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상맞고 지겹고 짜증 나는 음식

-시래기 된장국

by 이 허

시래기 된장국이라면 쳐다보기도 싫고 냄새도 짜증스럽게 역했다. 특히 김장철을 시작으로 겨울에서 봄이 어스름 올 때까 지 시래기 된장국을 물리도록 먹었다. 일주일이면 서 너번 이상을 시래기 된장국에 무채를 썰어놓은 동치미는 거의 매일 밥상 위에 올라오다시피 했다. 시래기 된장국이 아닌 날에는 집에서 직접 띠운 청국장이나 김치찌개로 메꿔졌다. 당연히 청국장이나 김치찌개에는 두부조차 없었다. 어떤 때는 엄마가 뭇국이라는 것을 끓이기도 했는데 이는 소고기나 그런 동물성 단백질이 들어간 고소한 기름 냄새가 나는 국이 아니라 참기름에 무를 볶다가 고춧가루를 넣고 소금과 조선간장, 다진 마늘 등으로 간을 맞춘 시래기 된장 국보다 더 한 최악의 국이었다. 난 대략 이런 메뉴로 겨울을 나고 초등학교를 보내고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난 80년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용산구 한남동에서 보냈다. 지금이야 한남동은 누구나 아는 부자동네다. 물론 그때도 한남동은 부자동네가 맞긴 했지만 모든 한남동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우리 집은 한남대교를 지나가다 보이는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제3한강교라고 불리는 다리 위를 지나갈 때 보이는 맨 꼭대기 언덕에 교회 첨탑이 보이는 산꼭대기 달동네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난 네 명의 형제 중 막내였다. 우리 아버지는 부재중일 때가 많았다. 지방에서 일을 하시면서 돈이 되는대로 생활비를 조금씩 집으로 보냈다. 그 돈으로 엄마는 나를 포함해 네 명의 자식들을 겨울이면 이렇게 시래깃국을 먹여가면서 억척스럽게 키웠다. 아버지가 거의 집에 계시지 않는 우리 다섯 식구의 삶은 궁상 맞고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억척스럽고 처절하기까지 했다. 시래기 된장국도 물렸지만 더 난감했던 것은 청국장이었다. 지금이라고 청국장 냄새가 부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당시 엄마는 집에서 청국장을 직접 띄웠다. 콤콤하고 꼬릿 꼬릿 한 냄새나는 청국장 항아리는 항상 내방의 젤 뜨신 아랫목 한쪽 구석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했다.


내 기억에는 간식을 양껏 먹다가 입이 달아져서 끼니를 건너뛴 기억도 없다. 그저 시래깃국과 뭇국이 신물 나서 친구네 집에서 밥을 먹었다는 거짓말로 일부러 끼니를 거르기도 했다. 특히 겨울이면 시래깃국을 거의 아침저녁으로 먹다시피 했고. 점심엔 김장 때 담근 동치미 무를 채를 썰어 커다란 양푼에 넣고 밥에다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어 쓱쓱 비벼서 식구 숫자대로 숟가락 몇 개를 양푼에다 꽂아서 놓는 게 보통 점심밥이고. 어떤 때는 시골에서 보내온 고구마나 감자로 때우기가 다반사였다. 엄마는 우리 형제들을 이따위로 허접하게 먹이면서도 속은 어땠을지는 몰라도 겉으로는 전혀 미안한 기색 한 번이 없었다. 오히려 당당하게 뭐라 나무라신 적도 있었다. 그런 엄마의 태도가 위압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불만을 토로해도 결국에는 아무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기에 좀처럼 반찬투정이나 불평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난 시래시 된장국과 초라한 밥상을 볼 때마다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속으로 이렇게 욕을 해댔다.

