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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Dec 16. 2023

자낳괴

20231215



아부지로부터 드문드문 전화가 오긴 했었다. 내가 안 받아서 그렇지. 안 받는 이유는 그가 필요할 때만 전화하기 때문이고, 그 필요란 상황에는 한 번도 빠짐이 없이 항상 돈이 얽혀있기 때문이다. 돈이 필요할 때가 아니라면 아부지는 나에게 전화한 적이 없다.

전화가 울리면 부재중으로 바뀔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휴대폰 화면만 바라본다. 그러면 끝도 없는 아래로 내내 추락하는 기분이 든다. 그 기분은 하루가 끝날 때까지 지속된다. 사채업자에게 빚 독촉으로 쫓기는 기분이 이런 걸까. 아니지. 그 경우는 그래도 인과관계가 그럴만했잖아. 아니지, 그렇게 치면 나는 그에게 목숨을 빚진 걸까. 그의 피가 나에게도 흐르니 평생 피를 빚진 걸까. 차라리 피로 갚아지는 거라면, 한 번 생각해 볼 수도 있을 텐데. 언젠가 ‘이러려고 나를 낳았냐’는 독기 서린 나의 질문에, 나의 아부지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빈말이라도 ‘아니’라는 대답은 양심에 찔려서 도저히 할 수가 없었나 보다.

전화를 받지 않을 때의 기분이 이렇단 거다. 그러니 그 전화를 받을 이유는 더욱이 없다.


이런 나를 모질다고들 했다. 피를 나눈, 어쨌든 ‘가족’인 엄마와 오빠가. 부모가 어려우면 자식이 도와야지, 딸년이 돼 가지고 키워준 지 아부지를 왜 그렇게 미워하느냐고. 아부지가 내 명의로 대출을 받아달라고 요구했을 때, 엄마와 오빠는 니가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했다. 남도 아니고 가족인데, 니 아빠가 설마 니 돈을 떼먹겠냐고. 오빠는 회사원이고 결혼해서 처자식이 있으니까, 미혼의 자영업자인 내 명의로 받아줘야 한다고 했다. 그 덕에 나는 내 명의로 아부지께 전셋집 구해 준 효녀가 됐고, 정작 나는 이 나이를 먹고도 아직 월세를 산다. 그리고 ‘설마 떼먹겠냐’던 그 아부지는 내게 대출금을 단 한 번도 송금한 적이 없어 내가 아직도 매달 갚고 있고, 아부지는 그게 얼마인지 내게 물어본 적도 없다. 궁금은 할까. 심지어는 이후로도 몇 번의 대출 요구가 더 있었다. 그런 아부지의 전화를 안 받는 나를 ‘가족’들은 모질다고 했고, 앞뒤 사정 모르는 친척들은 싸가지 없는 년이 지 아부지 생일도 안 챙기고 이젠 전화까지 안 받는다는 아부지 얘기만 듣고서 걔 그렇게 안 봤는데 지 엄마 닮아서 아주 썅년이라 했다.


그래서 이번 일이 무척이나 통쾌했다. 그저 그 모두가 내가 겪은 걸 겪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자꾸 연락을 거절하자 아부지는 오빠에게도 손을 벌렸고, 본인이 그렇게 믿어 마지않던 오빠에게마저 거절당하니 친척들에게까지 연락해 돈을 빌렸다. 갑자기 일이 커지면서 이미 이혼해서 남이나 마찬가지였던 엄마의 귀에까지 이야기가 들어갔고, 그래도 옛정이란 게 있긴 한지 엄마는 아부지가 일단은 걱정됐던 모양이다. 엄마는 오빠 결혼식 날 이후로 몇 년 만에 아부지에게 무려 직접 전화를 걸기에 이른다. 큰돈이 필요하면 수원에 남아있는 집이라도 팔던가 하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왜 자꾸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느냐고 물었단다. 그럼 그렇지. 그놈의 주식 때문이었다. 궁금하지도 않았던 나는 그 얘기에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아부지와 엄마의 신혼집이었던 서울의 그 집도, 이미 오래전 주식으로 날려 먹은 전적이 있었다. 개가 똥을 끊겠다. 수원에서 우리가 살았던 집은 천안에 내려오며 전세를 줬었는데, 얼마 안 가 전세금도 다 털어먹고 이젠 흔적도 없단다. 전세나 매매나 별 차이가 없으니 그 집은 이제 더 이상 그 양반 집도 아닌 거나 마찬가지이다. 엄마와 오빠는 아부지의 이런 얘기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자기를 닮아 아부지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던 오빠는, 그냥 아부지가 요구한 돈 까짓거 줘 버리고 이참에 손절할지 생각 중이랬다. 연을 끊으면 끊는 거지 어차피 또 공중분해 될 돈을 아깝게 괜히 뭣하러 주고 끊느냐고? 그거야 그렇게 해야 지가 죄책감이 덜 할 테니까. 아주 효자 났다. 엄마는 오빠의 이런 이야기에 ‘저 인간 불쌍해서 어떡하냐’며 잠도 못 자고 울며 전화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저런 답 없는 인간은 돈 나올 구실이 아무 데도 없어야 억지로라도 그 몹쓸 버릇 끊어진다. 주변 모든 것들을 병 들이는 암세포에게 먹이를 주어서는 안 된다.


