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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Jan 05. 2024

담배가 맛있던 날

20240105


2024년 1월 1일 새벽 1시 출근. 출근을 준비하는 사이에 벌써 작년이 되어 버린 어제와 다를 것 하나 없이, 오늘도 또 지각했다.

월요일임에도 빨간 날이라 그런지 술에 기분 좋게 취한 손님이 많다. 한 시간 3분 전만 해도 연말이었으니까 해피 뉴 이어 카운트 다운이든 뭐든 어쩌고저쩌고 의미 부여들 하느라고 실컷 퍼마셨겠지. 벌써 만으로 서른여섯 번째 1월 1일을 맞이하고 있는데 매년 똑같은 이날이 1년에 단 한 번씩인 모든 다른 날과 다를 게 뭐라고 뭐 그리 난리 부르스를 추고 유난을 떨어 대는지 모르겠다.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바쁜 날이다. 매달 1일은 모든 할인과 증정 행사가 바뀌는 날이라서 행사 내용이 쓰여 있는 모든 가격표를 바꿔주어야 한다. 그걸 ‘쇼 카드’라고 부르는데, 이전 달의 쇼 카드는 내 전 타임의 근무자가 행사가 끝나는 월말 24시 이전에 매대를 돌며 제거해 주고, 이어서 내가 교대해 새 쇼 카드를 끼워 놓는다. 본사에서 쇼 카드가 배송될 땐 우리 가게에서 취급하는 제품들의 행사만 알아서 싹 골라져 오는 게 아니라, 지에스에서 취급하는 전체 상품 중 해당 달에 행사가 들어가는 모든 제품의 쇼 카드가 통째로 오기 때문에, 하나하나 일일이 선별하여 맞는 자리에 직접 꽂아주어야 해서 작업의 시간 소모가 크다. 묶음으로 들어오는 양만 봐서는 어림잡아도 대략 천 개에서 천오백 개 정도 되는 듯하고, 그거 말고도 다른 대형 홍보물까지 새 행사에 맞춰 모두 교체해야 한다. (대충 좆같다는 뜻)


행사가 유독 많은 달이 있고 또 비교적 적은 달이 있으며, 취급하는 상품의 종류와 위치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따라 근무자마다 작업 속도가 다를 수 있다. 내 기준으로 보통은 밤새 해도 아침까지 걸린다. 매달 1일부터 새 행사가 시작이니까 그 하루 중에서도 최대한 빨리 모든 행사 카드가 꽂혀 있을수록 그만큼 많이 고객에게 노출되는 것이니 매출과도 직결될 뿐 아니라, 가능하다면 근무자들에겐 이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아서라도 쉬지 않고 꽂는다. 음. 읽고 있는 당신의 시각에 따라 고된 일은 나서서 하려는 좋은 사장 같기도, 아니면 직원의 업무 능력을 못 미더워 하는 깐깐한 사장처럼 보이기도 하겠다. 글쎄 딱히 그래서는 아니고, 효율적인 측면에서 내가 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 발주를 넣는 주체가 나니까. 가게의 모든 상품은 내가 주문하기 때문에 어떤 게 있고 없는 지는 아마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리고 우리 가게 취급 상품이 아닌 상품 중에서 내가 몰랐던 괜찮은 행사가 들어가는 쇼 카드를 보게 된다면 또 그걸 새로이 시켜볼 수도 있는 거니까. 나는 내가 하는 일에 꼭 내 의도가 들어가 있는 게 좋거든. 그런 면에서 이 일을 내가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물론 하기 싫은 건 나도 마찬가지다. 가끔 시간 부족으로 주어진 양을 다 꽂지 못하면 소량의 남은 쇼 카드는 어쩔 수 없이 다음 타임에게 넘기기도 했다.

뭐 구매자의 입장에서는 별로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겠다. 여러분의 선택으로 골랐다고 믿고 있던, 은연중에 집어 든 1+1의 개이득 상품이, 사실은 대기업이 깔아 놓은 큰 그림을 배경으로 소매유통업 종사자인 우리의 작은 의도와 수고스러움을 거쳐 너님에게 보여지고 구매까지 이어진다는 걸. 그저 싸게 사면 장땡이겠지, 알 게 뭐람.


