거쳐 이스터 석상을 간단히 본 후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던 기념품 가게에 들어섰다. 내가 봐도 재미있는 역사책, 지도책, 그림책과 함께 장난감, 인형, 열쇠고리가 아이들을 유혹했다. 고양이 매니아 둘째는 이집트 고양이 미라를 본떠 만든 봉제 인형(집에 있는 고양이 인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에 빠져 그 앞을 떠나지 못하고, 첫째는 마음에 드는 미라 기념품을 찾아야 한다면서 미라 자석, 미라 열쇠고리, 미라 장식품을 거쳐 미라 손목시계 앞을 서성인다.
”엄마, 미라 시계 너무 멋있어. 이거 사고 싶어.“
”음... 우리 오늘은 기념품을 사러 온 게 아니니까 다음에 살까?“
”다음에 언제?“
”크리스마스에...?“
”크리스마스는 언제 되는데?“
”100밤 자면 크리스마스야.“
”100밤????? 아휴...알았어...“
아이의 양보로 전시실 관람보다 길었던 기념품 가게 관람까지 모두 끝났다.
이집트 상형문자를 그릴 수 있는 자...내가 갖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어 보였다.박물관을 나서니 아이들은 들어올 때의 기세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엄마, 다리아파서 못 걷겠어.“
”집까지 금방 가. 아까 온 만큼만 가면 돼. 한번 해보자!“
”아니, 못 걸어 다리 아파!“
”그럼 중간 공원에서 좀 쉬다가 조금만 더 걸어가자. 공원에서 과자 줄게“
오는 길보다 더 멀고 힘들게 집을 향해 돌아간다. 공원에서 과자를 좀 먹고 반짝 기운이 난 아이들은 또다시 비둘기를 쫓아다니다가도 집에 가자고 하면 다시 다리가 아프단다. 어르고 달래 집으로 돌아왔다. 어른 걸음으로 15분이면 가는 박물관인데도 가는데 1시간, 오는 데 1시간 걸렸고, 전시실은 1시간도 안 본 것 같은데 간식 먹고 기념품 가게에 가는데 1시간을 넘게 썼다. 재미있었냐고 물어보니 아이들은 표정이 밝다. 다음에 가서 꼭 미라 시계를 사 올 거란다.
첫 번째 영국박물관이었다. 영국박물관의 자랑인 로제타석도 보지 못했고, 아시리아 부조는 근처도 못 갔다. 파르테논 신전 전시는 공사 중이라고 하여 입구의 동상 몇 개만 보면서 ‘이게 누구 동상이지?’하며 피차 모르는 사람끼리 어리둥절하다가 돌아왔다. 나와 남편은 기진맥진했고, 아이들은 맛있는 간식과 현란한 기념품 가게가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아이들은 잘 걸었고, 흥미있을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아주 짧지만) 전시를 보면서 즐거워했다. 나와 남편도 마음을 내려놓고 아이들을 보채거나 독촉하지 않는 연습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앞으로 아이들과 영국박물관을 다니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들도 머릿속에 그려졌다. 역사에 취약한 나이지만 아이들에게 쉽게 전시 설명을 해주기 위해 사전에 공부하고, 전시실 동선도 미리 확인해서 길을 잃고 헤매지 않도록 자주 가보기로 했다. 박물관에서 제공하는 아이들 프로그램도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박물관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첫 번째 영국박물관 기행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