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륙을 기다리던 중 낯 모를 이의 목소리가 귀를 타고 들어온다. 치료를 거부하는 남자와 간호를 부탁하는 동료와 병원으로 향하겠다는 회사 동기. 가만 앉아 낯선 자들의 대화를 엿듣는다. 수술을 받아야 할 텐데. 우려가 가슴을 채워온다. 이륙 안내 방송이 들리고 전화는 끊기고 비행기는 속력을 높이기 시작한다.
휴대전화를 붙들고 고개 숙여 앉은 남자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표정 잃은 얼굴이 눈코 입이 지워진 석고상을 닮았다.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뱉는 승객이 전하는 불안의 파장이 속을 비집고 들어온다. 남자에게 안온한 어둠을 찾아들기를 바라며 슬그머니 창을 내린다. 수화기 너머의 낯선 이가 내 지인이라도 되는 듯 가슴속 두근거림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다. 눈꺼풀을 내리감고 앉아 천천히 숨을 고른다. 통화 내용이 글이 되어 눈을 덮어온다. 죽음을 마주하고 있을 낯 모를 그는 한 집의 가장일 터. 아비라는 아련한 두 자가 바위가 되어 심장에 얹힌다. 가슴이 묵직해지는가 싶더니 배가 욱신거려온다.
언젠가 바다에서 마주한 적 있는 검은 아비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구름을 가르는 비행기에 몸을 맡겨둔 채 하늘인지 바다인지 모를 곳으로 접어든다. 이쪽에 가까워지고 있는 석양을 짊어진 두 사내. 검디검은 두 개의 형상이 눈 위에 놓인다. 그림자인지 사람인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새까만 무엇이 하나의 구체가 되어 눈동자를 점령한다. 검은 색종이를 거칠게 오려 놓은 것 같은 뭉툭한 사내들의 움직임을 무감각하게 넘어다본다. 불현듯 경계의 날이 선다.
가방을 움켜쥔다. 시선은 바닥에 고정해두고 발을 바삐 움직인다. 타지에서 마주한 작업복 차림의 두 사내에게 편견이 덧씌워진 것이다. 선입견이 빚어낸 어리석음이 맞은편 두 사람을 범죄 현장의 누군가로 내몬다.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도 모르게 긴장의 끈을 조인다.
그림자가 길어진다. 남자들이 가까워지더니 퀴퀴한 냄새가 번져온다. 시선이 흔들린다. 고개가 돌아간다. 먼지를 뒤집어쓴 얼굴과 새까매진 옷과 너덜너덜한 신발. 목을 빼두고 검은 실루엣에 불과했던 이들의 알진 속을 넘어다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검회색인데 눈과 이(齒)만 서럽도록 하얗다. 작업복은 구겨졌고 바지는 흘러내릴 듯 헐렁하고 목은 굽어 있다. 알아듣지 못할 말이 귀를 타고 들어온다. 소리는 얼마 가지 못해 흐릿해지고 두 사람은 어느새 멀어져 있다. 그 스침이 서글퍼져 뒤를 돌아본다.
파김치가 된 굳은 등에 거북이 등껍질을 덧대 본다. 사내들의 등에 손가락이 틀어지고 허리가 굽고 팔이 욱신거리도록 뛰어다녀 만든 돈으로 그들이 마련했을 집이 깃들어 있다. 석양을 등지고 걷는 어깨 아래에 입을 벌리고 앉은 식솔이 있다. 허리 굽은 아비들의 노고로 누군가의 오늘이 평온할 수 있었을 터. 이 나라에서 흘린 땀이 먼 이국에서는 희망의 빛이 되어 있을 터. 아비의 희생과 인내가 자식들에게는 자부심이 되어 있을 터. 하늘은 어둠으로 물들어가는데 사내들은 역설적이게도 빛을 더해간다. 느릿느릿 걸어가는 오목한 등판에서 빛을 보는 것은 지나친 감상만은 아니리라.
멀어지는 그림자 위로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을 투영해 본다. 그늘에 지친 몸으로 감자와 차를 앞두고 앉은 자들이 실물이 되어 살아난다. 식탁 위 노란빛과 움푹 팬 주름과 뭉툭한 손과 낡은 옷. 검푸른 색으로 뒤덮인 고흐의 붓끝에서 아비들의 삶을 읽는다. 물기를 잃은 두 사내의 퇴근길과 이백여 년 전 고흐의 눈에 비친 검은 생이 하나로 겹쳐진다. 눈앞에서 탄생한 또 하나의 걸작이 노을을 붉디붉게 물들인다.
삶은 어쩌면 촛불 한 자루를 켜 두고 둘러앉아 저녁을 나누는 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며 누군가의 인생에 예술을 덧씌우고 있는 이 이기적인 감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굳은 등을 보며 가장의 생애를 곱씹는다. 최고 경매가에 거래되는 고흐 작품의 가치와 하루를 채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름 모를 아비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의 값을 달리 매길 수 없으리라. 어떤 잣대를 들이댄다 해도 그 숭고함에 다른 가격을 책정할 수 없으리라.
아비들의 그림자가 노을에 잠긴다. 어둠 든 하늘이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착륙을 알리는 방송이 옆자리 승객을 깨운다. 눈을 뜬 남자는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 서둘러 가방을 멘다. 헨 신발이 눈에 들어온다. 동료를 걱정하는 그 또한 어느 도시 가장자리에서 가장의 옷을 입고 있는 아비 이리라.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남편이자 아들일 낯 모를 그의 안녕을, 그를 걱정하는 이름 모를 남자의 건투를 빈다. 치열하게 오늘을 마주하고 있는 이들의 모든 순간이 빛이고 예술이기를, 땀에 젖은 얼굴이 한 점의 작품으로 남겨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