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 쇠 바닥에 내리 꽂힌다. 화가의 몸짓이 허공을 가른다. 바위와 쇠가 닿아 나는 둔탁한 소리가 공기를 가른다. 파찰음이 귀를 긋고 지나간다. 어느 쪽이 깨질 것인가. 관람객 입에서 탄식이 터진다. 화가는 벌건 불꽃처럼 달아올라 있고 이글거리는 태양은 그의 머리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나오시마의 이우환 미술관 초입이다. 전시물이 되어 놓인 철판을 보며 작가의 책에서 읽은 장면을 떠올린다. 젖은 옷과 지린내와 박수갈채. 작가의 긴장은 바지를 적셨고 축축한 바지는 보는 이들에게는 본능의 흔적이 아닌, 예술이 되어 남았다.
철판을 가운데 둔 두 점의 돌이 뿜어내는 팽팽한 긴장감. 외줄 타기를 하듯 조심스레 걸어 미술관으로 발을 옮긴다. 좁고 길다. 쓰레기 섬에서 예술작품으로 재탄생했다는 섬, 나오시마. 버려진 섬의 사연을 품은 바람을 벗 삼아 침묵을 밟아 나간다. 발걸음 소리가 형체도 모양도 없는 적요함에 금을 낸다. 바스락거리는 울림을 귀에 담는다. 고개를 뒤로 젖혀야 끝이 보이는 벽. 고개를 뒤로 젖혀 걸으며 깨트림(破)에 대해 생각한다.
망치와 줄, 못을 잡고 은을 만진 적이 있다. 은장도를 만들기 위해 납작한 은판을 자르고, 두드리고, 깎는 과정을 석 달 남짓 반복한 일이 있다. 완성은 시간의 몫으로 정해져 있었던 것일까. 삼 개월이 지나서야 뽀얗던 은판은 글자를 입었고 이윽고 칼날은 집을 마련했다.
마지막 사포질을 마치고 칼집에 칼을 넣었다. 눈앞에 은장도가 있었다. 은판은 장도가 되었고 칼에는 절개를 뜻하는 절(切)이 새겨졌다. 반짝이는 은을 앞두고 뿌연 은판을 떠올렸다. 광물에 불과했던 은이 줄질과 망치질을 거쳐 작품으로 탄생했다. 길고 험난한 깨뜨림의 시간이 은에 생명을 불어넣어 두고 있었다. 두드리고 깨부수고 매만지는 과정을 거쳐 은은 그렇게 새 몸을 찾았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서 일반인 여성의 나체를 그려 미술계의 질타를 받았던 마네, 작품 ‘샘’을 출품해 예술을 모독했다는 평을 들었던 뒤샹, ‘캠벨 수프 통조림’으로 평론가들의 조롱을 샀던 앤디 워홀. 미술사의 흐름을 바꿔 놓은 작가들의 첫걸음에는 잡음이 함께했었다. ‘작품 같지 않은 작품’을 내놓았다며 언론과 대중의 뭇매를 맞았었다. 기존 방식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를 외치는 예술계는 원근을 무시하고 기성품을 재활용하고 작품을 상품처럼 찍어낸 새로운 기법에 손가락질을 해댔다. 진정 마네와 뒤샹, 앤디 워홀의 시도가 과연 젊은 혈기에 불과했던 것일까.
먼지 자욱했던 은판은 잘리고 깨지고 깎이는 과정을 거쳐 은장도가 되었다. 2021년 현재, 마네의 작품은 엄청난 경매가를 기록하고 있다. 뒤샹은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 불리고 앤디 워홀의 작품은 세계 곳곳에 걸려있다. 진정한 변화는 혼돈에 버금가는 극한 진통을 겪고서야 탄생한다. 새 흐름은 기존의 틀을 깨고 그 부딪힘의 여운을 삼켜 뚝심 있게 소신을 밀고 나가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이 깨트림, 파(破)의 시작이다.
허나 거기에만 그쳐서는 진정한 파(破)가 될 수 없다. 모든 게 무질서하고 혼란한 시대니 파(破)가 단순한 깨짐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면 고유의 흐름을 갖추어야 한다. 각각의 울림이 개별적임과 동시에 큰 물결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나의 구심점을 기준으로 모이건 흐트러짐 그 자체가 틀이 되어 서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벽을 끊임없이 부숴나갈 것, 그 닿음이 하나의 물결(波)이 되도록 진득하게 밀고 나갈 할 것, 그게 큰 변화를 앞둔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정신이다.
벽 사이로 불어온 바람이 이마를 매만지고 간다. 버려진 섬을 예술의 터로 승화시킨 발상의 전환을 곱씹는다. 실패의 상처로 점철된 삶을 되돌아본다. 성취를 손에 쥔 적 없는, 버려진 섬 같은 인생이라 해도 이 모든 두드림은 위대한 깨짐(破)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철이 깨질 것인가 바위가 부서질 것인가. 모니터 위의 깜빡이는 커서에서 마그리트의 눈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