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돎
손톱이 지붕같이 내려앉았다. 엊그제 정리했는데 금세 또 길어 나왔다. 제때 자르지 않으면 타자기 두드리는 데 지장을 받을 것이다. 손톱 깎기를 들고 앉아 물끄러미 손을 쳐다본다. 끊임없이 자라고 잘리기를 반복하는 것을 숙명으로 타고났거늘, 시간을 끊어내는 것 같아 깎기가 못내 아쉽다.
손톱이 마른 소리를 내며 잘려나간다. 켜켜이 쌓인 지난날도 함께 사라져간다. 처마 같던 열 개의 조각이 푸념이 되어 놓인다. 오늘을 맞이하는 게 어제에 최선을 다했음을 의미하지는 않을 터. 청춘을 다 바쳤다고 생각한 길에 정말 충실했는지 자신할 수가 없다.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지는 않았나, 삶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진 않았나 하며 지난날을 돌아본다.
새 작품에 들어가기 전이면 거르지 않고 손톱을 깎아 둔다. 거침없이 타자기를 두드리기 위해서다. 속살이 훤히 보이게 잘라놓아도 손톱은 어느새 또 길어 나온다. 참 빨리도 자란다. 때가 되면 기는 녀석처럼 글도 술술 풀리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다. 발육이 아닌 성장의 시기인지 내 글은 더디게 나와 빨리 지워진다.
침묵의 낙선통보. 또 한편의 시간이 세상으로부터 내쳐진다. 열 손가락을 열 번 세고도 남을 세월 동안 전화는 한 번도 기다리는 소식을 전해오지 않았다. 실패의 기록이 한 번 더 더해진다고 실망할 일도 아니다. 이 험한 길을 택한 무모함을 탓하고 재능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재주를 반성할 뿐이다.
열정이라는 열병이 나를 다시금 컴퓨터 앞에 앉힌다. 머리에서는 춤을 추던 글이건만 손끝에서는 무기가 되어 나를 찔러온다. 한 가지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걸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 법. 쓰지 않는 동안 나는 고문에 시달렸다. 내 병은 써서 생긴 게 아니라 쓰지 못해 생긴 것이다.
지난날을 위안 삼을 수는 없다. 내쳐지고 소외되기는, 제대로 크기 위한 가지치기는, 생을 마주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 건 성공이 아닌 실패의 쓰라림이다. 채운 원고가 많았으니 가지 쳐내진 글이 많은 것도 당연할 터. 때 되면 자라는 손톱처럼 쓸 거리가 쉼 없이 나오는 것을 위안 삼으련다. 마음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성실히 잘라낸 한 손톱이 영광의 기록으로 남겨질 날도 맞을 것이다.
손톱에서 보이지 않는 지난날의 기록을 읽는다. 역사는 사람마다 다르게 쓰여 제각각 잘려나간다. 자를 때를 놓친 손톱이 손을 헛돌게 했듯이 제때 풀어내지 못한 글은 마음을 굳게 하리라. 결과가 닿지 않았을 뿐 나는 분명 글에 시간을 새기고 있다. 성취를 위해 응당 거쳐 가야 할 과정을 조금 더 시리게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꿈이 곧 삶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들어선 길, 성장을 위한 가지치기를 불평하지 않으련다. 잘려나가야 하는 게 손톱의 숙명이라면 끊임없이 길어 나오는 건 사명이다. 오롯이 내 힘으로 만들어갈 글 길을 위해서라면 숙명도 사명도 짊어질 수밖에 없다.
고락의 기록으로써 잘려나간 빛바랜 손톱을 본다. 손에서 떨어져 나온 녀석이 초승달이 되어 가슴에 묻힌다. 무모해 보이는 이 노력이 언젠가는 달빛이 되어 길을 비춰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