「‘쓰레기 국!’ , ‘쓰레기 국!’ , ‘더러운 쓰레기 국!’」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그 당시 초등생이었던 내 맨 위로 언니가 있었다. 언니는 사춘기가 한 창인 여학생이었는데, 이 같은 허접한 도시락 반찬 때문에 대놓고 툴툴거리는 일이 잦았다. 한 번은 일부러 보란 듯이 엄마 앞에서 도시락을 던져두고 학교를 가버린 것이다. 엄마는 등을 돌린 채 아무 말 없이 코를 들이마시는 소리를 내며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언제나 센 척만 하는 엄마를 보다 예상치 못한 이런 엄마의 뒷모습은 나의 어린 마음에도 떨떠름하고, 쓰리고, 산란스럽고 개운치 못한 심정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렇다고 언니를 책망하면서 엄마를 위로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엄마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시래깃국이 쓰레기 국’이라는 공식은 한 동안 변하지 않았다.


내가 중학교 1, 2 학년쯤을 지나면서 아버지의 돈벌이가 차츰 나아지기 시작하면서 우리 집의 살림살이도 좀 더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시래기 된장국이 식탁에서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일주일에 아침저녁으로 서 너번 이상 먹었던 시래기 된장국은 두어 번으로 줄었다. 여전히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이도 저도 아닌 뭇국은 여전히 밥상 위에 올라왔다. 시래기 된장국과 뭇국, 청국장 등이 밥상 위에 올라오는 횟수가 줄어들어 갈수록 나 역시 시래기 된장국에 손을 대는 일도 드물어졌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을 지나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경제활동이 가능해졌을 때는 시래기 된장국이나 청국장 등은 좀처럼 거들떠보지 않았다. 주위에서 시래깃국이나 청국장 등을 왜 안 먹는지를 물어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 내가 시래기나 된장국, 청국장 등을 왜 안 먹는 지를 굳이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시래깃국은 질리기도 질린 맛이지만 그 질린 만큼 어렸을 적의 궁상맞고 궁색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도구와 같았다. 머릿속에 굳이 떠올리고 싶지도 않고 잊을 수만 있다면 잊고 싶은 음식이었고, 실제로 난 그 시래깃국이라는 음식을 한 동안 스스로가 지우면서 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 꼴도 보기 싫다 못해 트라우마 같았던 시래기 된장국은 뜻하지 않은 계기로 소환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건 내가 결혼을 하고 첫째를 임신 중이었다. 무엇이든지 역한 냄새 때문에 보리차 조차 토해내기 일쑤였다. 냉장고 문은 냄새 때문에 속이 뒤집힐 지경이어서 열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어쩔 땐 텔레비전에서 치킨이 먹음직스럽게 기름 속에서 튀겨지는 광고만 봐도 뱃멀미 하듯 속이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나의 이런 유별난 입덧 때문에 남편은 끼니를 한동안 밖에서 해결해야 했고, 심지어 달걀 프라이 조차 집에서 해 먹을 수 없는 지경까지 갔다.

입덧으로 고생하면서 직장과 집을 오가는 내가 마음에 걸렸는지 하루는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좀 어떠니? 엄마도 어찌나 입덧이 심했던지... 참 별걸 다 닮는구나..」

「“그 입덧 이란 게.. 당최 먹질 못하니.. 그래도 뭐가 먹고 싶은지 곰곰이 생각해봐라.. 생각나는 게 없진 않을 거다.”」

엄마 말을 듣고 보니 요즘 통 먹기만 하면 토해대고 속이 울렁거려서 끼니로 먹은 거라고는 생수에 사이다가 전부였다. 예전 같지 않게 예민해진 대다가 입덧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인지 말할 기운도 없었다.


괴롭기만 하던 입덧에도 하루하루가 갈수록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갈 때쯤이었다. 엄마 말대로 정말 생각지도 못 한 음식이 떠올랐다. 근데 그게 하필이면 시래기 된장국이었다. 엄마가 옛날에 신물 나게 끓여대던 시래기 된장국 국물을 한 수저 떠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바로 엄마에게 시래기 된장국이 먹고 싶으니 내일 해 주실 수 있는지 부탁을 드렸다. 엄마는 좀 황당해하셨다. 왜 하필 하고 많은 음식 중 시래기 된장국 이냐고 반문하셨다.

