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나라는 浮游

by GZ

뽀얗고 검다. 연기다. 피해야 하는데 움직일 수 없다. 살려달라고 외치려 목을 쥐어짠다. 소리는 혀끝에 멎어있다. 손가락은 돌덩이처럼 무겁다. 정체 모를 그것과 나뿐, 인적은 느껴지지 않는다. 고립무원에서 나를 구해낼 수 있는 유일한 이는 나 자신이다. 이 지옥을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눈을 감는다. 두려움이 야금야금 나를 먹어간다. 이러다가는 부지불식간에 정체모를 저것에 먹혀버릴지 모른다. 앓는 소리와 함께 눈을 뜬다. 멀리서부터 빛이 번져 온다. 시계가 보이고 이불이 만져지고 베개가 눈에 들어온다. 저리는 팔다리를 주무르며 생각한다. 나쁜 꿈을 꾼 거라고.

악몽이 잦다. 가위에 눌리는 일이 없었는데 가슴을 움켜쥐며 깨는 밤이 많다. 꿈에 시달리다 깬 저녁에는 미국에 있는 너를, 교단에 선 너를, 아직도 펜을 쥐고 있는 나를 눈앞에 불러낸다. 노력을 게을리 한 건 아니었을까, 패기만 믿고 섣부르게 앞날을 판단한 것은 아니었을까, 세상은 얕본 건 아니었을까. 그러다 보면 우리네 꿈은 어디쯤 당도해 있는지, 우리가 그리던 미래는 어디에 닿아있는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답이 없는 자문에 숨이 가빠오고 가슴이 뻐근해져 오고. 오늘 밤은 또 얼마나 길어질까.

이국 생활 십 년. 앞날을 담보로 젊음을 삼킨 이국은 너를 빈손으로 한국으로 돌려보냈다. 경제 불황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너는 한국에 올 때마다 들르는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 불투명한 미래와 외로움, 배신감 때문이 너를 갉아먹고 있었다. 한국은 그런 너를 이방인이라며 홀대했다. 한 시대를 구가한 압구정 거리 어디. 영혼을 잃어가는 너와 혼이 사멸해가는 내가 찬란했던 앞날과 처절한 실패를 이야기한다. 누구보다 성공에 목말라하던 네가 말한다. 사는 게 생각처럼 되지는 않더라고. 우리의 꿈은 어디로 간 거냐고. 대체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여름에 교직에 있는 친구가 휴직을 했다며 안부를 전해왔다. 졸업과 동시에 교사가 되었으니 십 년 만의 휴식이었다. 국제미아가 된 친구들과 경력이 단절된 지인들과 여전히 구직 중인 이들의 갈급함에서 그녀는 한 발짝 멀리 떨어져 있었다. 직장이 해결됐으니 일로 인한 걱정은 없어야 하는데 안정적인 그 일이 족쇄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벗어나고 싶은데 현실이 가진 걸 놓지 못하게 한다고 그게 그녀를 몰아 대는 통에 숨을 쉴 수 없다고 했다. 파고 없는 삶에 대한 간절함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 자리에는 지금 뭐가 놓여있을까.

열심히 살면 성공은 자연스레 주어지는 것이어야 했다. 안정된 직장, 하고 싶은 일, 고액 연봉, 집, 차, 결혼, 행복. 그게 이 시대가 성실을 담보로 제시한 성공이었다. 그 허상에 맞춰 우리는 미국행을 결정하고 공직을 택하고 펜을 쥐는 길로 들어섰다. 주변이 온통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뿐인데 성공했다고 하는 이는 한 명도 없다. 무언가를 가지고자 하면서도 정작 그게 무엇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삶은 과정 그 자체다. 직업도 직함도 심지어는 꿈도 성패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쥔 것이 독이 된 이들을 적지 않게 보지 않았던가. 가진 것을 제 힘으로만 이룬 것처럼 굴던 딱딱한 얼굴은 또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타인을 짓밟고 올라서는 것, 고지(高地)를 점령한 듯 인맥을 자랑삼는 것, 안정된 지위를 앞세워 빈손을 깔보는 것을 과연 성공이라 할 수 있을까.

남들보다 높이 남들보다 빨리 남들보다 많이. 타인을 중심에 둔 인생에 익숙해져 가는 사이 어쩌면 우리는 성공이라는 유령에 홀려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정체 모를 괴물이 등장하는 악몽에 밤마다 시달리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자각이 들 때마다 곱씹는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던 누군가의 말을.

성취에 가위눌리고 있는 이들의 분투를 응원한다. 밤마다 이룩하는 삶을 붙들고 악몽을 마주해온 내 삶을 다독인다. 너와 내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유령을 떨쳐내고 만나게 될 날을 기대한다. 유령에 눈멀지 않기를, 실체 없는 허상에 홀리는 일이 없기를, 우리의 어리석음이 또 다른 유령을 만들어내는 일이 더는 없기를. 혼잣말을 되뇌며 눈을 내리감는다. 까맣고 뽀얗다. 투명하고 하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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