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의 웃음이 멈춘 곳에서 철학은 시작된다

<조커: 폴리 아 되>로 바라본 생명과 개념의 변증법

by 이명

※이 글은 영화 「조커: 폴리 아 되」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2024년 영화계의 최대 문제작을 꼽으라면, 많은 이들은 「조커: 폴리 아 되」를 꼽을 것이다. 영화제의 소수의 평론가들은 영화의 완성도와 배우들의 좋은 연기를 칭찬하며 좋은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으나, 개봉 직후 대부분의 관객과 평론가는 혹평을 아끼지 않았다. 이 영화는 분명히 관객을 끌어당기고 몰입하게 만드는 데에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적어도 주제의식과 그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탁월한 면모를 보인다. 이 포스트에서는 '광기'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영화의 주제의식을 분석하고, 광기가 아서 플렉이라는 개인, 그리고 또다른 인간들 사이로 어떻게 스며드는지 논해보고자 한다.


1. 세 번째 두 광기(Folie à deux)

영화의 부제 Folie à deux를 직역하면, '둘의 광기'라는 뜻이 된다. 전치사 à는 두 주체를 연결하는 접속사의 역할을 하며, 광기가 두 대상을 매개로 해서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즉각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둘'은 누구인가?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 대상을 찾아낼 수 있다. 영화 전반에 걸쳐서 등장하는 '리 퀸젤'이라는 인물과 주인공 '아서 플렉'은 광기의 두 극을 이룬다. 교도소와 정신병원에서 통제받으며 광기를 억누르고 살아가던 아서는 리를 만나면서 자신의 두 번째 인격 조커를 되살려낸다. 리는 '조커'라는 인격을 사랑하고, 그 인격을 공유받는다. 이는 Folie à deux가 병리학적으로 의미하는 공유정신병적 증세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광기의 쌍, 리와 아서

그리고 여기에서 직접적으로 두 번째 쌍이 발생한다. 아서 플렉 개인의 인격과 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조커의 인격이 그것이다. 이것은 아서 플렉의 내면에서 분리된 두 쌍을 이뤄내며, 하나의 뇌 속에 두 개의 자아를 만들어낸다. 이 순간 아서의 영혼은 리가 만들어낸 페르소나와 자신 개인의 정체성 사이에서 분열하게 된다. 그리고 이 두 자아의 싸움은 영화 전체를 오가며 끊임없이 엎치락 뒤치락하는 핵심적 주제의식으로 탄생한다.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광기-쌍의 양태들은 이렇게 둘이지만, 우리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쌍을 더 찾아낼 수 있다. 리는 단순히 하나의 주체가 아니다. 그녀는 오히려 관객과 고담의 시민 전체를 대표하는 인물로써, '조커'라는, 순수한 광기를 가진 악인을 추종하는 집단을 나타낸다. 조커는 하나의 사회현상이 되고, 사람들은 '조커'로서 아서 플렉을 결정짓는다. 그럼에도 그의 내면에는 조커로서 규정되지 않는 하나의 어떤 흐름이 있다. 분리된 두 자아는 결국 사회-개인이라는 새로운 쌍을 형성하게 된다.


2. 광기와 생명, 직관과 분석

이 대립쌍들은 각기 무엇을 나타내는가? 우리는 세 대립쌍들을 통해 생기(生氣)와 기계의 대립을 관찰해낼 수 있다. 아서 플렉으로 대표되는 전자의 항들은 생기의 흐름을 나타내는 한 생명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들은 아주 개인적이고, 내면적이다. 베르그손이 '직관'을 통해서만 지속에 가닿을 수 있음을 지적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이성적 사고를 통해 아서 개인에게 결코 닿을 수 없다. 그에게 닿기 위해서는 그에게 이입해야하고, 그가 처한 입장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조커'는 우리에게 너무도 쉽게 인식되는 존재이다. 그는 기득권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광기에 차있는, 그리고 우리에게 사이다를 선사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조커에게서 어떠한 흐름을 보지 않는다. 그는 살아있는 생명이라기보다는, 우리들 개개인이 원하는 바를 모아놓은 비-생명 그 자체에 가깝다. 우리는 조커에게서 생명이라기보다는 기계의 형상을 본다. 우리는 그를 이해하는 것이지, 공감하는 것이 아니다. 아주 거친 추상화를 통해 아서 플렉과 조커는 생명과 비-생명의 면모들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