가족들의 이런 혼돈의 카오스 속에서도, 나는 마음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가족이라면 당연히 도와야 한다고 큰소리치던 것들이, 자기만 아니면 그만이라는 듯 한마음 한뜻으로 가스라이팅하며 만만한 나에게 독박 씌우던 저 인간들이, 드디어 조금이라도 내 입장에서 이해하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웅장해졌다. 나는 정말이지 “그러게, 내가 뭐랬어”라는 대사를 내 입으로 칠 수 있는 그 순간이 아주 오래간만에 순수하게 행복했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 누군가에게 바라는 것이 없어야 그 사람을 보는 시야가 뚜렷해지고, 그로부터 얻고자 하는 것이 없기에 비굴해지지 않는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기 전엔 오빠는 늘 아부지의 상속을 기대했었다. 그리고 사실 거기엔 엄마의 영향이 있다. 엄마는 20년 전 아부지와 함께 살았던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부지의 재산을 몰랐다. 아부지는 엄마에게 경제적인 모든 것을 일절 공유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사건이 있을 때는 늘 ‘믿는 구석’이 있는 듯이, 배우자도 영원히 찾지 못할 금고라도 있는 듯이 숨겨진 돈들이 나왔다. 엄마는 알 수 없는 그 존재에 대해 내심 든든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혼하며 아직 어렸던 오빠와 나를 아부지에게 믿고 맡겼다. 아부지를 믿었다기보다 아부지의 비밀 금고를 철썩같이 믿었을 거다. 저 짠돌이가 저렇게 없는 척해도 절대로 없지는 않을 거라고. 그걸로 제 새끼는 안 굶길 거라고. 그런 눈치를 보며 자란 우리 역시 세태 파악이 진즉에 빨랐었지만 둘의 방향성은 달랐다. 오빠는 그 비밀 금고가 언젠가는 마침내 장남인 자신의 것이 될 거라 기대했고, 나는 아부지가 주머니 속 손아귀에 꼭 쥐고 있는 걸 철저하게 숨기고서 엄마를 기만했듯 우리에게도 그러리란 걸 막연히 알았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이왜진. 우리는 우리 가족이 서울 집을 잃었다는 걸 그 집을 잃은 한참 뒤에나 알았다. 지극히 개인주의적 성격인 내 관점에서는 사실 그 돈이 내 돈도 아니고 아부지 돈이니 아부지가 주식으로 집 한 채를 말아먹든가 말든가 자기 돈으로 무얼 하는가는 자기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왠지 배신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학자금 대출을 갚던 긴 시간을 생각하면. 그 돈이었으면 시발 둘 학비를 4년 내내 다 대주고도 떡을 쳤다. 애초에 없었던 거면 모를까, 있었는데 없잖아요. 어차피 없어질 거였으면 그렇게 허무하게 날리지는 말았어야지. 처음부터 아부지에게는 그 돈이, 나와 오빠의 학비로 쓰기에는 아깝고 주식으로 쓰기엔 전혀 아까울 게 없는 그런 돈이었던 거다. 엄마가 믿고 떠났던 이 남자의 부성애란 이런 것이다.


최근 아부지로부터 또 전화가 왔다. 이번엔 달랐고, 그래서 다를 줄 알았다. 내가 하도 안 받다 보니 한 번 해서 안 받으면 어지간해서는 다시 하지는 않는 편인데 불안하게 여러 번이 계속 울렸다. 뭔 일인지는 몰라도 꽤 다급한 일인 것 같았다. 근데 급한 일이라고 해봐야 그냥 ‘돈’이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서, 나도 지독하게 받지 않았지. 금연을 이렇게 독하게 했으면 한 방에 성공했을 텐데.

몇 시간 후에 다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갑자기 존나 개궁금해지더라. 이번엔 또 뭔 사고를 치신 걸까. 결국 못 참고 받았다. 금연 실패.


「어, 왜.」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받기만 하면 돈 얘긴데 님 같으면 받겠냐? 그리고 밤에 일하고 낮에 자는 사람한테 지 편할 때 아무 때나 전화해 놓고선 왜 안 받냐니. 전화하자마자 한다는 소리부터 킹받네. 다른 집 아빠들은 밥은 먹고 다니는지부터 묻는다던데, 진짜 친아부지가 맞긴 한 걸까.


「지금 받았잖아. 왜. 뭐 때문에 하셨는데.」


진짜 졸라 궁금해서 받은 거니깐 빨랑 딱 말해.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어, 응. 저기, 아빠가 지금 좀 급해서. 내일모레 바로 다시 줄 수 있는데』


어휴, 그럼 그렇지. 저렇게 말에 목적어가 없어도 뭘 원하는진 잼민이도 알겠다.