하여간 안 그래도 바쁜 날에 휴일까지 겹쳐 더욱 바빴다. 그 와중에 담배를 사러 왔던, 누가 보아도 어려 보이는 녀석 하나는 신분증을 검사하니 04년생이었는데, 신분증이란 걸 가져 본지 고작 1년밖에 안 된 주제에 자기가 무려 스물한 살이나 됐는데 아직도 신분증을 검사한다고 어이가 없다는 듯 나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쉬어댔고, 막 성인이 되어 신이 난 05년생들은 줄줄이 술을 잔뜩 사 가며 비장한 태도로 신분증을 들이밀었다. 06학번으로 대학교를 졸업한 나는 그들이 그냥 하찮기만 했다. 이것도 매년 겪는 일이다 보니 그 풋풋함과 귀여움도 점점 반감되어만 가서 0에 수렴할 지경이다.


새벽 내내 한바탕 손님을 치르면서도 쇼 카드 꼽는 일을 틈틈이 해야만 했다. 평소보다 밤손님이 많아 일의 진도가 더뎌서 지루하고 답답했다. 네 시가 가까워지면서는 그래도 좀 뜸해진 듯하여 숨 좀 돌리려고 담배 하나를 물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이제 막 불을 붙였는데 왼쪽 골목에서 이쪽으로 걸어 오고 있는 단골 얼굴이 보인다.

속으로 외쳤다.


‘아 시발ㅠㅠ’


다시 들어가려고 얼른 담뱃불을 끄려는 찰나에 문 앞까지 온 단골이 내게 말을 건다.


“엇, 천천히 다 피우고 들어오세요. 저 어차피 고르느라 시간 좀 걸려요.”


스윗한 그의 말에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날 뻔했다. 담배 한 개비를 태우는 5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의 잠깐의 휴식을, 그가 허락해 주어서.


“그럼 여기 밖에서 가게 안이 보이니까, 제가 보고 있다가 다 고르시고 카운터로 가져다 놓으시면 얼른 따라 들어갈게요.”


그는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그와 나는 그가 나를 위해 일부러 천천히 고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오래 고르는 연기를 할 그를 생각해서 한 모금 더 깊이 급하게 빨아들이고 있을 때, 그의 배려가 무색하게도 손님 하나가 더 들어가더라. 두 번째 손님은 나를 본체만체 하며 가게 문에 달린 종이 ‘쨍그랑’ 소리가 날 정도로 활짝 열어 제끼고서 터벅터벅 발소리를 내며 들어갔다. 조금만 더 있다 들어가고 싶은 나에게만 주관적으로 그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이 아니다. 잠깐 가게 밖에서 쓰레기라도 줍고 있는 나를 보면 실제로 손님들은 더 큰 동작으로 인기척을 과장하는 티를 내며 가게로 들어간다. ‘지금 나 들어가는 거 똑똑히 봤지? 기다리기 싫으니까 빨리 따라와서 계산이나 해’라는 뜻이다.

들여 마신 연기에 낮은 한숨을 보태어 다시 내보내면서, 재를 털어 담뱃불을 끈 다음 반도 더 남은 꽁초를 손에 들고 들어왔다.


카운터로 직진하는 폼이 역시나 담배 손님이었다. 팔아봤자 얼마 남지도 않는 담배. 게다가 카드 결제다.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린다. 담배 한 갑 4500원에 매익율은 겨우 10%. 그걸 본사와 계약된 비율로 분배한 뒤 카드수수료를 제하고 인건비를 포함한 운영지출까지 뺀다. 150원도 안 나오네. 내가 미처 다 피우지 못 한 담배 한 개비는 225원의 가치를 지닌다. 담배 한 갑 팔기 위해서 피우던 담배도 끄고 들어와야 하는 방금 같은 상황은, 올려 치더라도 150원 벌겠다고 225원을 버린 꼴이다. 차라리 안 파느니만 못 한 거다. 그래도 몇 모금은 빨아 봤으니 아주 손해는 아니고 그럭저럭 퉁 친 거려나. 자본주의 만세다.


계산을 끝낸 담배 손님이 뒤돌아 나가고서 먼저 들어와 있던 단골이 쭈뼛거리며 살 물건을 내려놓았다. 삼각김밥 하나와 음료수 하나. 역시 시간 들여 고를 것도 없었으면서 괜히 고르는 척을 하려던 게 분명 했다. 제 딴엔 시간 좀 벌어주려는 거였는데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리니 괜시리 안타까웠던 모양인지 표정이 꽤 무안하다. 나는 그 마음이 고마워서 카운터 한쪽 구석에 올려놓고 낱개로 파는 귤 하나를 집어 계산을 끝낸 그의 손에 쥐어줬다.


“아까 말씀이라도 감사해서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퇴근하며 근무일지에 날짜를 적는데, 습관적으로 2023년이라고 썼다. 나는 잘못 쓴 ‘3’ 위에 굵은 글씨로 ‘4’를 꾹꾹 눌러 고쳐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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