생명과 비-생명의 차이는 결정적으로 무엇인가? 조커는 아서 플렉이라는 인물의 구성된 측면만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 작품의 전작인 「조커」의 내용을 상기해보면, 조커는 탄생한 것이 아니라 구성되었다. 조커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사회적 시선, 개인적 어려움, 고담 시의 환경 등, 여러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합쳐져 탄생한 일종의 복합물일 뿐이다. 조커에게는 그 이상의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조커는 다시금 고담 전체의 광기로 환원될 수 있으며, 개인의 광기들을 모두 합치면 다시 조커라는 괴물이 탄생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커는 아서 플렉 개인과 달리 총체적인 이해가 가능한 존재이다. 이러한 점은 영화 내에서 개연성이라는 형태로 다시 탄생하게 된다. '아서 플렉'의 행동은 결코 개연적이지 않다. 그가 할리퀸에게 빠져드는 장면, 조커라는 가면을 다시 쓰게되는 장면, 그리고 자신이 조커인지 아닌지 고뇌하는 장면은 그의 주변 상황들을 아무리 합쳐도 납득할 수 없다. 그가 조커는 없다고 선언하는 장면은 이러한 무너진 개연성의 대표격인 장면이다. 영화는 최소한의 개연성을 확보해야 하므로 그가 간수에게 고문을 당했다는 묘사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그가 조커를 포기하는 고리로는 너무 약한 개연성이다. 그러나 이 약한 개연성은 오히려 아서 플렉이 생명임을 처절하게 강조한다. 생명의 행동들은 결코 개연적이지 않다. 개인의 내적 결심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비약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이해할 수 없는 행위들을 많이 수반한다. 생명의 본질은 창발한다는 것이고, 세계에서 창조가 발생하는 유일한 지점이다.

조커는 다르다. 겉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광기로만 보일 수 있지만, 그의 분노는, 그의 행동은 철저히 개연적이다. 조커가 광기를 발산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전작에서는 사회에서 느낀 모멸감 때문이었고, 이 작품에서는 리에 대한 구애의 행위이다. 그것은 명시적으로 광기를 발산하라는 어떤 텍스트에 의해 지배받고 있으며, 철저히 구성적인 행동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행동이 아니라, "광기를 연기하라"는 텍스트에 지배받는 죽은 연극일 뿐이다.

영화의 약한 개연성은 오히려 생생한 생명이 숨쉰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3. 광기의 역사와 만들어진 주체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의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광기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일까? 우리의 일반적인 통념을 고려하자면, 광기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다. "악에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경고적 표어가 이를 증명한다. 광기는 우리의 언어로 이해될 수 없는 것들을 일컫는 것이다. 그러나 그 광기, 또는 악에 서사를 부여하는 순간, 그것은 우리가 이해 가능한 언어를 통해서 광기를 구성물로 되돌려 놓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엄격한 관점에서 순수한 광기는 우리가 이해 가능하지 않은 고유한 영역을 가져야만 하는데, 이는 광기를 생명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자인하는 것이 아닌가?

미셸 푸코가 그의 국가박사학위 논문 「광기의 역사」에서 천착한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그는 광기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구성물이라고 보았다. 르네상스 시대에 우리는 광인과 소통했다. 광인들은 때로는 지혜를 가진 존재로 여겨졌으며, 인간으로 인지되고는 했다. 그러나 17-18세기를 거치면서 광기는 인간의 범주에서 쫓겨나게 된다. 데카르트는 코기토 개념을 통해 광인들을 그들만의 수용소에 가두어버렸고, 그것은 구경거리가 된다. 사람들은 18세기 말 정신의학이 발전하며 광인들과 다시 소통을 시작했다고 믿지만, 사실 그것은 이성의 관점에서 통제된 광기일 뿐이다. 광인은 물리적으로 풀려났지만, 의학적/도덕적 통제를 계속해서 받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커의 비-생명성이 해명될 수 있다. 근대적 이성, 즉 아서를 진단하는 정신과 의사와 아서를 심판하는 판사들은 그를 광기에 찬 인물로 바라본다. 아서는 이들 앞에서 철저히 조각났다가 조커로 다시금 재결합된다. 그러나 그곳에서 생명성은 빠져나간 상태이며, 조커에게는 순수한 광기, 구성된 비-생명적 광기만이 남게 된다. 리 퀸젤의 사랑 역시 같은 맥락이다. 언듯 보기에 리는 내면에 있는 조커를 깨우라고 말하면서, 조커를 순수한 생명으로서 재탄생시키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영화에서 내내 노래하라, 춤추라고 이야기한다. 이 요청에는 조커가 해야할 행동들이 이미 내포되어 있다. 조커의 광기가 생명성을 뿜어내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만들어진 광기일 뿐이다.