혹시나 하며 다른 걸 기대한 내가 병신이다. 뭐가 이렇게 똑같은 레퍼토리에 식상하기 짝이 없을까. 어차피 어떤 부탁이라 해도 들어줄 생각이라곤 절대 없었지만, 그래도 좀 신박하고 새로운 걸 바랐다. 기출 변형의 성의라도 보여줬으면.


「(한숨) 아빠, 나 돈 없어.」


『응? 이백오십만 주면 되는데, 그 정도가 없어?』


아ㅋ 님은 있고?


「어. 없어.」


시발, 있어도 없어요.


『아니 진짜로 낼모레 아빠가 월급 나오면 그날 바로 줄 수 있는데? 오늘 당장 써야지 돼서 그래.』


「없다고. 이번 달에 내야 할 것도 모자라서 빌려서 냈어.」


그짓말 아니다. 재계약 할 때 보증보험비 엄마한테 빌려서 냈다.


『아, 씨. 큰일이네. 어떡하지. 알았어.』


몇 달 만에 대화한 피로 맺어진 부녀의 통화 내용은 이랬다. 이토록 짧은 통화 시간이라도 통화하는 내내 속이 불편하기만 했으나, 전화를 끊고 나니 오히려 그간 전화를 받지 않았었을 때보다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다른 문제가 아니라 역시나 또 돈 문제였음에. 나에 대한 정이 묻어나는 단어는 단 한마디도 뱉지 않은 당신의 문장에. 내가 당신을 미워할 이유가 너무나도 명확함에. 아주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나의 단호한 거절에. 더이상은 정말로 당신의 전화를 받지 않아도 마음이 무거워질 이유가 없음을 알았기에. 앞으로는 적어도 당신 때문에 울 일은 없을 거라는 강한 확신에. 나에게서 버려질 당신에 대한 정당성을 당신 스스로가 증명했기에. 나는 마음이 편해졌다.


다음날이 되어서는 오전에 출근하시는 이모님과 교대하며 ‘어제 아부지가 가게에 왔다 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 내가 전화를 안 받는 동안 가게로 찾아왔던 모양이다. 집요하시기도 하지. 아니면 평소처럼 주기적으로 라면이나 생수 같은 생필품 따위나 챙겨가려고 들른 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만나기 위해서 여길 온 적은 없었으니까. 돈이면 몰라도 말야.


“오시자마자 인사도 안 하시고 그냥 바로 ‘얘 지금 어딨냐’며 지은씨를 막 찾으시더라고.”


그래서 ‘나중에 통화했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다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이모님, 혹시,,, 그거 말고는 아부지가 이모님께 별다른 말씀은 안 하셨죠?”


“그게... 음.”


왜 시발 씹불길한 예감은 좆도 틀린 적이 없는가.


“저기... 돈 얘기 하시더라고. 주식 해야 된다고.”


“... 설마, 주셨어요...? 아니죠?? 아니죠, 이모님???”


“아니, 아니지. 지은씨가 그러지 말랬잖아.”


저혈압으로 가끔 실신도 하는 내게, 타이밍 좋게 혈압이 확 오르는, 어쨌든 건강엔 도움 될 그런 개빡치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게 딱 그런 순간이었다. 피꺼솟.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아부지가 우리 가게의 직원인 이모님께 돈을 요구했던 적이. 이모님이 여기서는 시간제 알바나 하셔도 다른 동네에서는 건물주인 묘한 포지션이긴 하다만. 실은 편의점 알바가 아니라 편의점 여러 개를 직접 차리셔도 부담이 없는 정도의 경제력을 갖고 계신 분이긴 하다만, 그렇다고 해서 아부지가 딸 가게의 직원에게 돈을 빌려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 당시 돈을 빌려주어도 될지 말지 곤란해하시며 내게 하소연하던 이모님께, 절대로 안 된다고 말씀드렸던 적이 있었다. 아부지가 이모님께 얼마를 빌리든 간에 그 돈은 결국 내가 갚게 되어 있으며, 나는 우리의 직업적 관계를 떠나서도 이모님과 그런 채무 관계가 되는 걸 원치 않으니, 저를 생각하셔서라도 절대로 한 푼도 빌려주지 마시라고 부탁을 드렸었다. 그때도 물론 이번처럼 어지간히 쪽이 팔렸었지만 꼭 해야 했던 말이었다. 도대체 왜 내가 나의 직원에게 이런 종류의 지시를 ‘해야만’ 하는 걸까. 이모님은 나의 당부를 들으시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나는 또다시 이모님께 즈이 아부지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아 주어서 너무나 감사하다고, 그리고 그런 부탁을 받고 거절하는 불편한 상황을 겪게 해 드려 정말 죄송하다고 사과해야만 했다.


그날은 퇴근 후 집에 도착해 열 시간도 넘게 잤다.


그냥. 아까 유튜브 틀어놓고 청소하고 있었는데, 사기꾼인 전청조 아빠도 전청조는 그렇게 끔찍이 생각해서 딸내미가 힘들면 그때마다 또 사기쳐서라도 최선을 다해 도와준다더라고. 바람 빠진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그냥 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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