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破格), 행함

by GZ

펜을 쥔다. ‘파격’을 위해. 하얀 종이 위에 파(破)와 격(格)을 불러낸다. 파, 바위를 쪼개듯 무언가를 깨트리는 것. 격, 균형 있게 갖추어져 있는 어떤 형태. 파격, 기존의 틀을 깨부수는 일. ‘파격’을 곱씹고 있다. 딱따구리가 관자놀이를 쪼아대기라도 하는 듯 머리가 욱신거린다.

몇 해째 ‘파격’을 쥐고 고민 중이다. 파격적인 수필을 써보라는 숙제 때문이다. 지극히 평범한 내게, 예술가야말로 철저히 고집스럽고 바른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내게, 어떤 비루한 상황 속에서도 흐트러지지 않으려는 내게, ‘파격’은 소화할 수 없는 단어였다. 파격적인 글을 위해 몸에 맞지 않는 삶을 꾸릴 수는 없을 터. 애꿎은 숙제는 나날이 부피와 무게를 더해만 갔다.

‘파격’을 글제로 받은 그 날 가슴에 바위가 내려앉았다. 몇 편의 작품이 손을 거쳐나간 사이에도 ‘파격’은 제 모습을 드러내 주지 않았다. 새파란 가슴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그 돌을 덜어내고 싶었다. 허나 아무리 곱씹어봐도 파격에 부합하는, 외설적이고 반항적이며 저돌적인 경험이 내게는 없었다.

사탕을 빨듯 깨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돌을 온몸으로 굴렸다. 달지도 시지도 않은 무맛의 돌이 입안을 내내 뱅글거렸다. ‘파’와 ‘격’, ‘파격’을 하나하나 뜯어보고서야 알았다. 내가 ‘파격’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파격’을 기존의 것을 무너뜨리거나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특이한 것이라 생각한 데서부터 손이 굳어버렸다는 것을. 감추고 싶은 비밀이나 기이한 경험, 외면하고 싶은 인간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놀람을 주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파격’이었다. 이를테면 백남준 선생이 피아노를 부수고, 영국 작가 마크 퀸이 자신의 피(血)로 <Self>라는 자소상을 만든 것 같은 기괴한 행적에나 파격이란 단어를 붙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과연 그런 것들에만 ‘파격’의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현재 가치관이 전복되고 현상과 사물이 새롭게 정의되며 예상치 못한 일들이 초속으로 발생하는 유례없던 시간을 관통하고 있다. 현상이 난무한 시대니 진정한 파격은 굳건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한 길을 꾸준히 지켜나가는 것, 그렇게 다져온 격(格)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것, 그리하여 내 삶이 누군가가 격(格)을 만드는 데 길잡이가 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파격이 아닐까. 혼돈의 시대는 어쩌면 혼란 속에서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굳건한 시간의 힘을 보여주는 것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파격을 정의해 보려 한다. 가슴에 내려앉은 이 무거운 돌덩이를 들어낼 게 아니라 깎아내 보려 한다. 난세 속에 소신을 지켜나가는 것을 ‘격(格)’이라 한다면 그 한계를 뛰어넘으려 자신을 갈고닦는 것은 ‘파(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격에 맞는 모습으로 일이관지(一以貫之) 경지를 향해가는 것을 ‘파격’이라 할 것이다.

파격을 가슴에 담고 주변을 둘러본다. 눈을 쏠리게 하고,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것 일색이다. 그 화려함에 흔들려야 하는데 마음은 어쩐지 더 굳건해져 있다. 파격이 발상의 전환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특이한 무엇만을 내보일 수 있는 것이라 한다면 출퇴근을 반복하고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는 것은 무미한 것이 된다. 누구의 삶도 특색 있는 경험만으로 채워질 수는 없을 터. 가슴을 울리는 파격은 독특한 무엇이 아닌 진득한 쌓음에서 나온다. 글을 업 삼으려는 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파격은 일상의 깨우침을 꾸준히 적어나가는 것이다. 하여 평범한 이들의 인생에 깃든 귀한 가치를 묵묵히 적어나가려 한다. 그게 어제의 나를 넘어서기 위해 이 순간에도 땀을 흘리고 있는 이들의 삶의 격을 조금이나마 돋보이게 하는 길일 것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깨트림 속에서도 끝내 하나의 물결은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이십일 세기는 소리 없는 전장이다. 시대를 관통하는 흐름은 찾아볼 수 없고 부딪힘과 깨짐이 만드는 파열음은 요란하기만 하다. 바야흐로 시간의 소용돌이가 시시각각 거짓 파격을 만들어내는 상실의 시대인 것이다. 허니 소신을 가지고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그리하여 새길을 만들어가는 것이 이 시간을 관통하고 있는 파격적인 이들이 해야 할 일이다.

손을 헛도는 펜을 다시금 단단히 쥐어야겠다.



20180316_144647.jpg 이상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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