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관조

by GZ

바람을 불러본다. 흰 종이를 앞에 두고. 백지를 응시한다. 허연 평지에서 파문이 일기라도 할 듯 멍하니 하얀 땅을 들여다본다. 눈에서는 검은 물결이 속절없이 일렁이는데 손은 굳어 있다. 사각의 대지는 고요하기만 하다. 산이 갈라지고 땅이 치솟고 바다가 뒤집히고.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파고이거늘 흰 종이를 대면 중인 마음은 망망대해의 일엽편주처럼 흔들린다.

적당히 물기를 머금은 바람 한 점이면 되는데. 메마른 백토 위 하늘은 시멘트처럼 딱딱하다. 공기는 멎었건만 심사는 속절없이 복잡하다. 부대끼는 마음이 잭슨 폴록의 붓질이 되어 속을 뒤집고 들어온다. 기름 붓이 그려내는 감정의 추상화로 가슴은 여백을 잃어간다. 불가해한 불균형에 현기증이 일더니 이내 눈앞이 아득해진다.

천천히 숨을 뱉는다. 날숨이 폐를 거쳐 입을 지나온다. 탄식이 되어 명치에 맺힌 심사(心事)의 요동을 본다. 기억 속 어딘가에 묻어둔 나직한 목소리와 뽀얀 연기와 연노랑 빛이 고개를 든다. 그날을 상기하고서야 알아챈다. 해가 잘 들던 어느 오후의 한때가 소화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살풀이 춤사위로 형상화된 말의 몸짓은 생생하게 남았는데 활자는 사라졌다. 그 발화가 나를 해 할 새라 서둘러 뭉개버렸기 때문이리라.

차마 뱉지 못한, 생이 녹록지만은 않더라는 말을 반추한다. 천천히 어깨를 내려놓으며 유약함을 곱씹는다. 입가에 걸린 한숨 또한 바람일 터, 소용돌이치는 마음이 몸 밖으로 내보낸 살아있음의 숨결일 터. 안에서 나온 미풍이 뒤통수를 치고 간다. 좀한바람이 남긴 손길이 예상보다 매섭다. 어이하여 타인의 말에 이토록 대책 없이 휘둘리는가. 속없는 조언에 왜 치열했던 내 세월을 깎아내리려 하는가. 그 몇 마디가 뭐라고 허연 종이를 앞에 두고도 한 줄도 내려놓지 못하는가.

매질이 된 바람을 머금고 손을 움직인다. 펜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귀를 타고 들어온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수를 놓듯 한 자씩 글을 내려두며 빈 곳을 채워간다. 심장을 조이고 있던 실이 풀려나오더니 백지가 글자를 찾고 마른 대기는 춤을 추기 시작한다. 평면의 투명한 공간을 평원 삼아 탁한 숨을 덜어낸다. 들숨과 날숨이 교차한다. 그사이 지면(紙面)은 평일 오후 미술관에서의 기억을 불러놓고 있다.

전시실을 거닌다. 사방이 희다. 하얀 벽 위에 놓인 허옇고 검은 그림이 물방울이 되어 눈에 맺힌다. 눈물을 받아내듯 작품들을 가슴에 담는다. 한지와 물감 연필 자국이 전부인 작품들의 어루만짐을 상처 위에 덧댄다. 캔버스는 말이 없건만 너덜너덜한 가슴에서는 새살이 돋아난다. 가로막힌 방 어딘가에서부터 꽃바람이 이는가 싶더니 어디서 불어왔는지 모를 왜바람이 등을 다독이고 간다.

바람 소리를 따라 선과 색으로 구현된 세상을 마주한다. 화가는 흔하디 흔한 재료로 완벽한 세계를 만들어내 두었고 허연 이 공간은 작품에 예술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았다. 그리고 그림은 공기의 흐름이 되어 내게 안겼다. 산들바람이 귀를 매만지고 볼을 쓰다듬고 겨드랑이를 간질이고. 두 팔을 문지르며 하얀 공간을 거닐며 예술가의 시간을 넘어다본다. 공기가 움직이는 것처럼 부단히 움직일 것, 그 결을 따라 함께 거닐 것, 폭우가 몰아치고 광풍이 불어닥칠 때면 흐름을 관조할 것. 전시실 하늘이 건넨 바람의 속삭임을 듣는다.

지하로 발길을 옮긴다. 걸으며 생각한다. 바람이 그러했듯 때마다 내 상처를 어루만져 준 것은 실재하지 않았던 무형의 무엇이었다고. 손등을 할퀴고 가슴을 후벼 파고 등을 내리친 것 또한 형체 없이 주변을 떠돌기는 마찬가지였을 터. 어쩌면 나는 규정할 수 없는 미지의 무엇에 위안받고 또 상처 받았는지도 모른다. 바람에 경계가 없는 것처럼 아픔과 위로는 한 데서 나왔을지도 모른다.

명지바람이 분다. 겨드랑이가 간질거리더니 양팔이 들썩인다. 폐부가 부풀어 오른다. 바람에 날리는 민들레 씨처럼 흐름에 몸을 맡겨 봐야겠다. 스쳐 가는 입김을 붙들고 타인을 원망하지도 내 생을 한하는 어리석음을 자초하지도 말아야겠다. 바람이 한 곳에 머무르지 않듯, 초침이 쉼 없이 움직이듯, 이 또한 생의 한 흐름일지니 나를 둘러싼 삶의 결을 관조해야겠다. 한 방향으로만 부는 시간의 속삭임에 귀를 열어두리라.

하늬바람이 일렁인다. 가을이 오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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