난 회사에 연차를 내고 다음날 바로 친정으로 갔다. 친정집 현관문을 여니 예전의 그 시래기 된장국 냄새가 풍겨왔다. 냄비에는 시래깃국이 뭉근하게 약불에서 끓여지고 있었다. 엄마는 식탁에 시래깃국에 하얀 쌀밥과 김치, 계란찜으로 단출하게 점심상을 차리셨다. 속이 약간 울렁거리기도 했지만 특유의 쿰쿰 구수한 된장 냄새가 반갑기도 했다. 처음엔 수저로 몇 번 떠먹고 끝낼 줄 알았다. 하지만 수저로 국물과 시래기 건더기를 떠서 맛보고는 그 자리에서 공깃밥 한 그릇을 바로 시래깃국에다 말았다. 건더기라곤 된장국물에 시래기만 잔뜩 떠있는 국에 밥 한 공기를 수저로 꾹꾹 누루고 밥을 수저로 국물에 담갔다 섞었다 하며 시래기 건더기와 함께 밥을 수저로 크게 한 숟가락 떠서 후불 어가며 입속에 밀어 넣었다. 이게 이렇게나 맛있는 음식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입속에 있는 밥을 전부 씹어 삼키는 둥 마는 둥 하며 또 한 숟가락을 크게 떠서 입속으로 연거푸 가져갔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국그릇에 머리를 박다 시 피하고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이 엄마에게는 생소했는지..

「 “너 며칠 굶었냐?”」

「 “응... 요즘.. 거의 생수랑 사이다 밖에 못 먹었어... 장서방이 이것저것 사다주기는 했는데... 냄새도 나고 역해서.. 다 토했거든..”」

그래도 엄마는 당신이 차려준 밥상을 맛있다 못해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모습에 안쓰럽기도 하고 이렇게 라도 먹으니 다행스럽고 기특했던 모양이었다.

「 “나도 시래깃국 진짜 오랜만에 끓인다. 너희들 어렸을 때 하도 끓여대서 냄새도 맡기 싫었거든..”」

그러고 보니 내가 밥 두 공기에 시래기 된장국 두 그릇을 말아서 먹는 동안 엄마는 시래깃국을 반 그릇 못되게 떠서 그마저도 몇 숟가락 드시지도 않았다. 난 엄마 국대접에 남은 시래깃국을 내 국그릇에 마저 부어 그마저 내가 다 해치웠다. 그리고 냄비에 남은 시래기 된장국을 전부 싸서 집으로 가져왔다.


한 때 시래깃국은 쓰레기 국이라고 속으로 경멸했던 어린 시절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그 시래기 된장국 때문에 야속하고 인정머리 없어 보이기까지 했던 엄마, 툴툴거리던 언니 때문에 훌쩍 거리며 코를 들이마시던 엄마의 뒷모습도 생각났다. 엄마도 그 시래기 된장국이 나만큼이나 싫었나 보다.

「“너도 알다시피 그땐 얼마나 없이 살았냐?, 다른 집처럼 겨울에 너희들 한테 호빵을 제대로 먹이기를 했니, 그렇다고 귤을 실컷 사서 까주기를 했냐?.. 네가 귤을 엄청 좋아하는 거 뻔히 아는데....”」

솔직히 난 그때 엄마의 고되었던 삶에 진심으로 마음 깊은 측은함이 느껴졌다. 어렸을 적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가면 채소 장사 아저씨가 팔다 버린 배추 시래기까지 몽땅 주워 오셨다. 그 또한 나에겐 보기 싫은 엄마의 모습 중 하나였다.


내가 아는 엄마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자존심이 무척이나 센 사람이었다. 결코 자식 앞에서 신세 한탄이나 아쉬운 소리 한 번이 없다시피 했다. 어찌 보면 곧 죽어도 폼생폼사였는지 모른다. 냉수로 헛배를 채울지언정 그 앞에선 보란 듯이 트림을 할 양반이다. 시래기 된장국으로 겨울을 버틸지언정 단 한 번도 넷이나 되는 자식들의 학교 등록금이나 수업료 등을 밀려본 적이 없었다. 형편 때문에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던 적도 없었다. 더군다나 남에게 돈을 꾼다는 것은 내가 알기로는 굶어 죽을지언정 당신 에겐 결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엄마는 특유의 신념 어린 삶 속에 어린 자식들을 끌어들이고 우리 형제들은 그 속에서 그렇게 키워졌다.


