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박물관 2차 관람기
두 번째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은 가이드 투어로 다녀왔다. 추석 연휴를 맞아 런던 여행을 온 관광객분들과 함께였다. 지금은 낯선 파란 런던의 하늘이 아름다운 날이었다. 가이드분은 런던에서 공연예술 석사 유학을 와서 관련 업종 취업에 성공하신 분으로 예술사나 역사학 전공이 아니었지만, 박물관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신 분이었다. 투어는 파르테논 신전을 닮은 영국박물관 정문에서부터 시작됐다. 인류의 역사를 상징하는 삼각 페디먼트 안의 조각들을 찬찬히 훑어보며 시작한 투어는 첫 예감만큼 즐겁게 진행됐다.
투어 순서는 1층(영국의 Ground floor)의 계몽관, 이집트관, 아시리아관, 그리스관을 순서대로 둘러보고 3층의 이집트 미라 관을 들러 Life and dying 관에서 종료되었다. 가이드분의 설명이 얼마나 명쾌한지 이집트인은 ‘부활’, 아시리아인은 ‘보호’, 그리스인은 ‘인본주의’를 키워드로 유물을 해석할 수 있다면서 시대별 상징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지난해 9월 당시 ‘파르테논 조각상’ 전시가 보수에 들어갔던 터라 해당 전시는 보지 못했지만, 아시리아관의 ‘사자 사냥’을 여유 있게 볼 수 있었다. 아마 대부분의 투어가 비슷한 동선으로 관람을 할 것 같은데 내가 들었던 투어는 한국관을 들르지 않고 영국박물관이 관람객을 대상으로 공모했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들’ 사진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사진 대부분이 가족과 함께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가족과 함께하기 위해 쉽지 않은 길을 거쳐 런던에 온 나에게 작은 위로가 되는 순간이었다.
투어가 끝나갈 즈음 가이드분께 용기 내어 사실 나는 런던에 거주하고 있고, 앞으로 아이들과 박물관에 올 예정인데 어느 전시관을 추천하느냐 물었다. 그러자 가이드분은 고민하면서 “전부 다 좋아요. 아메리카관도, 영국관도 다 좋으니 가능하시다면 다 보세요.”라는 대답해주었다. 이후 3달 동안 영국박물관을 7번 방문하면서 마지막 층 구석구석까지 모든 곳을 가본 결과 그때 그 대답이 너무 맞는 말이라는 것이었다. 전시관 모든 곳이 의미 있고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또 하나 깨달은 점은 투어를 통해 유물에 대한 역사적 지식만이 아니라 방대한 박물관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내는지, 스토리 텔링의 중요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몇 번의 박물관 방문을 통해 당시 투어에서 들은 지식은 사실 박물관에 적힌 설명만 꼼꼼히 읽어도 알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박물관 오디오 가이드, 관련 서적, 유튜브를 비롯한 다양한 수단을 통해 지식을 접할 경로는 많다. 하지만 전시를 둘러보는 스토리 텔링은 가이드의 역량으로 만들어진다. 듣는 사람이 관심을 가지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 넓은 박물관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가이드의 역할이자 능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7번의 방문 중 아이들과 함께한 2번의 방문을 통해 양 떼 몰이처럼 청중의 관심을 사로잡으면서 지식을 전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스토리 텔링의 역량은 풍부한 지식을 토대로 가능하다. 당시 나는 투어를 듣는 내내 전시품을 감상하기보다 가이드분의 설명을 핸드폰에 기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시 영국박물관을 찾았을 때 전시품에 대해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기 위해서는 이렇게라도 벼락치기 공부해야 했기 때문이다. 설명을 들을수록 나름대로 상식이 풍부하다고 자부하던 나의 지식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었으며, 그동안 나는 내 앞길만 살아간다고 세상을 둘러싼 것들에 대해 무관심한 것 아니었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 저녁 식사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보고 온 전시를 이야기하는데 수박 겉핥기식으로 습득한 지식이라 내 언어로 잘 설명되지 않은데다 들은 내용을 그대로 읊는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촘촘히 쌓인 지식을 토대로 이야기를 엮는 것은 어지간한 내공이 아니고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후 박물관을 여러 번 드나들며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박물관을 즐기는 모습을 보았다. 서구권 투어 관광객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세부 전시에 가면 많이 보이는데 초등학교부터 이집트 문명, 그리스 신화를 배우며 자라온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가장 생소하고 신기한 문명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추측해보았다. 해당 전시관에서 아시아권 단체 관람객은 거의 보지 못한 듯하다. 영국 초등학생들은 학교 커리큘럼에 따라 영국 역사를 배우는 어린 친구들은 3층에서, 그리스와 이집트 문명을 배우는 고학년 친구들은 0층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학교 소풍 조끼를 입고 활동지를 들고 다닌다.
얼마전 조성진 작가와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All the beauty in the world)’의 저자인 패트릭 브링리(Patrick Bringley) 작가의 인터뷰 영상을 보았다. 패트릭 브링리 작가의 말 중 박물관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수많은 이야기에 대한 가능성을 담은 말이 깊게 와닿았다. “책을 읽을 때는 누구나 비슷한 방식으로 책을 읽어요. 책에는 시작과 끝이 있잖아요. 그런데 박물관은 그렇지 않아요. 일차원적이지 않죠. 사람들이 박물관에 가면 다양한 구역으로 흩어져서 각자 다른 것을 할 수 있죠.”
가이드 투어를 통한 두 번째 영국박물관 방문 이후 부족한 지식을 채워야 한다는 갈급함으로 관련 서적을 찾아 읽으려 하고, 박물관과 미술관을 방문할 때마다 ‘그날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을 한다. 박물관에 가서 머물고 전시품을 보는 시간보다 그에 앞서 책을 읽고 돌아와서 글을 쓰는 시간이 점점 늘어난다. 기분 좋은 변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