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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그린 Dec 13. 2015

만남, 설렘, 그리고 약속

손 끝으로 여는 작은 세상

                                                                                                                     

쿵쾅쿵쾅' 소리가 들렸다. '뚱땅뚱땅' 소리도 들렸다.

공원을 끼고 돌아가는 모퉁이에 언뜻 보면 잘 보이지도 않는 간판. 고개를 들어야 보이는 흰 바탕의 간판에, 'OO  피아노'라고 초록색으로 조그맣게 글씨가 쓰여 있었다. 문이 어디지 찾다 보니 꼭 가정집 대문처럼 생긴 철문이 하나 있었다. 문을 여니 좁은 계단이 있고 위쪽에 유리로 된 문이 하나 더 있었다. 피아노 올리려고 고생 꽤 했겠네,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계단을 올라갔다. 쿵쾅대는 게 피아노 소린지, 내 심장 소린지 모르게 울려댔다.


초등학교(내가 다니던 때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에 우리 동네 아이들은 주산 학원이나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시골이어서 그랬는지 그때 내가 몰라서였는지 유치원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를 포함한 보통 아이들은 주산 학원엘 다녔다. 조그마한 언덕길을 달려 올라가면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 주인아저씨 딸이 주산 학원 선생님이었다. 머리도 길고 뽀얀 피부를 가진 예쁜 선생님. 그 당시 선생님은 가장 예쁜 사람이었고 우린 항상 주산 학원으로 곧장 가질 않고 선생님께 먼저 들렀다 가곤 했다. 그냥 가서 인사하면 예쁘게 웃으시면서 조금 이따가 보자, 하는 그 말이 듣고 싶어서. 그렇게 가게를 들렀다가 학원에 가서 친구들과 주산도 배우고 주판을 바닥에 깔고 타기도 하면서 즐겁게 학원에 다녔다.


동네 아이 중 몇몇은 피아노 학원엘 다녔다. 그냥 보통 아이들 말고, 소위 말하는 부잣집 딸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너른 잔디밭이 있고, 마당 한쪽으로는 작은 골프장을 세워둔. 작은 우리 집 뒤쪽으로 바로 그런 집이 있었다. 그 집 딸도 나와 동갑 친구였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내가 다른 곳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도 계속 피아노 학원엘 다녔다. 들리는 말로는 꾸준히 피아노를 쳐서 예술 고등학교에 갔다고도 한다.


그 친구가 피아노 학원을 가는 날, 나도 따라간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피아노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부모님의 강요로 하는 거다 보니 지겹다며 함께 가자고 하던 날이 많았다. 궁금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뭐 그랬던 것 같다. 따라갔던 피아노 학원은 그 당시에도 매우 컸던 걸로 기억한다. 각 방마다 피아노가 있고 그 안에 들어가서 뚱땅뚱땅 연습하는 아이들도 있고, 밖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이론 공부를 하는 아이들도 있고.

그렇게 공부를 하고 있으면 선생님이 간식을 챙겨주기도 하고. 난 그 틈에 앉아 친구가 공부하는 책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방에 들어가 칠 때 함께 들어가서 띵띵 눌러보기도 했다. 손가락으로 느껴지는 묵직함이 좋기도 하고 누를 때마다 울리는 소리가 예쁘기도 했다.


그 친구네 집엔 피아노가 있었다. 검은색에 위쪽엔 할머니가 손수 뜬 흰 덮개가 있었다. 가끔 그 친구 집에 가면, 친구와 함께 피아노를 만져보곤 했다. 칠 수 있는 건 없었지만, 피아노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그래서 자주 그 친구 집에 갔다, 피아노를 만나기 위해.


차마 다니겠노라 부모님께 말하진 못했지만, 그 이후로 친구와 함께 피아노 학원엘 종종 갔다. 가서 내가 직접 배우는 건 아니지만, 친구가 앉아있는 기다란 피아노 의자에 앉아 손가락 열 개를 올려놓고 톡톡, 두드리는 게 좋았다. 부드러운 소리, 어느 땐 폭풍 같은 소리를 연주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좋았다. 트라이앵글, 리코더, 멜로디언 같은 악기 말고 그렇게 큰 몸체에서 어느 땐 물방울이 또로롱 구르는 것 같은 소리, 또 어느 땐 굵고 깊은 소리가 연달아 나는 게 신기했다.


이사를 하고 더 자라게 되고, 어른이 되어 바쁘게 지내다 보니 피아노 학원에 가서 행복했던 그 기억들을 살짝 덮어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사 온 동네에 피아노 학원을 보게 되었다. 어설프게 피아노를 치는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예전의 행복했던 피아노와의 만남이 생각났다. 그래서, 찾아갔다.


그리고 피아노와 매일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바빠서 매일 찾아가지 못하더라도, 꾸준히 몇 년간은 만나야지 생각했다. '도레미'부터 배우더라도, 그래서 내가 치고 싶은 '캐논 변주곡', '월광' 같은 곡은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치게 되더라도. 피아노와 어렵게 만나 설레는 마음 확인했으니 오래도록 함께 있겠다고, 나 자신과 약속했다. 계단을 오르며 쿵쿵대는 심장 소리가 옅어지고 피아노를 두드리는 게 일상이 되어 버리게 되는 어느 날, 그런 날이 올 때까지 꼭 꾸준히 피아노를 배우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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