엄마는 지금도 그 시절 당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구구절절한 고생 담은 좀처럼 꺼내시지는 않으신다. 그냥 그 또한 이미 지나갔으려니 하시는 것 같다. 그래도 한 창 먹을 시기에 자식들을 제대로 못 먹인 것은 항상 마음에 걸리기는 한지 어쩔 땐 그때 해주지 못한 것을 손주들에게 원 없이 해주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특히 전라도가 고향인 엄마는 손주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남도의 음식 맛을 제대로 보여주셨다. 맛깔스럽게 양념한 불고기 국물을 어린 손주들 체할까 싶어 질척하게 지은 밥에다 쓱쓱 비벼 작은 수저로 떠먹여 주며 흐뭇해하셨다. 손주들이 차츰 커가면서 엄마는 참기름과 깨소금으로 조 무조 물 양념한 죽순 볶음을 밥 위에 올려주기도 하셨다. 허여 멀 것 한 개성 없어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특유의 씹히는 식감에 씹을수록 고소한 단맛이 살짝 스미는 죽순의 맛은 또 그다음의 젓가락질을 부른다.

제삿날이면 엄마는 손주들을 당신을 중심으로 한상에 옹기종기 모아놓으신다. 제사상에 올렸던 병어를 참기름과 식용유를 두르고 칼집을 보기 좋게 넣고 그 위에 굵은소금을 살짝 뿌려 구우신다. 생선 중 유난히 햄버거 스테이크 같은 맛이 나는 병어의 두툼하고 폭신한 살을 한입 크기로 젓가락으로 똑똑 살을 발라서 손주들의 밥숟가락 위에 너나 할 것 없이 올려주신다. 흰쌀밥 한 수저에 먹음직하니 고소하게 구워진 병어살 한 점에 그 위에 돌산 갓김치도 한입 크기로 잘라 덤으로 같이 올려주시는 것이다. 손주들이 어렸을 땐 김치를 물에 씻어 굴비나 병어, 서대 조림 같은 생선위에 올려주시기도 하셨다. 이러니 어려서부터 이런 맛을 선보여준 할머니를 손주들은 안 좋아하고 안 따를 수가 없는 것이다. 손주들이 이렇게 밥 한 공기를 다 비울 때까지 엄마는 생선이나 고기 한 점을 좀처럼 당신 입에 대지도 않으신다. 손주들의 맛나게 우물거리는 입모양에 그저 그냥 좋으신 거다.


난 우리 애들한테 시래기 된장국에 얽힌 할머니의 옛날 그때 이야기는 굳이 해주지 않는다. 이야기를 한들 애들은 믿지 않을게 뻔하기 때문이다. 우리 애들 뿐만 아니라 손주들에게 할머니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 그이 상의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추운 겨울이면 엄마는 손주들의 발갛게 시려진 작은 얼굴에 당신의 따뜻한 손을 갖다 대시고 차가워진 조그만 손을 꽉 쥐고 그 위에 따스한 입김을 불어주신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팥이든 찐빵을 내어주시고 귤을 까서 손주들 입에 넣어주는 모습에 가끔은 어릴 적 생각이 나기도 한다.

그 옛날의 궁색했던 기억은 나에게도 다 지나간 일이 되었다. 그때의 엄마와 지금의 엄마는 분명 다른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바뀌었고, 나도 시간의 둘레를 지나오면서 그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 집 식탁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시래기 된장국과 청국장 등이 올라온다. 나의 어린 시절 과는 달리 애들은 별 거부감 없이 시래기 된장국과 청국장 특유의 맛을 즐긴다. 어쩌다 옛날 생각이 스치면 시래기 된장국을 먹는 애들의 표정을 슬쩍 훔쳐볼 때도 있다. 혹시나 그때의 나처럼 ‘시래깃국은 쓰레기 국’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다행히 그런 표정은 읽히지 않는다. 뭐든 맛나게 먹어주고 ‘엄마 집밥’이 최고라는 귀여운 애들만 보일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초고도 경단녀 이력서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