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알록달록 Nov 22. 2023

고물상 고양이들

20231121



고물상에서 밥을 주는 고양이로부터 태어난 네 마리중 두 녀석은 형제들에게 치여 크기가 월등히 작았습니다. 이러다가는 얼마 못 가 죽을 것 같아 저와 친한 언니가 급히 인공 수유가 가능한 다른 임보처를 겨우 구해 어렵게 아이들을 살려냈습니다. 언니네는 이미 집에 고양이 네 마리가 있었거든요.

하지만 임보자도 개를 키우는 입장이라 언제까지고 아이들을 데리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약속한 기한이 지나 작은 두 녀석은 결국 언니네 집 한켠에 머물게 됐습니다. 약한 개체라 감기도 걸렸었으나 정성스럽게 치료해서 그럴싸한 새끼 고양이로 자랐습니다. 그래서 좋은 곳에 입양 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여기저기 입양 글을 올렸지만, 단 한 건의 문의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태어났던 곳, 고물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인 나도 추운 이 겨울에 말이지요.


고물상은 시골 야외에 있어서 겨울에는 더 춥습니다. 동네에는 사나운 어른 고양이도 많고 새끼 고양이를 물어 죽인 전적이 있는 들개떼도 있습니다. 고물상에 하루 종일 드나드는 큰 차들도 어린 고양이한테는 위험하고요. 그래서인지 어미가 돌보았던 남은 두 녀석은 애석하게도 벌써 별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일찍이 죽었을 아이들은 언니로부터 구조되어 아직 살아있는데 말이죠.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요. 결국 생사를 결정하는 건 사람에게 달린 일이었을까요.

그런 데도 불구하고 다시 돌아가야 한답니다. 입양이 안 되었으니까요. 어렵게 살려는 놓았지만 책임질 수는 없으니까요. 집에 있던 네 마리의 고양이가 스트레스를 받으니까요. 같이 사는 가족이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으니까요. 청천벽력으로 언니의 시아버지가 사경을 헤매고 계셔서, 이 와중엔 겨우 고양이들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인공 수유로 사람 손에 길러져 방 안에서만 자란 고작 두 달 반 된 두 고양이는 어른 고양이도 무사히 나기 힘든 겨울에, 위험한 고물상의 환경에 갑자기 놓이게 되었습니다. 살 수 있을까요? 살 수 있겠습니까? 겨울을 나긴커녕 과연 며칠이나 버틸까요? 그것도 운이 좋다면 말이죠.


어차피 또다시 형제들을 따라 죽게 될 걸 알면서도 밖에 내놓아야 하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럴 거면 애초에 왜 살린 거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살린 게 잘못도 아닌데 말입니다. 왜 그때는 녀석들이 젖도 못 먹고 죽어가는 꼴을 도저히 가만두고 볼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아닌 걸까요? 그때와 지금이 다른 것이 무얼까요? 틀린 상황 찾기라도 해 볼까요? 여전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름의 사정이라고 나열한 저 말들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원래도 이미 네 마리를 키우는데 한 줌도 안 되는 두 마리가 더 늘었다고 갑자기 알레르기가 생긴 걸까요? 아니면 원래 있었는데 더 심해졌다? 그럼 원래부터 있었던 그동안엔 어떻게 같이 살았고요? 아뇨, 비꼬는 게 아니고요, 정말 이해하기가 힘들어서 그래요. 왜냐면 약 먹으면서 반려하는 사람들도 많으니까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면 그건 이유가 아니잖아요.

격리를 해 둬도 집에 있던 고양이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건 당연한 겁니다. 합사하면서 서로 적응할 시간을 주면 해결될 일이라는 건 네 마리를 들이는 동안에도 겪어봐서 잘 알잖아요, 아주 일시적이라는 걸요.

시아버님이 편찮으신 건 올해 초에 할머니와 이별한 저 역시 유감입니다만, 그게 이 아이들을 밖으로 내어놓을 이유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떤 상관성이 있는 걸까요. 그 일 외의 다른 것들엔 신경을 쓸 수 있는 여력이 없다는 건 알겠지만, 그렇게 치면 원래 살던 고양이들은요? 여력의 경계는 정확히 딱 거기까지인 걸까요? 제가 잘 모르겠어서 그래요.


