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tional Gallery 1차 관람기
영국에 도착한 후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내셔널 갤러리와 영국박물관 가이드 투어를 신청했다. 영국박물관은 아이들과 가보니 나의 미천한 세계사 지식의 한계가 느껴져 전문가의 설명이 절실히 필요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으나, 내셔널 갤러리는 미술사적 지식을 얻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어떤 작품이 이곳에서 유명한지 개략적인 관람 기준을 잡기 위해서였다. 미술 필기시험은 언제나 만점을 받아온 나는 말 그대로 ‘글로 그림을 배운’ 먹물이었고, 관광지에 가면 미술관을 1순위로 갈 정도로 관심 분야였기 때문에 큰 기대없이 투어에 참여했다.
더욱이 난 내셔널 갤러리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다. 르네상스의 꽃을 담고 있는 바티칸 미술관, 인상주의 화가들의 집합인 오르셰 미술관 사이에서 내셔널 갤러리는 뭔가 어중간한 느낌이 있었다. 그렇다고 영국 화가 중에 엄청나게 유명하다거나 기대되는 작가도 크게 없었다. 어깨 넘어로 윌리엄 터너와 존 콘스타블의 이름을 듣기는 했지만, 젊은 시절 유럽 여행을 하며 지치도록 미술관을 다닌 터라 기대가 크지 않았다.
아침 10시 트라팔가 광장에서 만나기로 하였으나, 8시 45분 아이들 등교를 마치고 설렁설렁 걸어가니 9시 반이 되지 않아 내셔널 갤러리 앞에 도착했다. 트라팔가 광장은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고, 가을바람이 가볍게 불어와 난간에 걸터앉아 사람을 구경하기 좋았다. 부지런하고 시차 적응이 어려운 한국인 관광객들이 꽤 많이 보였고, 저 멀리 빅벤이 희미하게 보였다. 시간이 다가오고 가이드 분과 동행하게 된 분들을 만나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시작은 중세 미술이었다. 라틴어로 적힌 성경의 내용을 쉽게 전달하기 위해 그려진 종교적 색채가 강한 시기의 그림들인 만큼 이를 해석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이콘(icon)에 대한 설명이 시작이었다. 성모 마리아는 푸른 옷, 성인은 머리 위에 둥근 헤일로, 아기 예수는 두 개 또는 세 개의 손가락을 편 모습 등 그림을 이해하기 위한 정보를 쉽고 간결하게 배우며 지나갔다.
다음은 르네상스였다. 인본주의에 기반하여 그리스 신화 등 다신교 시절의 문화를 다시 부흥시켜 인간의 생각, 기분 등을 반영한 그림들이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미술 기법 측면에서 발전이 큰 시기였는데 그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3대 거장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한 설명이 빠지지 않았다. 내셔널 갤러리가 소장한 그림 중심으로 화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 중 다 빈치의 ‘암구레의 성모’와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작품은 당시 이콘을 위반한 화가들이 겪었던 고초, 비싼 물감 제작비용을 조달하기 어려웠던 이야기 등 그림보다 이야기가 즐거운 작품들이었다.
바로크의 렘브란트와 루벤스는 언제봐도 아름다운 작품들이었다. 17세기 이후 그림이 나올수록 점점 눈에 익숙한 그림들이 나오면서 가이드분의 설명을 듣는 재미보다는 전시실을 둘러보는 재미가 더 커져 갔다. 윌리엄 터너 그림이 나올 때도 이미 유튜브로 설명을 잔뜩 듣고 갔던 터라 ‘오, 이게 그때 설명 들었던 그 그림이구나!’ 싶은 정도였으며, ‘어? 유튜브 설명 들을 때 보고 싶다고 생각한 작품은 왜 안보고 지나가지? 어디 있지?’ 싶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인상주의 화가 작품에 갔을 땐 내셔널 갤러리에서 가장 유명한 반 고흐의 ‘해바라기’는 유료 전시인 ‘반 고흐 특별전’에 전시되어 있었고, 조르주 쇠라의 ‘아스니에르에서의 물놀이(Bathers at Asnières)’ 정도의 대작이 눈길을 사로 잡을 뿐이었다.
내셔널 갤러리의 '킥(Kick)'은 미술관을 나오며 하던 가이드분의 인사말씀이었다.
"인상주의 시기의 그림은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자연 풍경을 그대로 담아낼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앞으로의 그림은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가를 고민한 화가들의 결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이 인상주의 화가들이 살았던 그 시대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AI와 인터넷을 통해 예술사적 지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 시대에, 제가 가이드로서, 도슨트로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지식을 전달하는 해설보다 인간의 이야기가 담긴 설명을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오늘 투어가 여러분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었기를 바랍니다."
유튜브로, 블로그로, 책으로 미술관을 다녀온 것처럼 그림 선명하게 볼 수 있고, 누구보다 다양한 지식을 접할 수 있는 세상을 살면서 나는 미술관에서 무엇을 보고 싶은 것이며, 그래서 듣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일까.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한번 전시실을 찾아 전시실 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아 그림을 바라보았다. 작기는 조르주 쇠라, 제작 연도는 1884년, 캔버스에 그린 유화, 작품의 배경은 프랑스 파리 인근의 아스니에르. 그리고 그다음은? 그림이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다음은 무엇이냐고. 지식을 수집하고 그림 사진을 찍었으니 그것으로 끝이냐고. 그래서 내 마음 속에는 무엇이 남았으며, 어떤 이야기가 쌓였냐며. 내셔널 갤러리를 나서며 이곳을 다시, 또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