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의 한 호텔 앞,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다. 차도 사람도 없는 거리는 아득히 검다. 열한 시 반, 늦은 시간이다. 신호등 위에 파도 소리를 덧대 본다. 밤바다와 맥주로 마무리하려는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 애잔한 결별이 가슴을 울린다. 맥주가 담긴 봉지를 쥐고 신호등을 올려다본다. 빨간불이다. 하늘을 봤다가 노란 달을 지나 건너편 건물을 쳐다본다. 가로등을 거쳐 호텔과 쇼핑몰을 훑으며 횡단보도에 시선을 둔다. 신호등은 정지화면처럼 멎어있다. 이상하다. 인적 없는 거리인데 신호가 지나치게 길다.
또옥또옥. 맥주 캔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바닥을 적신다. 차디찬 맥주에 바다 한 모금. 그 맛에 침이 고인다. 맥주 캔 따는 소리가 귀를 지나가는 것 같다. 보는 눈도 없으니 신호쯤이야 무시해도 되리라. 발을 뻗었다가 흠칫 뒤로 물러서기를 반복한다. 고장이라도 난 걸까. 신호등은 꺼진 듯 잠이 들어 있다. 한참을 걸어 육교에 이른다. 다리를 지나와 바다 앞에 앉는다. 맥주는 식어있고 어둠은 짙어져 있다. 파도는 잔잔하다. 모래를 만지작거리며 있다가 해변을 빠져나온다.
다시 건널목. 빨간불이 조롱하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팔짱을 끼고 섰다. 파란불이 켜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작정이다. 꽤 시간이 지났는데 신호등은 이번에도 답이 없다. 멀리 육교가 손짓을 보내온다. 무용지물 같은 이 물건은 대체 왜 세워둔 건지. 찬찬히 기둥을 살핀다. 중간쯤 자리 잡은 동그란 것이 버튼이 들어온다. 버튼을 눌러본다. 파란불이 들어온다. 왜 신호를 켜고 건너는 길도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을까. 당혹감이 인다.
내게는 보행자가 켜고 걷는 신호등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건너는 사람이 불을 켜고 갈 수 있는 길을 나는 알지 못했다. 하여 고장 난 듯 보이는 신호등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른 횡단보도나 육교를 찾는 일이었다. 언제부터 정해진 답에 맞춰 살기 시작한 건지. 왜 선택받는 입장이 아닌 선택하는 위치에 나를 둬보려 하지 않았는지. 지구 저편의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대에 살면서도 이 거대한 흐름의 선두에 서보자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지. 신호등을 앞두고 판을 이용하는 자가 아닌 그것을 만드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개념이 남아있지 않은 머릿속을 들여다본다.
헛헛함 속에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이 곡이 발표되었을 당시, 관객들은 니진스키의 생경한 발레와 스트라빈스키의 낯선 불협화음과 디아길레프의 자극적인 무대 연출에 야유를 보냈다. 작곡가와 발레리노, 무대 연출자의 부딪힘이 혹평의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봄의 제전>이 기존의 형식에 맞지 않는다는 데 주된 이유가 있었다. 클래식 음악에서는 선호하지 않는 박자와 음, 선율을 이용해 통용되던 규칙을 허물고 만들어낸 곡이었기 때문이었다. 일 년 후, 무용수를 교체해 다시 무대에 오른 후에야 <봄의 제전>은 환호를 받았다. 현대 음악의 기조를 바꿨다고 할 수 있는 <봄의 제전>은 그렇듯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재탄생했다. 이후 스트라빈스키의 과감한 시도는 이후의 작곡가들이 지속해 새로운 시도를 하게 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철학자 들뢰즈는 산업혁명 이후의 혼돈 사회를 ‘기관 없는 신체’로 표현한다. 답습에 그치는 시도만으로는 변화를 끌어갈 수 없다. 현재의 틀을 깨고 끊임없이 의문을 던져 보는 것, 그리하여 삶을 보다 유익하고 생산적인 쪽으로 꾸준히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갖춰야 할 격(格) 이리라. 부수고 갖추기를 반복해 만든 틀을 발판 삼아 나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의 격(格)으로 남겨지게 되리라. 그리하여 파격의 격(格)은 이윽고 품격을 갖춰가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