저는 납득이 가질 않아서 사실 다 핑계처럼 들리거든요. 어쨌든 입양도 못 갔고, 그래서 품다가는 저처럼 될까봐서 절대로 키우지도 않을 거니까, 죽든지 말든지 에라 모르겠다는 말로 알아들으면 되는 게 맞지 않습니까. 할 만큼 했다는 말은 정말로 할 만큼 해 보고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얼 하셨습니까. 그리고 무얼 더 하실 수 있으십니까. 분명히 더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으실 텐데요.


저한테 뭘 어쩌라고 한 말은 아니고, 그냥 그렇게 됐으니까 알고 있으라고 한 말이라네요. 제가 왜 저 가여운 것들이 곧 죽게 될 거란 걸 알고 있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왜 항상 저는 그런 걸 알고 있어야만 할까요. 제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뻔히들 아시면서 왜 늘상 저에게 그런 말들을 하시는 걸까요. 왜 실물 한 번 본 적 없는 제가 저 아이들에게 미안함을 느껴야 하는 걸까요. 저 어린 두 녀석도, 병이 깊어져 곧 세상에 없을 거라는 또 다른 언니의 갈 곳 없는 오랜 반려 고양이 두 녀석도, 왜 내가 대신 데려오지 못하는 현실이 이렇게 한스러울까요. 왜 모두 내 탓인 것만 같을까요. 왜 나 때문에 쟤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 같을까요. 저 작은 것들이 죄가 있다면 무슨 죄가 있길래 죽다 살아났어도 죽어야 하는 걸까요.


태어난 것이 죄일까요. 어쩌면 태어난 것이 죄일 수도 있겠습니다. 저도 태어난 김에 사는 인간이니까요. 저에게는 사실 부모님이 지우지 않았었다면 태어났을 동생이 있었는데요, 아직도 가끔씩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없었던 것도 아닌 그 친구를 생각하곤 합니다. 아니, 예전보다 더 자주 생각합니다. 살고 죽는 것이 손바닥 뒤집듯이 아주 우스운 차이인 것 같을 때 말입니다. 나는 태어났는데 남동생이었을지 여동생이었을지 모를 그 녀석은 왜 태어나지 못했을까 생각해 보면, 겨우 타이밍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둘도 빠듯한데 셋은 좀 힘들 것 같으니까. 만약 제 앞에 누군가 더 있었다면 지워지는 게 나였을 수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태어나는 것이 죄이니까요. 조금 늦게 태어나면 태어나는 것도 죄이니까요. 저만 없었어도 부모님은 그 친구를 낳았을 겁니다. 태어났다는 게, 내가 살게 되었다는 게 너무도 우습지 않습니까? 어쨌든 태어나긴 했으니 그냥 아가리 닥치고 감사하면서 살면 되는 걸까요?

인간이 뭐 그렇게 대단하길래 한 생명의 삶을 결정하는 걸까요? 인간들이 이러고 있을 때 신은 왜 뒷짐만 지고 있는 걸까요? 아니, 신이 있기는 한 걸까요? 뭐, 당신께는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제게는 없는 모양입니다. 그게 제가 신을 믿지 않는 이유일 테죠. 있다면 이 지경이 되도록 놔두지는 않았을 텐데요. 세상에 죽어야 마땅한 존재가 얼마나 많은데 그들은 멀쩡히 살아 있고 말이죠.


고물상 언니에게 실망한 건 아닙니다. 제가 신도 아닌데 뭐 대단하다고 이래라저래라하겠습니까. 죽어가는 걸 살려놓은 쪽은 오히려 그쪽인데 말입니다. 언니가 두 녀석을 거두지 못하는 그 마음이, 제가 직접 거둘 수도 없는 그 마음과 같을 거라고 봅니다. 핑계일 거라 지적했던 부분들 역시 집에 열여덟 마리나 있으니 더는 안된다는 제 핑계와도 같은 맥락일 겁니다. 사실은 언니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제 자신에게 화가 나 하는 말들이었을 겁니다. 아마도 그럴 거예요. 다만 저였다면 저 어린 녀석들을, 이 겨울에, 그 위험한 곳에 내어 둘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아직 늦지 않았을 때, 갈 곳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어서오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