아서는 결말부에서 조커의 죽음을 선언하며 광기를 스스로 없애버린다. 그러나 생명성만이 남은 이 광인에게 더이상 편이 되어줄 사람은 없다. 그의 주변에는 더이상 대중도, 리도, 의사도, 판사도 없다. 역설적으로, 조커를 가두고 있던 아서가 조커로부터 자유로워진 순간에 세상은 광인들이 지배하게 된다. 아서를 죽이며 새롭게 탄생한 조커에게는, 더이상 서사가 없다. 그것은 영화가 그의 서사를 보여주지 않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누구도 그 서사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생명의 불빛을 꺼뜨리며 새롭게 탄생한 광기의 역사를, 이제는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생명은 죽고, 개념만이 박제되어 영원한 의미로서 남는다.

생명이 사라진 자리에는 순수한 개념적 광기만이 남았다.

4. 현실과의 단절로서 뮤지컬

이 영화가 혹평받는 이유 중에 하나는, 뮤지컬의 활용이 극을 매끄럽게 만들기보다는 극을 단절시킨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다분히 의도된 것이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를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시간은 단절적이라는 아이디어를 바슐라르로부터 받아왔기 때문이다. 본작은 영화의 진행이라는 시간의 흐름속에서 단절의 수단으로 뮤지컬을 활용한다. 뮤지컬이 시간의 흐름을 강제로 멈춰세우고, 그 틈을 벌려 앞과 뒤를 단절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관객은 영화에서 순식간에 몰입하기를 멈추면서 앞과 뒤의 급격히 변화한 등장인물들의 심경을 직시하게 된다. 뮤지컬이 인물의 내면을 깊이 보여주지 못했다는 혹평은 그러므로 어떠한 의미에서는 정확한 통찰이다. 애초에 이 영화의 뮤지컬들은 그러한 의도로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령 지루함을 낳았을지언정, 철학적 의미가 있는 표현인 것이다. 만약 뮤지컬에서 조커와 리의 내면이 온전하게 드러났다면, 시간의 연속성은 깨지지 않았고, 그렇다면 조커의 '생명성'은 영화 속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아 아서와 조커가 합쳐지는 결말을 낳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독은 의도적으로 불협화음과 단절을 심어놓음으로써,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생명'이 아니라 연출된 '쇼(비-생명)'임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조커: 폴리 아 되」에는 낯설게 하기로서의 뮤지컬이 활용되었다.

5. 결론: 생명과 비-생명의 변증법, 그 끝에 멈춰선 이유

「조커: 폴리 아 되」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좋은 영화라고 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메시지를 위해서 캐릭터를 부역시키고, 전작의 탁월함을 기대한 이들에게는 실망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 적어도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 측면에서, 이 영화는 아주 탁월하다. 생명과 비-생명은 끊임없이 서로를 침잠한다는 것, 그리고 그 끝에서는 비-생명에 의한 생명의 절단이 발생한다는것, 마지막으로 이 절단을 통해 순수한 개념적 의미들이 탄생한다는 것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남기는 메시지일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이 영화에서는 탄생한 의미가 순수한 '광기'와 '혼돈'이라는 부정적 개념들이었으나, 논리를 충실히 따라가면 마지막에 탄생하는 것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수 있다는 사실 또한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그 끝에서 순수한 규범의 윤리학이 탄생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살아있는 한 인간의 고통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가, 아니면 안전하게 박제된 '조커'라는 캐릭터를 소비하기를 원하는가?

또한 본 글에서는 영화의 개념적 분석을 위해서 생명과 비-생명을 의도적으로 구분지었지만, 둘은 항상 한 개체의 현재와 미래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명확하다. 생명에서 비-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을 개념적으로 추적하는 것, 그리고 역사 속에서 이 탄생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나는지 관찰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마지막으로 생명의 형이상학이 나아가야 할 작업 방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아서 플렉의 웃음은 멈추었고 그의 육체는 무대 위에서 스러졌다. 그러나 바로 그 생명의 침묵 속에서, 그때야 비로소 절단을 통해 태어난 차가운 개념들은 이제 막 우리의 사유 안에서 춤추기 시작한다. 순수한 개념이 숨 쉬기 위해서는 생명이 멈춰야 한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서늘한 진실일지도 모른다.