멎은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미미한 움직임에서 시간의 파문을 본다. 멀디먼 저곳에서, 닿으려야 닿을 수 없는 저 건너에서 건네 오는 손길. 가슴에 파고가 인다. 원을 그리며 퍼지는 눅진한 울림이 속을 하얗게 물들여온다. 감은 듯 그윽하게 내려 둔 눈꺼풀과 가부좌를 튼 다리와 주름진 대의(大衣). 차고 딱딱하다. 그리고 뜨겁다. 이 상반되는 느낌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불상 앞에 멈춰 선 발은 움직일 기미가 없다.
냉기와 열기의 공존. 산에 있어야 할 것을 안으로 옮겨 들어온 게 못 내 안타까웠는데 기우였다. 철불은 전시장을 완벽하게 제 것으로 빚어내 두고 있다. 건물이 불상을 먹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공기를 녹여내고 땅을 다져 주변을 압도해 버린 것은 건물이 아닌 불상이다. 전시실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조각물은 고집스레 제 자리를 지켜내며 이색적인 분위기를 뿜어낸다. 시간과 공간을 버무려 계를 확장해 가는 불상. 어디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기운을 뱉어내는 힘이 조각 안에 깃들어 있다.
눈가에 어린 명징한 예리함과 입가의 그윽한 온화함과 콧날 끝의 반듯한 굳건함. 멎어 있는데 움직인다. 투박한데 유려하다. 둔탁한데 섬세하다. 이 부조화의 조화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심중에 내려앉은 파문이 빚어낸 독무는 허공에 나비춤을 남기는 승려의 몸짓과 다르지 않게 새겨진다. 어둠을 채워오는 은은한 번짐을 들이마셨다 뱉었다가. 불상을 보고 섰을 뿐인데 속이 가벼워지는 이유는 원지.
투명한 바람이 밀려 들어온다. 신산한 공기가 아랫배에 남아 있던 미진을 말끔히 치운다. 멎어 앉은 철불 앞에서 휘몰아치는 매질을 느낀다. 가슴이 저린다. 뭐가 그리 쥔 게 많다고 때마다 흔들리는 것인지. 무엇을 그토록 바라 세사를 원망했던 것인지. 무엇을 가지려 한없이 욕심을 부렸던 것인지. 자리를 틀고 앉은 것만으로 주변을 압도해버리는 철불. 부동의 철 조각에서 비었으나 조밀한 단단함을 본다.
다져 두면 흔들리고 쌓아 올리면 무너지고. 삶은 역설적이게도 형상을 갖추려 하면 할수록 더 많이 일그러졌다. 애를 쓸수록 더 남루해지는 게 인생이었다. 하나가 되기 위해 백을 쌓으며 달려왔는데도 하나조차 되지 못함을 알게 되었을 때 무릎은 꺾이고 어깨는 무너져 내렸다. 하여 지난 시간을 공염불이라 생각했었다. 누군가를 빛나게 해 주기 위해 던져진 생이냐며 한탄을 늘어놓은 날도 적지 않았다.
불상을 올려다보며 그 마음을 다시금 들여다본다. 서늘한 석가의 눈에서 욕심을 솎아낸다. 주인공이 되고자 했던 미욱함. 나를 짓밟고 올라선 그들과 다르지 않게 나 또한 누군가의 어깨를 누르고 올라서고자 했던 어리석음. 승자와 패자로 세상을 양분하고 싶었던 졸우함. 그토록 많은 것을 안고 지고 있었으니 생이 무거웠을 수밖에.
철불 위로 번지는 불빛에서 용광로의 열기를 본다. 철을 제련하기 위해 눈을 내놓았을 대장장이들의 망치질 소리가 귀를 두드리고 들어온다. 눈이 멀어 가는데도 인생을 붙들고 있어 보는 것, 살아가는 일은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차디찬 불상에 찬란한 빛마저 배경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힘이 깃들어 있다. 녹아내리고 두드려지고 식혀지고 깎인 단련의 시간 속에 살아 숨 쉬는 빛이 담겨있다.
살아내는 데 장인은 없다. 멀리서 보면 완벽했던 풍경도 가까이 가면 이지러지고 어긋나 있다. 환상을 덧씌우는 것은 생이 살아봄 직하지 않을까 하는, 시련 끝에 달콤한 열매가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비롯된 것일 터. 세파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세상을 고요히 물들이는 힘. 세사가 나를 넘어다보게 하는 힘. 그 부드러운 견고함을 적요히 다져가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그러한 일일 것이다. 철 냄새가 그윽하게 번져온다. 까맣고 뽀얀 빛이 속에서 철썩철썩 파도 소리를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