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에서 물이 떨어진다.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뜬다. 시계는 새벽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다. 불을 켜서 주변은 밝혔는데 귓속은 보이지 않는다. 통증도 없고 소리도 잘 들린다. 그런데도 묵직한 느낌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귓속을 건드린다. 마른 면봉이 축축하게 젖어 나온다. 중이염일까. 걱정이 앞선다.
아침 일찍 병원을 찾는다.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고 나온다. 귀를 건드리지 말라는 말뿐 처방전도 없다. 손은 대지도 않았는데 물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건지. 병원 몇 군데를 들렀지만 모두 같은 소리다. 증상은 있는데 처방은 없다. 딴에는 심각한데 병명이 나오질 않으니 미칠 노릇이다.
또르륵 소리에 이물질 바스락거리는 소리까지 더해진다. 벌레가 틀어막고 있는 듯 귓속이 갑갑하다. 나만 들을 수 있는 소음을 어디에 하소연해야 할지. 습관처럼 귀를 문지른다. 몸은 소우주라 하고 귀는 몸의 축소판이라 했던가. 소리가 막힘없이 드나들어야 삶도 균형이 맞춰지는데. 고장 난 귀 때문에 일상이 일그러져 간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되묻는 일이 많아진다. 잘 들으려면 좋은 귀를 가져야 하는데 물 떨어지는 소리가, 사그락 거림이 듣는 걸 불편하게 한다. 귀 쓰기가 꺼려진다. 문 하나를 달아두고는 덜 듣고 더 말을 한다. 소리는 난무한데 못 듣는 게 많다. 이러다가 내 입에서 나온 말조차 알아듣지 못할 날을 맞을까 걱정이 앞선다.
귓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열망 때문일까. 귀가 안 좋아지면서 베이컨을 떠올리는 날이 많아졌다. 얼굴도 모자라 내장까지 해체해 그려둔 것을 작품이라고 세상에 내놓았던 괴짜 화가 베이컨.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고 어려워서 뜯고 뜯어 파편이 된 살점을 예술의 영역에 들여놓은 건지. 귀를 매만지며 속에서 이는 질문을 곱씹는다. 뜯어보면 알 수 있을까. 들여다보면 알게 될까, 알면 뭔가 달라질까 하고. 그렇게 질문을 거듭하다 보면 결국 다시 베이컨 앞이다. 그리고는 이윽고 대답 없는 그림을 앞두고 소리치게 된다. 제발 이 귀 좀 어떻게 해 달라고.
입은 닫혀있고 귀는 열려 있건만 사람들은 듣기보다 말하기를 더 좋아한다. 말은 있는데 소통은 없다. 저마다 자기 소리 내기에만 급급하다. 말이 오해를 부르고 고성이 오가는데도 한 마디도 귀에 들어가지 않는다. 아니라는 부정이 맞는 걸로 바뀌고 거절이 승낙이 되기도 하는 대화에 나도 동참하고 있지는 않을까. 불통이 일상이 되어 가는 시대, 귀가 사라지고 입이 커져가는 사람들을 본다. 언제부터 귀가 사라지기 시작한 건지. 말이 집을 잃고 유령처럼 떠다니기 시작한 건지.
사연을 공유하는 것은 누군가의 짐을 함께 나눠가지는 일이다. 마음이 아닌 소리를 공유했던가 보다. 비밀을 뱉은 후 나를 떠나던 이들의 뒷모습이 귀를 굳게 한 것을 뒤늦게 알아챈다. 속을 터놓고 상처 받은 일은 왜 없었을까. 내 입을 떠난 말은 나조차 알아들을 수 없게 각색되어 떠돌곤 했었다. 소문 속 나는 낯설고 섬뜩했다. 있는 그대로 듣고 말하는 게 그토록 어려운 일인지 몰랐다. 말에 귀와 가슴을 베였다.
열고 닫는 데 있어 귀는 자유롭지 못하다. 항상 열려있기에 닫히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막힐 일도 없을 거라 단정한다. 과연 그럴까. 쓰지 않는 기관은 퇴화하기 마련이다. 귀를 가지고도 듣지 못하는 건 병명은 없는데 물이 나오는 귀와 다르지 않다. 귀는 마음의 소리가 드나들어야 비로소 귀일 수 있다. 닦아주고 청소해주며 제대로 듣는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언제 잘려나갈지 모를 예민한 기관이 귀인 것이다.
귀가 다시 운다. 눈물 같은 물을 또 닦아 낸다. 사는 데 지쳐 혹은 사람에 데어 부지불식간에 귀를 닫아버린 건 아니었나 되돌아본다. 말에 실어 보낸 마음이 귓전을 맴돌다 돌아간 일도 적지 않았을 터. 귀를 여는 건 마음을 여는 일이다. 제대로 들어야 제대로 말도 할 수 있다. 말이 머물 집이 될 진짜 귀를 붙여야겠다. 혹한의 추위에서 집이 되어주는 이글루처럼 세파에 다친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귀를 제자리에 단단히 붙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